다람쥐 쳇바퀴 돌듯, 수포자들의 수학의 정석이 앞 부분만 더러워졌듯, 이 책도 앞에만 손자국이 남아있다.
구입한 책이어서 그런지 손이 안 간다.

나는 어린 도미사와 시게루의 생명을 빼앗은 범인을 용서하지 못한다. 동시에 나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 시게루의 죽음을 환영하는 자신이 똬리를틀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미사와 시게루는 내 아들이다. - P18
애당초 도미사와 부부가 사건에 휘말린 건 범인의 우연한 실수 때문이었다. 범인은 야마쿠라 가家의 자식을 유괴하려고 했다. 그러니 앞으로의 수사를 고려한다면 도미사와 부부보다 야마쿠라 시로, 즉 내가 더 중요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 P19
"당신이 시게루를 죽였어!" 그 말이 귓속에서 떠도는데 가즈미와 통화한다니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었다. 지금 가즈미와 통화하면 이중의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시게루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을지도 모른다. 그럴까봐 무섭다.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 무섭다. - P20
복도를 울리며 다가오는 발소리가 난잡한 사고의 흐름을 끊었다. 노크도 없이 다짜고짜 문이 열리더니 다케우치가 들어왔다. 예의 그 벌레 씹은 듯한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따라오시죠." - P23
"이제 아이가 발견됐던 현장으로 갈 겁니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도미사와 고이치가 말했다. "괜찮다면 야마쿠라 씨도 함께가주시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다. "네? 왜 저까지?" "야마쿠라 씨에게는 시게루 일로 큰 폐를 끼쳤습니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범인의 지시대로 행동해주신 것까지....." - P23
"책망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도미사와 고이치는 다급히 손을 저었다. "야마쿠라 씨에게는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건 가슴이 찢어지지만, 그건 별개의 일입니다. 제 아들을 위해서라도 함께 가주시지 않겠습니까?" 진심인 듯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제가 함께 가면 부인이 불편해하실 텐데요." - P24
"당신이 싫다고 해도 데려갈 작정이었습니다." 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케우치가 말했다. "이 사건의 주역은 야마쿠라 씨 당신입니다. 그 사실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 P25
도로 오른편으로 산이 육박해왔다. 활 모양으로 커브를 그리는 길이라 시야가 막혔다. 왼편 가드레일 너머로 밑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낭떠러지를 타고 펼쳐졌다. 이윽고 헤드라이트가 ‘오우메 요양원‘ 간판을 비췄다. 속도를 늦춰 도로 왼편으로 빠진차가 요동치며 좁은 비포장도로를 내려갔다. - P25
"아이 아버지입니까?" 아까 목소리의 주인공이 우리에게 손전등을 비추며 물었다. 하마터면 내가 대답할 뻔했다. 그러나 나보다 먼저 도미사와 고이치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시신은 여기 있었습니다." - P27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등에 우산을 씌워주지도 못했다. 죽은 아이가 도미사와 고이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눈앞에서 똑똑히 알게 된 기분이었다. 도미사와 고이치는 나와 미치코의 관계를 알고 있을까? 그런 의문이 문득 내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여기까지 꼭 함께 와달라고 했던 것이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런 곳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 P28
나는 미치코에게 시선을 옮겼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양팔은 축 늘어졌고, 숨이 목을 훑고 내려갈 때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모습을 보니 가즈미가 경찰을 부른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아내가 110에 신고한 마음이 이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신고가 시민의 의무임은 분명하고, 가정의 평온을 깨뜨린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경찰의 손을 빌리는 편이 낫다. 하지만 그건 다카시의 안전이 보장되고 난 뒤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 P52
"걱정 마십시오. 이집 주변에 수상한 차량은 한 대도 없었습니다. 만의 하나 범인이 감시하고 있다고 해도 제가 시선을 끌었으니 뒷문에는 신경쓰지 못할 겁니다. 우릴 믿으세요. 현장 팀의 책임자는 다케우치 경부보입니다. 앞으로 다케우치의 지시에 따라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상자 안에는 전화 역탐지 기자재가 들어 있으니 들고 가주십시오. 오래 머물면 의심을 살 테니까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 P55
"스기나미 서 수사계 경부보 다케우치라고 합니다. 부인으로부터 110 신고를 받고 바로 출동했습니다." 이마가 좁고 볼의 살도 얄따랗다. 눈매가 영민해 보이긴 하나어딘지 모르게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목소리가 특히 그랬다. "수고 많으십니다." - P54
"도미사와 미치코 씨입니다. 유괴된 아이의 어머니입니다." 다케우치는 미치코의 얼굴에서 초췌한 흔적을 한눈에 알아본듯했다. "아드님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최대한 빨리 조치하겠습니다." 미치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답할 기운은 아직 없었다. 가즈미가 눈치 빠르게 미치코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미치코는 못 들은 듯 거실과 부엌 사이의 식탁 자리로 이동했다. - P55
처음에는 임상심리와 관련한 전문가라 여기고 가즈미의 병세에 대해 상담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어느새 나는 미치코에게 위로를 구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아내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는 가즈미 곁에 있어도 고통스럽기만 했다. 사랑하니까 더더욱 아내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숨통을 틔울 곳이 필요했다. 그 선택의 결과가 우연히도 미치코였을뿐, 사실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나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 P64
다케우치의 표정이 밝아졌다. "범인이 이 차를 지목한 건 카폰을 이용해 다음 지시를 내리려고 했기 때문일겁니다. 이제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군요. 번호를 가르쳐주십시오. 감청하겠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 P75
"늦지 않은 모양이군." 범인의 목소리였다. "어디서 걸고 있지? 내 차가 보이나? 이제 어떡하면 되지?" "뭘 그렇게 서둘러? 거기는 첫번째 통과 지점이야.‘ "뭐? 그게 무슨 의미지?" "그곳이 거래 장소가 아니라는 뜻이지. 그대로 도하 도로를서쪽으로 달려, 후추 가도 막다른 데 데니스 고쿠분지 지점이 있어, 십오 분 후 거기 주차장에서." 그렇게만 말하고 뚝 끊어버렸다. - P77
내 예상이 맞았다. 이후 구니타치 역에 도착한 뒤로도 이런식으로 시내를 끌려다녔다. 전화 간격은 점점 짧아졌고 그는 복잡하게 코스를 만들더니 일일이 지시했다. 구니타치는 내 모교가 있는 동네다. 학창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범인의 지시대로 한밤의 시가지를 우왕좌왕하며 달렸다. 대부분이 무의미한 쳇바퀴 돌기로 시간과 신경만 소모했다. - P78
단 하나 내게 유리한 점은 경찰이 범인의 전화를 감청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동차를 미행하지 않아도 내 현재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범인은 이 사실을 알 리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다음 목적지를 카폰으로 지시할 리 없다. - P78
"왼편에 예식장 건물이 보일 거다." 범인이 말했다. 자세히 보자 ‘헤이안카쿠‘라고 적힌 간판이 보였다. "보여." "다음 교차점에서 우회전." 그의 목소리에 지금까지 없던 긴박한 울림이 있었다. "백 미터 전방에 쇼와 기념 공원 다치카와 게이트가 있다. 앞으로 일 분 후, 게이트 안에 있는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겠다. 열 번 울릴 때까지 받지 못하면 그 시점에서 교섭은 끝이다. 서둘러." - P79
"여덟번째 벨이었어. 고생했군." "대체 왜 이런 짓을! 날 갖고 노나?" "왜냐고? 약속을 어긴 주제에 그런 말이 잘도 나오는군." "약속을 어겼다니?" "경찰에 알리지 말라고 했잖아!" 놀란 나는 숨을 들이쉬는 것마저 필사적으로 참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뭔가 착각했겠지. 경찰에 알리지않았어." "시치미떼도 소용없어. 야마쿠라, 당신 차에는 미행이 붙었어. 그걸 확인하려고 이리저리 끌고 다닌 거라고." - P80
뒤통수를 맞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까지 카폰을 쓴건 우리를 방심시켰다가 이런 식으로 허를 찌르기 위해서였던것이다. 처음부터 감칭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범인이 우리보다 한수 위인 것 같다. 시키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없었다. "아, 알았어." "서둘러 여유가 없어." - P81
"여보세요."다케우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범인이 뭐라고 한겁니까?" "미행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설마." 당황한 기색이 그대로 전해졌다. "눈치챘을 리 없습니다." "그럼 미행을 붙인 게 사실이었습니까? 그러지 말라고 그만큼이나 얘기했잖아요." - P81
"범인이 집 전화를 도청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약속 장소를말하면 아이가 죽어요."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믿습니까?" 다케우치가 동요한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 말이야말로 공갈이라고요. 아마쿠라 씨, 지금 범인의 거짓말에 농락당하면 안 됩니다." - P82
나중에 생각해보면 역시 내 판단이 틀렸다.다케우치의 말대로 나는 완전히 범인의 계략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어둠이 짙게 내린 도로를 무작정 내달려 사야마 공원으로 갔다. - P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