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같이 창구로 가서 상담해보죠."
견우가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꽤나 자신 있는 말투라, 당신은 거인에게 업혀 하늘을 나는 듯한 심정으로 따라나섰다. 남자는 창구에서또다시 스위스 방언으로 상대를 획획 떠밀듯이 질문을 거듭했다. 한참지난 후, 당신 쪽을 돌아보며 메모를 건네주었다.
"지금 빈행 야간열차가 올 테니 그걸 타고, 새벽 네시에 잘츠부르크에서 내리세요. 거기서 그라츠행 첫차를 타면 점심에는 도착할 겁니다."
당신은 마술이라도 본 것처럼 멍해졌다. 속은 것 같기도 하고 구원받은 것 같기도 한 기분이다. 그런가, 방향이 조금 다른 야간열차를타고 가다가 갈아타는 식으로 궤도를 수정하면 시간에 맞출 수 있는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방식도 있다.
"정말 신세 많이 졌습니다. 만약 당신이 없었으면 어쩔 줄 모르고쩔쩔맸을 거예요." - P29
당신은 이탈리아를 둘러보았다.
로마에는 전 세계 자본주의국가에서 엇비슷한 배낭을 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같은 반 친구인 양 인사를 주고받았다. 광장에 가서 분수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종잡을 수 없는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스파게티를 먹으러 가자며 여러 명이 레스토랑을 찾아 마을 이곳저곳을 돌고, 너무 비싸 들어갈 가게가 없어 결국 조그만 식료품점에서 빵과 물을 사다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다들 서로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느꼈다. 어찌된 영문인지 하나같이 자기는 전쟁을 싫어하고 여행을 좋아한다고 굳게 믿었고, 돈이 없는 것과 아직 일도 가족도 없는 게 공통점이라고 막연히 느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모두의 공통점은 오히려 돈이 있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돈이 있다는 것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늘 사용하는 돈을 외화로 교환할 수 있다는 의미다. - P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