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문도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 시공사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 소용돌이쳐.

    - 내 할 수 있는 것은.

    - 바라볼 밖에.

 


    일본의 옛 시조의 한 형태로 '하이쿠'라는 것이 있습니다. 5 · 7 · 5조 17음으로 이루어진 단시로 계절을 상징하는 구절이 있어야하고, 단숨에 읽어 내려가는 걸 막기 위해 한 단락을 쉬어줘 강한 영탄이나 여운을 줘야 한다고 합니다. 비록 한문을 이용한 17음은 아니지만, 지금 요코미조 세이시<옥문도>읽고 난 느낌을 하이쿠로 표현하자면 바로 위에 두서없이 쓴 글귀와 같을 것입니다. 강력하게 빨아들이는 흡인력, 으스스한 분위기에서 오는 무대 장악력, 긴다이치의 추리에서는 손 놓고 방관할 수 밖에 없었던 허탈함, 그리고 봉건시대의 답습과 그에 따른 거대한 음모 앞에 스스로가 나약해지는 느낌까지, 말 그대로 만감이 교차하게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오오, 뭐란 말인가. 뭐라 말할 수 없이 무섭다. 이 미치광이 같은 재주. …오오, 대지가 흔들린다. 바다가 불탄다. 하늘이 번쩍인다….(305쪽)



    긴다이치 코스케<혼진 살인사건> 이후, 전쟁에 파병되어 해외를 떠도는 신세가 됩니다. 그때 만난 전우 치마타가 죽으면서 남긴 말을 따라 옥문도라는 섬에 오게되는데, 옥문도의 사람들은 지주와 소작농의 모습을 띈, 선주와 어부들이 모여사는 매우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긴다이치는 섬의 역사와 마을 사람들간의 관계를 알아가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죽은 전우가 마지막에 남겼던 묘한 말들이 그대로 현실이되면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가기에 이릅니다. 과연 긴다이치 코스케는 명탐정의 이름으로 이 연쇄살인 사건의 진상을 명쾌하게 풀이할 수 있을까요.



    코스케의 목소리에는 깊은 비통함이 서려 있었다. 마술의 속임수를 간파했다고 승리를 뽐내며 기뻐하는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331쪽)



    이 소설은 참 시적입니다. 소설 속의 소제목에서도 그런 시적인 표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투구 아래서 우는 귀뚜라미여, 밤에는 모든 고양이가 잿빛으로 보인다, 한집 옆방에 유녀도 잠든 모습 싸리 꽃과 달. 이런 표현들이 옥문도라는 섬을 음침하고 요사스럽게 만들고, 해무가 뿌옇게 끼여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해 사건을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끔 하는 역할을 합니다. 총을 들고 땅땅거리며 싸움을 하는 시대이면서 상당히 옛날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까지 불러일으키고 있으니, 봉건사회에서 현대사회로 넘어가려고 하는 과도기적 모습을 그려주는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또 사건 풀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니, <옥문도>는 시를 닮은 소설이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옥문도>의 시점은 전지적인 입장이지만 긴다이치의 머릿속과 시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제한적인 형태를 띕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이지만, 코스케는 어디에 있는지 콧배기도 보이지 않다가 마지막에 수수께끼 풀이만 하고 사라졌던, 여느 시리즈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그래서 반갑고 기쁘기까지 했습니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대망의 첫 등장을 그린 <혼진 살인사건>과 비교해서도 <옥문도>에서 보여준 긴다이치의 언행은, 기념비적인 첫 등장 작품보다 더 많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를 이해하고 알아가는데 <옥문도>만한 소설이 없겠다 싶습니다. 

 

 


    아, 그것이었다. 지금 긴다이치 코스케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도 그 문제였다. 저것은 범인의 단순한 허세일까. 소설가가 독자의 마음을 끌기 위해 억지로 악독한 장면을 생각해 낸 것처럼 이 사건의 범인도 그저,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만으로 무참한 정경을 피와 살로 그려냈던 것일까. (118쪽)



    작가와 독자의 두뇌싸움에 있어서 추리소설의 페어플레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간혹 반칙같은 반전을 선보이는 작가의 기교에 독자들은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옥문도>는 이런 페어플레이 법칙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변화구가 아닌 직구로 승부하고 있습니다. 칠테면 쳐봐라는 식으로 눈 앞에 단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런 승부를 펼치고 있는 대립은 작가와 독자의 관계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서 긴다이치 코스케와 한 인물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펼치는 두뇌싸움은 매우 볼만했으며, 진범 뒤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음모에는 순순히 무릎 꿇어야만 했습니다. 옛 일본의 문화와 언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 시적인 표현들까지 있었으니, 제가 건드릴 수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처음에 말했던 5음의 시구, '바라볼 밖에.'라는 말로 여운을 남긴 것입니다. 하지만 충분히 정직한 승부였다고 여겨집니다. 



    긴다이치 씨, 세상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생각지도 못할 만큼 무서운 일이 있다네. 그건 한 마디로 보통 사람의 상식 따윈 미치지 못할 만큼 무서운, 괴상한 일이야. 미치광이…… 정말 그야 말로 미치광이 같은 상황이야. 하지만… 지금은 말 못하네. 언젠가 다시 당신에게 밝힐 날도 있겠지만 지금은 말 못하네. 지금은 아무 것도 묻지 말아주길 바라네. 알겠나, 물어도 소용없는 일이네. …오오. (105쪽)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짜증나면 짜장면. 돈들고 손내놔.' 저는 이런 식의 언어유희를 좋아합니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은 이런 언어유희의 맛이 있습니다. 당연히 <옥문도>는 시가 중요한 키가 되었던 만큼 언어유희의 극한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뿐만아니라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언어로 장난치는 작가의 재미있는 표현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책을 볼 때, 작가와의 궁합이라는게 중요합니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은 저와 궁합이 매우 잘 맡는 것 같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수수께끼에 정답을 제시해보기는 커녕, 단서의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했던 멍청한 독자라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계속 읽고 싶습니다. 그저 멍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 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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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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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살면서 수사를 받아본 아니, 당해본 적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영화나 소설과 달리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일이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할 것입니다. 똥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수사를 당해본 사람의 기분을 비유하기엔 똥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몇년 전에 '변호 측 증인'이 되어 본 적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증인이라기 보단 참고인 겪이었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터지자마자 6시간 이후까지는 저도 용의선상에 있었던 사람 중에 한명이었습니다. 그러다 무슨 증거로 인한 확신인지 모르겠지만 날카로운 수사의 화살은 제가 아닌 옆사람을 향해 겨냥되어 있더군요. 처음에는 어떻게 하면 나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을까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자신이 잘 알 것인데, 그래도 범죄 현상을 손대서까지 나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다면 일말의 도움이 되는 무슨 짓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변호 측 증인]의 미미로이와 비슷한 심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정신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정신없이 집어 닦고는 도로 떨어뜨렸다. 범죄 현장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소설책에서 얻은 막연한 지식의 단편과 남편을 지키려는 의식이 그녀 내부에서 기묘하게 얽혀 있었다. (169쪽)



    고이즈미 기미코[변호 측 증인]은 1963년 소설인데 최근에 일본에서 복간되었고, 그것이 다시 국내에 소개되었습니다. 다른 장르 소설에 비해 미스터리 소설은 시대가 변하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소설의 질적인 면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트릭의 섬세함뿐만 아니라 파격적인 반전이 가능하게 하는 필요충분 조건까지, 오래된 추리소설을 볼 때면 낡았구나라는 느낌을 쉽게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복간이 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시대를 아우르는 무엇인가 있긴 있는 추리소설이라는 겁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군더더기없이 오로지 하나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만을 높은 몰입도를 유지하며 간결하고 담담하게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미미로이라는 스트리퍼가 한 명문가 부유한 외아들인 남편에게 시집을 갑니다. 길거리 아가씨가 부잣집 아들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조심스럽고 소극적인 생활을 해나가다 아버지에게 결혼을 인정받으려 마음먹던 그 순간,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변호사, 주치의, 누나, 매부, 사촌 등 한 집안에 이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던 날 밤,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지고, 이 사건은 수사를 통해 법정으로 옮겨져 범인은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목사는 우리에게 형식에 따라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표현으로 영원을 맹세케 했는데, 이 '죽음'이란 대체 누구의 죽음을 의미하는가? (18쪽)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에 반전이 있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지만 확실히 반전은 반전입니다. 책 속의 세상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니, 보트가 확 뒤집혀져 버린 것처럼 내가 아는 세상이 진짜가 아닌 것이 됩니다. 이야기를 다 읽은 뒤, 다시 처음부터 읽어보면 밑그림을 잘못 그렸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교묘하긴한데 이건 누구를 탓할 수 없고 자신이 책을 읽으면서 저지른 실수라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훌륭하긴 한데 크게 놀랄 정도는 아니고, '아하 그렇구나' 하는 정도입니다.




그림을 뒤집어 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마지막 장을 넘기며 깨달았다.

 


    트릭이 존재할 그런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악의를 갖고 준비된 살인이 아니라면 트릭이 있을리 없겠죠. 책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겠지만 서술트릭의 냄새가 나긴합니다. 말하는 주체가 책 안에서 구분지어 놓은 경계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말하는 사람이 2인 1역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 분명히 뭔가를 놓치고 있는 데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의문이 들긴합니다만, 전혀 관계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것 봐라 내가 뭐라고 했던가, 냄새가 난다 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명쾌함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듭니다.



    바야흐로 '누구라면 범행이 가능했나?'는 그녀에게 문제가 되지 못했다.

    '범인은 누구인가?'

    이 문제만이 존재했다. (210쪽)



    책 뒷부분에 미치오 슈스케가 혼자 간직하고 싶었던 이야기인데 이렇게 세상에 알려져 버렸으니 어쩔 수 없이 강력 추천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색깔이 미치오 슈스케의 소설과 굉장히 많이 닮아 보이는데 그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책 표지 속 여인처럼 가련한 한 여인이 처참한 상황의 곤경에 빠져서 어찌할 줄 모르고 떨려하는 마음까지 꾹꾹 참고 참아서 절제되어 있습니다. 담담하고 간결하고 침착함을 끝까지 유지하는 문체,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하나가 모든 것인 구성, 모두가 닮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좋습니다. [변호 측 증인]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읽힌다는 것은 정말로 다행인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럼 다시 처음에 했던 제 이야기를 할까요. 조사를 받으며 같은 이야기를 몇번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사란 원래 그런 것인가 봅니다. '아'다르고 '어'다르다는 말처럼 작은 토 하나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더군요. 아무튼 표적이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옮겨진 뒤로 저는 용의자의 신분에서 증인의 신분으로 바뀌었고, 그 때문에 질문의 강도가 약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서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얻으니, 그제서야 범인이 누구인지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그때는 살면서 몇번 밖에 경험하지 못한, 진짜 사건의 탐정 행세를 해보았습니다. 그렇다고 대놓고는 못하고 혼자 머릿 속에서 말이죠. 모두가 지목한 그 사람은 범인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진범이 누구라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심증 뿐만 아니라 저에게는 확실한 그것이…….



    누가 범인일 것 같냐고요? 글쎄요, 그걸 어떻게 제 입으로 말씀드리겠어요. 아뇨, 누군지는 모르지만, 설사 안다 해도 말이지요.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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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검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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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도시대, 일본 역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이 다이쇼군에 임명되어 막부를 개설한 1603년부터 15대 쇼군 요시노부가 정권을 조정에 반납한 1867년까지의 봉건시대를 말합니다. 일본 소설을 읽다보면 가끔 이 '에도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설 속 인물이 주로 '그때는 그랬었지'하는 회상으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식의 이야기를 할 때 자주 등장하곤 했었는데요, 그래서 이 에도시대가 과연 어떤 모습이길래 이렇게나 일본 작가들은 이 시대를 회상하고, 그리워하며, 때로는 아쉬워할까 무척 궁금했습니다.



    이 검은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혹은 잊어버린 나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이네. 그래서 함부로 세상에 나오면 안 되지. 나는 괜찮을 거라 생각하지 말게. 나쁜 마음은 누구든 가지고 있는 법이니. 그저 우리는 항상 그런 마음을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담아 두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살아갈 따름이지. 이 검은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킨다네……. (241쪽)



    미야베 미유키<말하는 검>은 이런 에도시대를 이야기하는 시대소설입니다. 이 책은 <길 잃은 비둘기>, <가마이타치>, <섣달의 손님>, <말하는 검> 이렇게 4개의 단편으로 엮인 단편집으로 1991년에 발표했다지만 실제로 초고는 1986년에 완성한 것이라고 하니 미야베 미유키의 데뷔작이라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초기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전개나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가 살짝 세련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대단한 미야베 미유키의 초기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그녀를 향한 팬심으로 이런 부족한 모습들을 모두 용서하며 볼 수 있었고, 그 부분을 감싸안으니 귀엽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단편 중에서 <길 잃은 비둘기>와 <말하는 검>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연작의 형태를 보입니다. 나이차가 꽤 나는 3남매, 로쿠조, 나오지, 오하쓰가 바로 그 등장인물들인데요, 두 이야기 모두에서 이들의 모습은 정말로 앙증맞게 그려져있습니다. 로쿠조와 나오지, 이 두 형제만 등장했었다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 텐데, 16살 소녀인 오하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자칫 밋밋하고 덤덤할 수 있었던 이야기가 오히려 주위 등장인물들과 시대의 모습들까지 모두가 앙증맞아 보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앙증맞음 속에서 에도시대 소시민들의 생활상과 사고방식같은 것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소곤거리며 곁눈질하고, 쉬쉬거리며 조심스러운 일본 문화의 단면들까지 말이죠.



    돌은 흠집이 생겨도 돌이지만, 옥은 조그만 흠만 생겨도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지요. (202쪽)



    아무래도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니 만큼 오하쓰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오하쓰는 우리가 흔히 아는 싸이코메트리 현상을 경험하는 영험한 아이입니다. 시대가 에도시대이니 만큼 미스터리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이 쉬우면서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싸이코메트리, 한마디로 말해서 신 기가 있는 아이를 가져다 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하쓰의 이런 특별한 능력이 미스터리해 보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미스터리한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했습니다. 오하쓰의 능력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시작'이 되었지만 필살기 하나만 익히면 모든 게임이 '끝'나듯이 싸이코메트리 하나로 사건의 전말과 범인까지 모든 것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까지는 좋았는데 결말이 조금 당연했다고나 할까요. 미스터리한 소설에서 너무나 강력한 주인공의 존재는, 일단 약부터 줬다가 병줄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형태라 그점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검은 일종의 마력을 가지고 있지. 검호라 칭송받는 이들은 그 마력을 길들여 제 것으로 만든 달인이다. 하지만 그만한 힘을 가지지 못한 자는 검의 힘에 정신을 빼앗기는 게야. 검과 사람의 주종 관계가 뒤바뀌는 셈이지. (75쪽)



 

    그렇다보니 이 야이기는 독자들이 추리할만한 여지를 남겨놓지않기 때문에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미스터리하기는 굉장히 미스터리했습니다. 4개의 단편 중에서 가장 괜찮았던 <말하는 검>의 간단한 줄거리를 이야기하자면 제목 그대로 검이 말을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때요, 굉장히 미스터리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시대에 검을 만드는 사람과 검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치 무법천지의 강호의 이야기와 같아서 의리와 배신과 같은 은근한 멋과 풍류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단칼에 지나가는 행인을 벨 수 있었던 그런 시대의 멋(?)말입니다.



    똑똑히 기억하거라. 내 목숨은 끊어져도 이 칼은 남는다. 하늘 아래 영원히 머물며 나를 알아주지 않았던 이 세상 모든 것에, 너 같은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속 피를 부르리라. 넌 앞으로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괴로워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야. (202쪽)



    미야베 미유키는, 에도시대가 사람의 목숨을 간단히 뺏을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대감이 매우 강했고, 그 사이에서 인간의 정이 있는 사회를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은 것도 함께 나누고 서로 도와가며 살았던 이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쓰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말하는 검>을 통해서 그녀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충분히 느끼고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일본의 에도 시대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긴한데, 재미있는 이야기로 그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길 원한다면, 이 소설이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미야베 미유키의 팬이라면 그녀의 초기작이며 그녀의 에도시대물의 출발점인 <말하는 검>을 필수도서로 여기며 군말없이 읽어보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하나로 통일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섬세한 세공품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설켰단다. 그리고 평소에는 누구나 그 겉면만 쓰고 있지. 내 말뜻을 알겠느냐?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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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집의 살인 집의 살인 시리즈 1
우타노 쇼고 지음, 박재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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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닙니다. 하지만 코가 좋다라는 표현을 써야 할까요. 냄새를 잘 맡고 눈치가 빨라서 조그만 차이에도 큰 의미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보니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듯 그것이 결국 정답인 경우가 제법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타노 쇼고<긴 집의 살인>은 단 한 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았는데 트릭의 비밀을 풀어냈습니다. 아아, 추리소설을 많이 읽다보니 눈치가 빨라진 것일까요. 아니면 우타노 쇼고의 책을 많이 읽다보니 이 분의 스타일을 간파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원래부터 제가 천재형 독자였던 것일까요.


 

    그렇게 풀 죽을 필요는 없어. 그래도 보통 사람 이상의 능력은 있으니까 나머지는 훈련하기 나름이야. 인간에게는 노력형과 천재형이 있어. 너는 전형적인 노력형이지. 훈련하면 할수록 능력은 꽃을 피울 거야. 나는 반대로 천재형이야. 이것은 천재 '형'일 뿐이지 소위 말하는 천재라는 의미는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말아줘. 그저 살아갈 뿐인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과가 나온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천재형이야. (270쪽)


 

    트릭의 해법을 이미 알고 있는 추리소설은 국물을 다 흡수하고 오통통해져버린 퍼진 라면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기 전부터 사실 걱정이 되었습니다. 설마 그 트릭을 정말로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우타노 쇼고의 소설-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님- 이니 절대로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라는 기대반 우려반으로 한 젓가락 집어 들었는데 그만, 면이 끊어질 정도로 퉁퉁 불어있는 라면이었던 것입니다. 제목만 보고도 예상할 수 있는 트릭이라니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 트릭에 대해서 이야기하진 않겠습니다. 궁금하시면 직접 한번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이 트릭의 처참함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향해 말을 건넨다. 이 추리를 다른 사람, 혹은 경찰에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못한다. 말해서는 안된다. (138쪽)



    ○○의 죽음으로 흔들리던 비행기 기체를 마지막 공연을 통해 어떻게든 무사히 착륙시키려고 애썼는데, 활주로에 발을 내디딘 시점에서 폭파되고 말았다. 최악이다. 이 해피엔드를 박살낸 것은 누구인가? (188쪽)



    최악이었습니다. 그리고 실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 <긴 집의 살인>은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닌 소설이기도 합니다. 바로 우타노 쇼고의 첫 소설이라는 점에서 그런데요, 특히 그는 시미다 소지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서 데뷔하게 되었고, 그때 발표한 작품이 바로 이 <긴 집의 살인>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마다 소지가 이 소설에서 그의 어떤 점을 발견했기에 등단을 추천하게 되었을까에 대해 생각하며 소설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일단 짧은 부분이었지만 변화무쌍한 서술 형태의 변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타노 쇼고가 서술 트릭의 귀재라고 불리게된 시작점을 보았다고 할까요. 시점에 따라서 세대차이, 성별의 구분, 성격차이까지 확실하게 결정지어 놓는 식의 서술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장난치는 글을 무척 좋아해서 과대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아마도 시마다 소지는 이런 부분을 재미있게 여긴 것 같습니다. <시체를 사는 남자>에서도 책 속의 책의 경계를 넘나들며 서술의 재미를 보여줬었고, <밀실살인게임>에서도 미묘한 차이로 다른 그림을 예상할 수 있게 하거든요.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이제 말하면 입이 아플 지경이구요.



    또한 시마다 소지는 자신의 소설과 닮아 보인다고 여길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와 비교하기엔 <긴 집의 살인>이 못 미치긴 한참을 못 미치지만, 그 소설에서 살짝만 언급하는 식으로 흘려넘기던 사회문제에 대한 생각들을 이 소설에서도 부분적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덜 다듬어져서 둔탁하고 생뚱맞은 모습으로 긴 묘사와 설명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말이죠. 아마도 조금만 더 다듬으면 옥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에는 신본격파 미스터리 작가로 사회문제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소설을 쓰고 있지만요. 그런데 시마다 소지가 발견했을 것이라고 여긴 제 생각들이 이 소설 속에서 굉장히 미묘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많은 분들이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988년에 발표한 소설이니 만큼 오래되고 낡은 느낌이 듭니다. 우타노 쇼고의 '집 시리즈'라고 해서 <긴 집의 살인>외에 몇 작품이 더 있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이름도 비슷한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가 생각나는군요. 겨우 그 정도의 이유로 사람을 죽였는가 하는 비약적인 살인 동기까지 닮아 보이는데요, 이 때 나왔던 신본격 추리소설들에게서 그런 느낌이 많이 나는 것 같습니다. 서술 트릭의 대표주자로 잘 알려진 우타노 쇼고인데, 그 모습과는 다른 집 시리즈의 이름을 딴 트릭을 사용한 새로운 모습의 우타노 쇼고를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단편인 <관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도 비슷한 밀실 트릭을 사용했던 것 같군요. 불현듯 이 작가님의 머리속에 아직 책으로 만들어지지 못한 무한한 밀실 트릭들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잔트릭들을 소모시키고 있는 책이 아마도 <밀실살인게임>이겠지요.



    헤어스타일은 빡빡, 매직으로 그린 듯한 굵은 눈썹, 쌍커풀에 동그란 눈, 오똑한 코, 두툼한 입술, 매우 또렷한 이목구비다. 코밑에 난 숱 많은 수염과 갈색 피부까지 왠지 모르게 라틴계의 피가 섞인 듯하다.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호남형 부류에 들어간다. (215쪽)



    <긴 집의 살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할 것인데 계속해서 그의 다른 소설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군요. 이 소설에서 '집 시리즈'를 이어갈 명탐정 인물이 한 명 등장합니다. 모든 시리즈에 등장하는 명탐정마다 저는 첫 등장을 무척 유심히 지켜보는 편인데요, 이 등장이 어딘가 모르게 어디서 본 장면같은 식상함이 느껴져서 아마추어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때는 아마추어가 맞긴 맞았죠. 데뷔작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2008년에 이 소설의 개정판을 발표하자는 제의가 들어왔을 때 우타노 쇼고 자신도 옛 원고를 보고 아마 손발의 오글거림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서문에서 전면적으로 모든 것을 다 수정해서 뜯어 고치고 싶었다고 그때의 심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원 모습을 그대로 둔채 발표하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풋풋한 데뷔작이라는 신성한 의미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추어 냄새가 났던 이 소설을 높게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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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사막
김영희 지음 / 알마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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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힘이 들었을 때, 무작정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선 적이 있습니다. 가출 아니, 여행이라고 하는게 좋겠군요. 동해안을 따라서 계속 올라갔습니다. 해안가를 따라서 바닷바람을 맞아가며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갔습니다. 집을 나설 때야 어떻게든 되어서 휴전선까지 금방 닿지 않을까 싶었는데, 막상 달리다 보니 다리도 뭉치고 엉덩이도 아파왔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달렸습니다. 해안가를 따라 달리다보니 눈동자에 비치는 광경들은 정말로 멋졌습니다. 하지만 오르막 길을 만나면 힘에 겨워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고, 그런 풍경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내리막 길을 만나서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러다 문득, 내려막 길을 내달리고 있는 이 때가 걱정되었습니다. 바닷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이 내리막 길은 끝이 있을 것이고, 내려간 만큼 또 올라가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르막 길을 만나면 또 기뻤습니다. 여기까지만 오르면 그만큼 신나게 내달릴 수 있고 멋진 풍경도 바라보며 바닷바람을 들이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오르막길이 좋고, 내리막 길이 싫었습니다. 어짜피 사는 건 더하고 빼고해서 해수면으로, 결국 0으로 수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작정 떠난 여행을 통해 한가지를 배우고 왔습니다.




    김영희 피디도 여행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여행을 통해 느꼈던 감정들, 보았던 풍경들을 고스라니 담아온 책이 이 책, <소금사막>입니다. 60일간 29번의 비행이 말해 주듯이, 남미의 많은 곳을 다녔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다간 지금 이 곳이 아닌, 과거의 다른 곳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날까봐 그랬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가수>는 기획만으로도 큰 사회적 이슈를 낳았던 프로그램입니다. 주말 저녁을 책임지겠다고 다시 현역 피디로 복귀한 김영희 피디는 이번에도 모두를 위한 감성 TV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방송이 나가자마자 논란거리가 된 김건모 재도전 사건이 있었고, 김영희 피디는 결국에 피디직에서 자진 하차하였습니다. 저도 이때 시청자를 우롱하는 처사가 아닌가, 규칙은 규칙이다, 나가수의 제작 의도에 위배되는 행동이다며 맹비난을 했습니다. 정말로 좋은 프로그램이 탄생했구나 싶었는데, 스스로 프로그램의 격을 떨어트리는 모습이라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인생에 '다시'라는 말은 없다. 갈라파고스에서도 꿈같은 이 시간도 '다시'는 없다. 지금은 이 순간 뿐이므로.

    다시 한번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지금도 이제는 지금이 아니다.

    세월의 흔적만 남기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115쪽)

   그 뒤에 김영희 피디는 홀연히 여행을 떠났습니다. 책에서도 이때의 상황과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굳이 그런 이야기를 글로 하지 않아도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여행을 다니며 그의 눈에 들어온 풍경과 사람을 보면서 그의 사고가 흘러가는 과정을 보니 그런 결정을 내린 게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참으로 정이 많고, 사람다운 사람이구나를 느낍니다.

    변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것,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105쪽)

    가장 힘들 때 떠난 여행에서 그는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 변하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변해야만 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조그만 디지털카메라를 통해 그것들을 담아왔고, 펜으로 스케치북에 그려왔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고, 바로 옆에 있는 그 사람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멈춰있는 갈라파고스 섬에서 살아남은 생명체와 바람을 등지고 세월에 남겨진 이스터 섬의 모아이를 보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땅 끝 지구 반대편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집들을 바라고, 브라질 포스두이과수 폭포를 보면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스스로의 결정에 대해 후회하고, 또 그런 후회가 빈번히 생기는 사람-김영희 피디 자신, 그리고 이 글을 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답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과거를 이겨내기 위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고,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에요?" 라는 질문에 선뜻 그때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 같이 한 사람 때문이었다면, 지금도 그 사람과 같이 할 수 있다면,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지금입니다. (237쪽) 

    지금 하세요! Now or Never!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영원히 못할지도 모릅니다.

    인생, 지금이 전부입니다. (266쪽)

    사진, 사진, 그림, 사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혀 있는 위의 글을 읽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살기 힘들다, 죽고 싶다 할지라도 그런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구나를 느낍니다. 지금 겪고 있는 수많은 위기와 갈등, 걱정들, 이것이 곧 인생을 정의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곳을 바라보고 조금만 다른 것을 생각해보면 순간의 위기는 아무것도 아닌, 사막에서 분자크기 하나의 소금모래 알갱이와 같습니다. '지금'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습니다. 

    지금,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를 듣고 있습니다. <나가수> 무대를 처음으로 열었던 노래로 김영희 피디는 이 노래를 불렀던 이소라의 첫 무대를 보자마자 프로그램의 성공을 확신했다고 합니다. 가수는 노래를 따라간다고 하는데, 김영희 피디는 나가수 무대의 이 노래를 따라간 것 같습니다. 노랫말 가사를 들어보니 꼭 그런 것 같습니다. 한참동안 이 노래를 듣고 있으니 너무 감상적이 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올해 가을은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또 바람이 붑니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습니다. 여행을. 바로, 지금.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내게는 천금 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머리위로 바람이 분다

눈물이 흐른다

이소라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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