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의 자살 대체물
중세 사회가 자살 문제에 있어서 예외였을 확률은 매우 낮다. 비록 고대비그리스도교 사회와 대조적으로 중세에는 널리 알려진 자살이 거의 없다고 해도 그렇다. 중세에는 루크레티우스, 브루투스, 카토, 세네카 같은사례가 없다.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명한 자살 사례가 한 건도 없다. - P24
이러한 관점에서 마상시합은 ‘유희적 자살‘과 유사하다. 결투 재판이나 신의 심판을 가리는 그 밖의 다양한 형식들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끊이지 않는 전쟁은 자살 충동의 중요한 배출구인 동시에 직접적 자살을 방지하는 수단이었다. - P25
프루아사르는 14세기에 90명의 기사가 싸움터에서 물러나느니 그 자리에서 죽기를 택했다고 전한다. 『플랑드르 연대기』에 따르면 쿠트레 전투에서의 라울드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꽃이 죽어 버리는 꼴을 보느니 살고 싶지 않다고 했을 것이다. - P25
중세의 연대기에는 이러한 전사들 특유의 간접 자살들이 넘쳐난다. 심지어 때로는 직접적 죽음까지 등장한다. 그래서 외드에게 패배한 부르주 주교와 그 무리는 검을 들어 자기 몸을 찔렀다고 『생 브누아의 기적』은 전한다. 불로뉴 백작 르노처럼 모욕을 당하느니 죽음을 원한 죄수들도 있었다. - P26
잔다르크의 예는 좀더 심란하다. 그녀는 죄수 신분으로 탑에서 투신했는데 그 이유가 아주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심문을 받는 동안잔다르크는 콩피에뉴 민간인 학살을 암시하여 "선량한 사람들이 죽어나간 후에 계속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고 했다. 한번은 "프랑스의 적영국인들의 손아귀에 떨어지느니 죽는 편이 낫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 P27
그러니까 중세에도 자살은 있었지만 사회계층에 따라 그 양상은 크게 달랐다. 농민과 수공업자는 가난과 고통을 못 이겨 스스로 목을 맸다. 기사와 성직자는 수치를 면하고 이교도의 승리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서죽음을 자초했다. - P27
문학에 나타난 자발적 죽음
문학은 이 이분법적 시각, 즉 어떤 때는 자살을 저주하고 어떤 때는 자살을 칭송해 마지않는 태도를 잘 보여 준다. 작가, 성직자, 음유시인 들은 대개 자살을 그리스도교 원칙에 따라 비난한다. - P28
자살의 이유는 불가능한사랑, 지나친 번민, 후회, 수치, 패전의 모욕을 피하고픈 의지 등이다. 요컨대, 실패했는데 그 패배를 참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이다. 자살이라는 치명적 행위를 촉발하는 것은 분노 폭발적인 질투심이나 절망, 즉 죄다. 게다가 자살은 주로 악한들이 한다. - P30
무훈시들은 일견 대체로 자살에 매우 적대적인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이 노래들을 좀더 면밀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래서 바예는 "가장 잘알려진 무훈시들의 유명한 주인공 중에서 죽음을 자초하지 않은 자는 한명도 없다"고 했다. - P30
무훈시들은 직접적이지만 명예로운 자살의 예들도 담고 있다. 「오베리」에서 고트롱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스스로 목을 맨다. 「도렐과 배통」에서 베아트리스는 아들이 죽고 남편이 유배당하자 탑에서 뛰어내린다. - P31
이 모든 자살은 분명히 실추 행위로서, 슈미트의 말마따나 "문학에서도 자살은 모든 행위 가운데서도 오직 넘어설 수 없는 고통만이 명령할수 있는 불길한 행위"라는 데 동의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귀족들의 행적에서 자살은 칭송할 만한 영웅적 행위로 여겨질 뿐, 비난을 받지는 않는다. - P33
자살도 계급 따라
중세의 자살은 두 얼굴을 지닌다. 거의 평민들에게만 자살을 탄압하고 귀족들은 봐주는 식이다. - P33
이러한 차이는 권리와 도덕에서 재발견된다. 대의를 위한 이타적 자살이든 사랑·분노· 광기에서 비롯된 자살이든 귀족의 간접 자살은 허용될 수 있었다. 그러한 자살은 어쨌든 귀족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된 것이었다. - P34
반면, 상놈의 자살은 이기주의자와 비겁자의 고립된 행위다. 그는 몰래 목을 매닮으로써 자신의 책임을회피한 셈이다. 그의 동기는 절망, 곧 사탄이 사주한 치명적 죄악이다. - P34
자살 성향이 있는 성직자들도 특수한 하나의 부류로 묶인다. 문헌상으로 사제나 수도승의 자살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러나 추문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은폐하거나 사고나 자연사로 위장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 P35
자살한 성직자의 시신은 민법에 의한 형 집행은 면했다. 14세기 말에왕실 법관 장 르 코크는 성직자는 온전한 정신으로 자살을 해도 그 시신을 관할 교구의 주교에게 인도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얼마 전에 자살한 생트 크루아의 원장신부에 대하여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사제였으므로시신이 교수되어서는 안된다." - P35
사실, 이따금 민법과 교회법 사이의 의견차가 발생했다. 특히 자살한 사람의 재산을 지방풍습에 따라 몰수하는 문제를 두고 곧잘 이러한 의견차가 빚어졌다. 몽트뢰유 벨레에서 칼로 자신을 찔러 자살한 사제 장 앙브루아 사건에 대해서도 양주에서 문제가 제기됐다. - P36
이단의 자살은 박해 때문에, 혹은 독자적인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개종을 거부하고 형벌을 피하려는 뜻에서 자결을 택하는 경우는 많았다. - P37
게다가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수장들은 알비파의 신앙적 고집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자살로 내몬 면도 없지 않았다. - P37
그러나 영웅적인 시대의 자발적인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은 존경할 만할지언정 기쁜 마음으로 화형대로 걸어가는 알비파들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악마가 알비파들에게 그 같은 대담성을 불어넣는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똑같은 자살 행위를 해도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은 구원받고 알비파 순교자들은 저주받는다. - P38
행위 그 자체보다는 자살자의 동기, 인물, 사회적 출신이 더 중요했다. 물론 법과 원칙은 매우 엄격했으나그 적용 실태는 놀랄만큼 유연했다. 그리스도교 문명에서 자살을 죄로보는 원칙은 자명하지도 않고 본래적이지도 않다. 사실, 그리스도교의 초기 자료들은 이 주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 - P39
히브리 문화권에서의 자살
구약성서는 자발적 죽음의 몇몇 사례를 철저하게 중립적으로 다룬다. 사울 왕은 팔레스타인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무엘서』는 그저 "그러자 사울은 손수 칼을 뽑아 자결하였다"라고만 말한다. - P39
삼손도 자신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머리 위로 신전을 무너뜨렸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이다. - P39
이 자살들은 대체로 영웅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전통이 지속되다가 1,2차 유대전쟁에서 더욱 확장되어 개인 및 집단자살이 크게늘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저작도 이 영웅적 행위들을 전한다. - P40
이러한 예들을 나열하기보다는 요세푸스가 말하는 ‘영웅적 행위들‘ 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마사다 항전을 살펴보자. 서기 73년, 1000여 명의 유대인들은 바위 요새에서 로마인들에게 악착같이 항거하였으나 결국 요새가 함락될 위기에 이르렀다. 유대인들의 수장 엘레아잘은 상황에 걸맞지 않은 장문의 연설로 집단자살을 종용한다. 이 연설은 구약성서적인맥락에 스토아주의, 신플라톤주의, 힌두교를 연상케 하는 요소들을 결합한 명실상부한 자살옹호론이다. - P41
독이 있으면 해독제도 있는 법,『유대전쟁사』에서는 엘레아잘의 연설에 정반대되는 주장도 볼 수 있다. 이번에는 요세푸스가 민감한 상황에서 직접 자신의 뜻을 밝힌다. 요세푸스가 자기편 사람들과 함께 로마인들의 포로가 된다. 그는 로마인들이 그들의 목숨을 빼앗지 않겠다고 약속하자 자기편 사람들에게 자살을 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 P43
어느 쪽을 믿어야 할까? 자신이 직접 자살할 위기에 놓여 자살반대론을 펼치는 요세푸스? 아니면 (엘레아잘의 연설은 요세푸스의 창작이 명백하므로) 엘레아자의 목소리를 빌려 자살옹호론을 펼치는 요세푸스? 이 문제는 매우 부수적이다. 중요한 것은 구약성서와 직결된 유대인들의 세계에서 자살에 대한 입장은 고정되어 있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데 있다. - P45
물론 모세의 율법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제5계명을 자살에 대한 금지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계명이 자기 자신의 생명에도 적용되는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성경은 자살의 사례를 전하면서 타살의 경우처럼 명백하게 비난을 하지 않는다. - P45
게다가 제5계명은 다양한 예외들을 인정한다.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거나 정당방위로 사람을 죽이거나 죄인을 처형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세 그리스도교가 성경에서 자살반대론의 근거를 찾기란 상당히 곤란했다. - P45
하지만 요한이 전하는 예수의 말, 즉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라는 "나는 내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같은 발언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죽음, 소위 자살에 대한 긍정 아닌가?
요한복음 10:15 - P46
그리스도는 유월절을 맞으러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자신의 운명을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알면서도 자신의 죽음을 향하여 걸어갔고 재판을 받는 동안 죽음을 피하기 위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예수의 자살은 신인(神人)과 대속이라는 맥락에서 일반 자살과는 전혀 다른 의미, 전혀 다른 차원을 지닌다. - P47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박해를 받는 동안 이러한 뜻에 입각하여 기꺼이 순교했다. 1세기 말에 성 요한은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죽기까지 싸웠다"라고 기록했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 해서 목이잘린 사람들을 하늘나라에서 보았다고 했다. - P48
그러나 그리스도교인의 죽음은 신심의 증거라야만 했다. 죽음 그 자체를 추구하거나 절망을 이유로 죽음을 원해서는 안 된다. 순교자의 복된 죽음은 죄인의 절망적인 죽음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 P48
삶은 멸시할 만하나 참아내야 한다. 죽음은 바랄 만하나 스스로 죽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인의 삶은 이 어려운 연습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단초를 얻어 여러 신앙 유파들에서 발전된 주요한 가르침들은 오히려 자발적 죽음을 자극하는 콘텍스트를 구축했다. - P49
성 아타나시우스는 원칙적으로 그리스도교인은 스스로 죽음을 구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가 보인 모범을 생각하여 그들을 비난하지는 못했다. 나시안스의 성 그레고리우스는 일반적인 자살을 단죄하면서도 마카베오 형제의 모친의 자살은 찬양했다. - P50
이러한 망설임은 순교외의 상황들에까지 확장된다. 314년 앙카라공의회에서 공포된 법령 제25조는 남성의 유혹에 넘어가 임신했다가 버림을 받고 자살한 여인을 단죄한다. - P51
다른 여러 영역에서 그랬듯이 교리와 처벌에 대한 입장도 이단 종파들과의 투쟁 과정에서 강경하게 변했다. 34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부터 자살을 찬양하는 도나투스파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발적 죽음은 규탄의대상이 되었다. - P51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자살 금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 이러한 강경론은 더욱 뚜렷해진다. 그가「신국론』에서 발표한 엄격한 교리는 훗날 교회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 "우리가 말하고, 선언하고, 확증하나니 어떤 식으로든 일시적인 고행을피하기 위해 스스로 죽는 자는 영벌에 떨어질 위험을 무릅쓰는 셈이다. 아무도 타인의 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 타인의 죄가 우리를 더럽히지 못하니 이는 가장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아무도 사후의 삶이 더 나을 거라는 희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죽는 죄를 저지른 자들은 그러한 내세에 결코 이르지 못한다." - P52
자살에 대한 절대 금지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플라톤주의의 영향과 도나투스파에 대한 과도한 반발에서 유래했다. 플라톤주의자들은 실제로 일부 예외를 인정하긴 했지만 자살을 신권 침해로 여겼고 이러한 사상은 플로티노스, 포르피리오스, 마크로비우스, 아폴레이우스에게이어졌다. - P53
아우구스티누스는 당혹감이나 모순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삼손도 죄인인가? 교회가 우러러보는 성녀 펠라기아는 목숨을 바쳐 순수를지켰는데 그녀도 죄인이란 말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도식에 들어맞지 않는 이 예외들에 대해서 그들은 신의 특별한 부름을 받은 것이분명하다고 인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발적이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제5계명은 절대적이지 않다. 죄인을 사형시키거나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은 얼마든지 허용되니까. - P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