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집의 살인 집의 살인 시리즈 1
우타노 쇼고 지음, 박재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닙니다. 하지만 코가 좋다라는 표현을 써야 할까요. 냄새를 잘 맡고 눈치가 빨라서 조그만 차이에도 큰 의미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보니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듯 그것이 결국 정답인 경우가 제법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타노 쇼고<긴 집의 살인>은 단 한 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았는데 트릭의 비밀을 풀어냈습니다. 아아, 추리소설을 많이 읽다보니 눈치가 빨라진 것일까요. 아니면 우타노 쇼고의 책을 많이 읽다보니 이 분의 스타일을 간파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원래부터 제가 천재형 독자였던 것일까요.


 

    그렇게 풀 죽을 필요는 없어. 그래도 보통 사람 이상의 능력은 있으니까 나머지는 훈련하기 나름이야. 인간에게는 노력형과 천재형이 있어. 너는 전형적인 노력형이지. 훈련하면 할수록 능력은 꽃을 피울 거야. 나는 반대로 천재형이야. 이것은 천재 '형'일 뿐이지 소위 말하는 천재라는 의미는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말아줘. 그저 살아갈 뿐인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과가 나온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천재형이야. (270쪽)


 

    트릭의 해법을 이미 알고 있는 추리소설은 국물을 다 흡수하고 오통통해져버린 퍼진 라면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기 전부터 사실 걱정이 되었습니다. 설마 그 트릭을 정말로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우타노 쇼고의 소설-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님- 이니 절대로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라는 기대반 우려반으로 한 젓가락 집어 들었는데 그만, 면이 끊어질 정도로 퉁퉁 불어있는 라면이었던 것입니다. 제목만 보고도 예상할 수 있는 트릭이라니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 트릭에 대해서 이야기하진 않겠습니다. 궁금하시면 직접 한번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이 트릭의 처참함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향해 말을 건넨다. 이 추리를 다른 사람, 혹은 경찰에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못한다. 말해서는 안된다. (138쪽)



    ○○의 죽음으로 흔들리던 비행기 기체를 마지막 공연을 통해 어떻게든 무사히 착륙시키려고 애썼는데, 활주로에 발을 내디딘 시점에서 폭파되고 말았다. 최악이다. 이 해피엔드를 박살낸 것은 누구인가? (188쪽)



    최악이었습니다. 그리고 실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 <긴 집의 살인>은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닌 소설이기도 합니다. 바로 우타노 쇼고의 첫 소설이라는 점에서 그런데요, 특히 그는 시미다 소지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서 데뷔하게 되었고, 그때 발표한 작품이 바로 이 <긴 집의 살인>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마다 소지가 이 소설에서 그의 어떤 점을 발견했기에 등단을 추천하게 되었을까에 대해 생각하며 소설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일단 짧은 부분이었지만 변화무쌍한 서술 형태의 변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타노 쇼고가 서술 트릭의 귀재라고 불리게된 시작점을 보았다고 할까요. 시점에 따라서 세대차이, 성별의 구분, 성격차이까지 확실하게 결정지어 놓는 식의 서술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장난치는 글을 무척 좋아해서 과대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아마도 시마다 소지는 이런 부분을 재미있게 여긴 것 같습니다. <시체를 사는 남자>에서도 책 속의 책의 경계를 넘나들며 서술의 재미를 보여줬었고, <밀실살인게임>에서도 미묘한 차이로 다른 그림을 예상할 수 있게 하거든요.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이제 말하면 입이 아플 지경이구요.



    또한 시마다 소지는 자신의 소설과 닮아 보인다고 여길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와 비교하기엔 <긴 집의 살인>이 못 미치긴 한참을 못 미치지만, 그 소설에서 살짝만 언급하는 식으로 흘려넘기던 사회문제에 대한 생각들을 이 소설에서도 부분적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덜 다듬어져서 둔탁하고 생뚱맞은 모습으로 긴 묘사와 설명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말이죠. 아마도 조금만 더 다듬으면 옥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에는 신본격파 미스터리 작가로 사회문제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소설을 쓰고 있지만요. 그런데 시마다 소지가 발견했을 것이라고 여긴 제 생각들이 이 소설 속에서 굉장히 미묘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많은 분들이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988년에 발표한 소설이니 만큼 오래되고 낡은 느낌이 듭니다. 우타노 쇼고의 '집 시리즈'라고 해서 <긴 집의 살인>외에 몇 작품이 더 있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이름도 비슷한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가 생각나는군요. 겨우 그 정도의 이유로 사람을 죽였는가 하는 비약적인 살인 동기까지 닮아 보이는데요, 이 때 나왔던 신본격 추리소설들에게서 그런 느낌이 많이 나는 것 같습니다. 서술 트릭의 대표주자로 잘 알려진 우타노 쇼고인데, 그 모습과는 다른 집 시리즈의 이름을 딴 트릭을 사용한 새로운 모습의 우타노 쇼고를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단편인 <관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도 비슷한 밀실 트릭을 사용했던 것 같군요. 불현듯 이 작가님의 머리속에 아직 책으로 만들어지지 못한 무한한 밀실 트릭들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잔트릭들을 소모시키고 있는 책이 아마도 <밀실살인게임>이겠지요.



    헤어스타일은 빡빡, 매직으로 그린 듯한 굵은 눈썹, 쌍커풀에 동그란 눈, 오똑한 코, 두툼한 입술, 매우 또렷한 이목구비다. 코밑에 난 숱 많은 수염과 갈색 피부까지 왠지 모르게 라틴계의 피가 섞인 듯하다.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호남형 부류에 들어간다. (215쪽)



    <긴 집의 살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할 것인데 계속해서 그의 다른 소설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군요. 이 소설에서 '집 시리즈'를 이어갈 명탐정 인물이 한 명 등장합니다. 모든 시리즈에 등장하는 명탐정마다 저는 첫 등장을 무척 유심히 지켜보는 편인데요, 이 등장이 어딘가 모르게 어디서 본 장면같은 식상함이 느껴져서 아마추어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때는 아마추어가 맞긴 맞았죠. 데뷔작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2008년에 이 소설의 개정판을 발표하자는 제의가 들어왔을 때 우타노 쇼고 자신도 옛 원고를 보고 아마 손발의 오글거림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서문에서 전면적으로 모든 것을 다 수정해서 뜯어 고치고 싶었다고 그때의 심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원 모습을 그대로 둔채 발표하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풋풋한 데뷔작이라는 신성한 의미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추어 냄새가 났던 이 소설을 높게 평가합니다.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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