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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평점 :
사람이 살면서 수사를 받아본 아니, 당해본 적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영화나 소설과 달리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일이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할 것입니다. 똥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수사를 당해본 사람의 기분을 비유하기엔 똥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몇년 전에 '변호 측 증인'이 되어 본 적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증인이라기 보단 참고인 겪이었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터지자마자 6시간 이후까지는 저도 용의선상에 있었던 사람 중에 한명이었습니다. 그러다 무슨 증거로 인한 확신인지 모르겠지만 날카로운 수사의 화살은 제가 아닌 옆사람을 향해 겨냥되어 있더군요. 처음에는 어떻게 하면 나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을까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자신이 잘 알 것인데, 그래도 범죄 현상을 손대서까지 나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다면 일말의 도움이 되는 무슨 짓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변호 측 증인]의 미미로이와 비슷한 심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정신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정신없이 집어 닦고는 도로 떨어뜨렸다. 범죄 현장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소설책에서 얻은 막연한 지식의 단편과 남편을 지키려는 의식이 그녀 내부에서 기묘하게 얽혀 있었다. (169쪽)
고이즈미 기미코의 [변호 측 증인]은 1963년 소설인데 최근에 일본에서 복간되었고, 그것이 다시 국내에 소개되었습니다. 다른 장르 소설에 비해 미스터리 소설은 시대가 변하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소설의 질적인 면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트릭의 섬세함뿐만 아니라 파격적인 반전이 가능하게 하는 필요충분 조건까지, 오래된 추리소설을 볼 때면 낡았구나라는 느낌을 쉽게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복간이 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시대를 아우르는 무엇인가 있긴 있는 추리소설이라는 겁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군더더기없이 오로지 하나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만을 높은 몰입도를 유지하며 간결하고 담담하게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미미로이라는 스트리퍼가 한 명문가 부유한 외아들인 남편에게 시집을 갑니다. 길거리 아가씨가 부잣집 아들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조심스럽고 소극적인 생활을 해나가다 아버지에게 결혼을 인정받으려 마음먹던 그 순간,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변호사, 주치의, 누나, 매부, 사촌 등 한 집안에 이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던 날 밤,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지고, 이 사건은 수사를 통해 법정으로 옮겨져 범인은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목사는 우리에게 형식에 따라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표현으로 영원을 맹세케 했는데, 이 '죽음'이란 대체 누구의 죽음을 의미하는가? (18쪽)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에 반전이 있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지만 확실히 반전은 반전입니다. 책 속의 세상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니, 보트가 확 뒤집혀져 버린 것처럼 내가 아는 세상이 진짜가 아닌 것이 됩니다. 이야기를 다 읽은 뒤, 다시 처음부터 읽어보면 밑그림을 잘못 그렸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교묘하긴한데 이건 누구를 탓할 수 없고 자신이 책을 읽으면서 저지른 실수라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훌륭하긴 한데 크게 놀랄 정도는 아니고, '아하 그렇구나' 하는 정도입니다.
그림을 뒤집어 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마지막 장을 넘기며 깨달았다.
트릭이 존재할 그런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악의를 갖고 준비된 살인이 아니라면 트릭이 있을리 없겠죠. 책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겠지만 서술트릭의 냄새가 나긴합니다. 말하는 주체가 책 안에서 구분지어 놓은 경계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말하는 사람이 2인 1역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 분명히 뭔가를 놓치고 있는 데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의문이 들긴합니다만, 전혀 관계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것 봐라 내가 뭐라고 했던가, 냄새가 난다 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명쾌함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듭니다.
바야흐로 '누구라면 범행이 가능했나?'는 그녀에게 문제가 되지 못했다.
'범인은 누구인가?'
이 문제만이 존재했다. (210쪽)
책 뒷부분에 미치오 슈스케가 혼자 간직하고 싶었던 이야기인데 이렇게 세상에 알려져 버렸으니 어쩔 수 없이 강력 추천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색깔이 미치오 슈스케의 소설과 굉장히 많이 닮아 보이는데 그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책 표지 속 여인처럼 가련한 한 여인이 처참한 상황의 곤경에 빠져서 어찌할 줄 모르고 떨려하는 마음까지 꾹꾹 참고 참아서 절제되어 있습니다. 담담하고 간결하고 침착함을 끝까지 유지하는 문체,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하나가 모든 것인 구성, 모두가 닮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좋습니다. [변호 측 증인]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읽힌다는 것은 정말로 다행인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럼 다시 처음에 했던 제 이야기를 할까요. 조사를 받으며 같은 이야기를 몇번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사란 원래 그런 것인가 봅니다. '아'다르고 '어'다르다는 말처럼 작은 토 하나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더군요. 아무튼 표적이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옮겨진 뒤로 저는 용의자의 신분에서 증인의 신분으로 바뀌었고, 그 때문에 질문의 강도가 약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서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얻으니, 그제서야 범인이 누구인지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그때는 살면서 몇번 밖에 경험하지 못한, 진짜 사건의 탐정 행세를 해보았습니다. 그렇다고 대놓고는 못하고 혼자 머릿 속에서 말이죠. 모두가 지목한 그 사람은 범인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진범이 누구라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심증 뿐만 아니라 저에게는 확실한 그것이…….
누가 범인일 것 같냐고요? 글쎄요, 그걸 어떻게 제 입으로 말씀드리겠어요. 아뇨, 누군지는 모르지만, 설사 안다 해도 말이지요. (207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