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사막
김영희 지음 / 알마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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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힘이 들었을 때, 무작정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선 적이 있습니다. 가출 아니, 여행이라고 하는게 좋겠군요. 동해안을 따라서 계속 올라갔습니다. 해안가를 따라서 바닷바람을 맞아가며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갔습니다. 집을 나설 때야 어떻게든 되어서 휴전선까지 금방 닿지 않을까 싶었는데, 막상 달리다 보니 다리도 뭉치고 엉덩이도 아파왔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달렸습니다. 해안가를 따라 달리다보니 눈동자에 비치는 광경들은 정말로 멋졌습니다. 하지만 오르막 길을 만나면 힘에 겨워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고, 그런 풍경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내리막 길을 만나서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러다 문득, 내려막 길을 내달리고 있는 이 때가 걱정되었습니다. 바닷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이 내리막 길은 끝이 있을 것이고, 내려간 만큼 또 올라가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르막 길을 만나면 또 기뻤습니다. 여기까지만 오르면 그만큼 신나게 내달릴 수 있고 멋진 풍경도 바라보며 바닷바람을 들이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오르막길이 좋고, 내리막 길이 싫었습니다. 어짜피 사는 건 더하고 빼고해서 해수면으로, 결국 0으로 수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작정 떠난 여행을 통해 한가지를 배우고 왔습니다.




    김영희 피디도 여행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여행을 통해 느꼈던 감정들, 보았던 풍경들을 고스라니 담아온 책이 이 책, <소금사막>입니다. 60일간 29번의 비행이 말해 주듯이, 남미의 많은 곳을 다녔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다간 지금 이 곳이 아닌, 과거의 다른 곳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날까봐 그랬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가수>는 기획만으로도 큰 사회적 이슈를 낳았던 프로그램입니다. 주말 저녁을 책임지겠다고 다시 현역 피디로 복귀한 김영희 피디는 이번에도 모두를 위한 감성 TV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방송이 나가자마자 논란거리가 된 김건모 재도전 사건이 있었고, 김영희 피디는 결국에 피디직에서 자진 하차하였습니다. 저도 이때 시청자를 우롱하는 처사가 아닌가, 규칙은 규칙이다, 나가수의 제작 의도에 위배되는 행동이다며 맹비난을 했습니다. 정말로 좋은 프로그램이 탄생했구나 싶었는데, 스스로 프로그램의 격을 떨어트리는 모습이라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인생에 '다시'라는 말은 없다. 갈라파고스에서도 꿈같은 이 시간도 '다시'는 없다. 지금은 이 순간 뿐이므로.

    다시 한번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지금도 이제는 지금이 아니다.

    세월의 흔적만 남기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115쪽)

   그 뒤에 김영희 피디는 홀연히 여행을 떠났습니다. 책에서도 이때의 상황과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굳이 그런 이야기를 글로 하지 않아도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여행을 다니며 그의 눈에 들어온 풍경과 사람을 보면서 그의 사고가 흘러가는 과정을 보니 그런 결정을 내린 게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참으로 정이 많고, 사람다운 사람이구나를 느낍니다.

    변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것,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105쪽)

    가장 힘들 때 떠난 여행에서 그는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 변하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변해야만 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조그만 디지털카메라를 통해 그것들을 담아왔고, 펜으로 스케치북에 그려왔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고, 바로 옆에 있는 그 사람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멈춰있는 갈라파고스 섬에서 살아남은 생명체와 바람을 등지고 세월에 남겨진 이스터 섬의 모아이를 보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땅 끝 지구 반대편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집들을 바라고, 브라질 포스두이과수 폭포를 보면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스스로의 결정에 대해 후회하고, 또 그런 후회가 빈번히 생기는 사람-김영희 피디 자신, 그리고 이 글을 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답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과거를 이겨내기 위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고,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에요?" 라는 질문에 선뜻 그때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 같이 한 사람 때문이었다면, 지금도 그 사람과 같이 할 수 있다면,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지금입니다. (237쪽) 

    지금 하세요! Now or Never!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영원히 못할지도 모릅니다.

    인생, 지금이 전부입니다. (266쪽)

    사진, 사진, 그림, 사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혀 있는 위의 글을 읽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살기 힘들다, 죽고 싶다 할지라도 그런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구나를 느낍니다. 지금 겪고 있는 수많은 위기와 갈등, 걱정들, 이것이 곧 인생을 정의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곳을 바라보고 조금만 다른 것을 생각해보면 순간의 위기는 아무것도 아닌, 사막에서 분자크기 하나의 소금모래 알갱이와 같습니다. '지금'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습니다. 

    지금,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를 듣고 있습니다. <나가수> 무대를 처음으로 열었던 노래로 김영희 피디는 이 노래를 불렀던 이소라의 첫 무대를 보자마자 프로그램의 성공을 확신했다고 합니다. 가수는 노래를 따라간다고 하는데, 김영희 피디는 나가수 무대의 이 노래를 따라간 것 같습니다. 노랫말 가사를 들어보니 꼭 그런 것 같습니다. 한참동안 이 노래를 듣고 있으니 너무 감상적이 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올해 가을은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또 바람이 붑니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습니다. 여행을. 바로, 지금.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내게는 천금 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머리위로 바람이 분다

눈물이 흐른다

이소라 <바람이 분다>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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