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예의 - 창비소설집
공지영 지음 / 창비 / 199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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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십여년이 지나버린 80년대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자유, 민주, 민족, 통일, 해방, 혁명 등의 말을 침튀겨가며 목에 핏대 세우고 말하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꼴불견이 되어버리는 이 시대에, 십여년 전 '그 시대'의 의미를 돌아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과거 시대의 의미를 스스로 심각하게 물어보기 시작한 것은 작년 이맘때로 기억한다. 80년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혹은 주관적으로라도 그 시대를 평가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기획하려는 21세기의 꿈은 지극히 협소할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저 그렇게 가만히 살아도 80년대의 조각들은 우리 삶의 언저리에 머물면서 가끔 우리 머리를 아프게 하고, 배신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하며, 반대로 진정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언지 보여주기도 한다.

역사 진보에 대한 신념, 광주학살에 대한 죄책감, 시대 아픔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 결과로 학교와 따뜻한 가정이 아닌 체루탄 자욱한 거리에서 삶의 한 부분을 보내야했던 80년대 세대.

그 시대가 저물자 잔치를 끝내고, 어떤 이는 잔치가 안겨준 아픔을 절묘하게 상품화하여 금배지를 달았고, 어떤 이는 벤처기업에서 대박을 터뜨렸고, 어떤 이는 이야기꾼이 되어, 투쟁의 경력도 자본축적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역겹게 보여주었다. 이런 모습들은 각종 매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오기에 80년대의 아픔은 오늘날의 영광이다라는 등식을 우리에게 심어주기도 한다.

투쟁이 자본증식의 도구로 전락되었을 때,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보편적 사회구성원으로써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는 벌써 뜨거운 불길에 죽었고, 어떤 이는 경찰 곤봉에 죽었고, 어떤 이는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다행이 목숨이라도 부지한 어떤 이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어떤 이는 삶의 진실에 충실하고자 하직도 '그 현장'에 몸담고 있으며, 어떤 이는 삶의 중심으로 다가오지 못한 채, 아직도 외곽에서 쓰린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이렇듯 80년대는 금배지와 벤처기업 사장만을 키워낸 것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생채기를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함께 키워냈다.

공지영 『인간에 대한 예의』는 이렇듯 80년대가 키워낸 사람들과 보편적 사회인으로 진입하지 못한 여성,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 들어간 소시민들의 이야기다.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 인간에 대한 예의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하는 이야기.

사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내내 편치 못했다. 그동안 내 주변에서, 나에게 신뢰를 보냈고, 내 말을 경청해 주었던, 그래서 나와 함께 울산에서 서울에서 파업현장에 섰던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무언지 고민했기에 그랬다. 아니 그들에 대한 예의 보다는 내 삶에 대한 예의를 더 깊게 생각했다.

내 삶에, 그리고 내게 영향을 주었던 그들을 향한 예의는 무엇일까.
진정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내게도, 그들에게도 예의있는 것일까.

내 삶을 떠올리며,
그들의 삶을 떠올리며,
우리의 희망을 떠올리며,
책의 문구를 나름대로 옮겨본다.

'동구권이 무너졌고, 급기야는 소비에트 연방도 무너졌고, 레닌의 동상도 허물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둘 전선에서 일상으로 떠나갔다. 그 사람들은 지금 계급 대신 주식투자를 이야기하고, 아파트 시세를 이야기 한다. 이유없이 붙들려간 동지를 위해서, 최저 임금도 못받는 노동자를 위해서, 죽어간 광주사람들을 위해서, 그 학살자가 대통령인 것이 싫어서 싸웠을 뿐인데, 그것이 허물어진 레닌 동상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쩌면 무너진 것은 레닌 동상이 아니라 우리의 예의와 희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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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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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에 대한 예의』를 통해 처음 만난 공지영에게 호감을 가졌고, 좀더 그녀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고등어』를 읽었다.

'배가 고프면서 제 이웃에게 빵을 나누어주는 아름다움, 하나밖에 없는 제 생명이 우주 속으로 사라져갈 것을 알면서 도청에 뛰어들었던 시민군의 아름다움, 고문을 받으면서 동료의 이름을 불지 않은 아름다움에 대해서 쓰고 싶다. .... 나는 내 소설의 주인공들을 그러한 역사적 사회적 의미의 복판에 가져다 놓은 일을 계속할 것이다.'

이 말은 공지영이 『인간에 대한 예의』 작가 후기에 썼던 글이다. 아직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적어도 『고등어』는 그 고민의 연장에서 쓰여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저마다 시대의 생채기를 간진한 채 살아가는 김명우, 노은림, 연숙, 여경.
학살자가 대통령으로 통치하고 있고, 학살당한 사람들은 웅크리고 있는 80년대는 숨쉬기 어려운 억압과 금방이라도 혁명이 일어날 것만 같은 열정이 교차하던 시대였다. 그 시대는 당연히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삶'을 버리고 '저 높은 곳의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저 높은 곳의 삶'이 결국 '자기의 삶'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땐 사랑하는 명우와 은림은 서로가 아닌, 다른 남자와 여자의 남편과 아내가 되었고 그것은 되돌릴 수 없었다. 자기 의지가 아닌 시대 의지에 의해서 살았던 이들에겐 그만큼의 간극과 상처가 존재했고, 그것은 치유하기 불가능해 보인다.

'저 높은 곳의 삶'을 살게 만들었던 그 시대가 저문 어느날 명우, 은림, 연숙, 여경은 한자리에 모인다. 언뜻 보기엔 조금 코믹한 장면이긴 하지만 그것이 결코 코믹적이지 않았던 것은 그 모습이 바로 지금 시대를(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은림을 버릴만큼 조직에 충실한 투사였다가 지금은 부르주아 전기를 만드는 대필작가가 된 명우, 파업현장을 지키기 위해 아이를 사산하고 만신창이가 된 은림, 공장에서 명우와 결혼해 결국 그 좁혀질 수 없는 간극에 이혼한 '공순이 출신' 연숙. 그리고 그들의 얽힌 삶과 가슴아픈 과거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신세대 여인 여경.

이들이 얽히고 섥혀 살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이다.

그렇다고 『고등어』가 허무주의를 그려내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는 그처럼 치유할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으며, 아직도 나름의 상처를 떼어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연민과 애정으로써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고등어』를 읽은지 많은 날들이 지났고, '저 높은 곳의 삶'을 생각하고 있다. 삶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그래서 자신의 몸에 눅진하게 배겨있는 사상과 가치관, 삶의 목표가 아닌 것은 정녕 '허망한 꿈'으로 밖에 머물 수 없는 것인가.

지난 80년대의 많은 사람들은 학교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버리고 '저 높은 곳의 삶'을 위해서 공장으로, 현장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 시대가 막을 내리자 '저 높은 곳의 삶'을 지향했던 이들은 이미 한참이나 늦은 다음에야 '자신의 삶과 길'로 되돌아 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에게 변절자, 심약한 사람들이라 했고, 어떤 사람들은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했다. 이렇듯 우리는 80년대 '그들'을 평가하는데 참 편안한 위치에 있으며, 그만큼 쉽게 말을 하곤한다.

그러나 심약해서 마음이 변했고, 그래서 변절자라는 소리까지 듣는 80년대 '그들'에게 우리는 참으로 냉정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적어도 그들처럼 살아보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용의도 없는 우리가 아닌가. 적어도 우리는 '저 높은 곳의 삶'을 향해 돌진해 볼 용기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예의는 아닐까.

시대가 미워 체루탄 자욱한 거리에 섰고, 그 죄로 고문을 받고 별 몇 개쯤은 기본으로 달았고, 이제는 그 시대가 저물자 변절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그들'의 삶은 누가 책임질 것이며, 누가 위로할 것인가.

의문은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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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5 범우 한국 문예 신서 55
장정일 지음 / 범우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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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서일기 쓰면서 언제나 두 가지 커다란 문제와 마주쳐왔다.

하나는, 내 짧은 독서량이다. 적어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인터넷 공간에 독서일기라는 것을 쓰려면 과거에 읽은 책은 물론이거니와 일상적으로 읽는 책이 많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그 독서량이 부족하기 그지없다.

다른 하나는, 독서일기를 작성하는 방법의 미천함과 떨어지는 내 글 솜씨다. 책을 읽고 나면 어떻게든 독서일기를 작성하기는 하나 언제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너무 내 개인적 경험에 초점을 맞추어 쓰는 것은 아닌가 혹은, 책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기분은 스스로 작성하는 독서일기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이런 두 가지 문제를 나는 언제나 고민했고, 그 결과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게 되었다. 즉, 장정일이란 놈은 독서일기를 어떻게 작성하고 있는가, 어떤 책을 읽고 , 어떻게 쓰는가를 훔쳐볼 요량이었고, 어떻게든 한 수 배워볼 작정이었다.

역시, 글쟁이로 유명한 장정일 답게 독서량이 대단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독서일기는 참으로 재미있으며, 한 권의 백과사전을 보는 듯 했다. 엄청난 독서량은 자연스럽게 그의 지식과 사상이 되었나보다.

우선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책의 내용과 긴밀한 연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하여도 책 속의 그것과 상관있는 것만을 이야기한다. 이는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때 명확하면서도, 간결하게 요약해 내는 그의 능력이 뒷받침 되기에 가능한 것이다.

또 다른 특성은 장정일은 외국 소설을 많이 읽는다는 점이다. 아니 많은 읽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 중심으로 읽는다는 것을 그 스스로 인정한다.

그에 반해 나의 독서일기는 어떠했나. 이미 앞에서 말한 것은 제외하고 보자면, 독서의 범위가 지극히 협소하다. 한국 소설과 사회과학을 중심으로 읽었고, 다른 분야의 책들은 거의 읽지 않았다. 물론 저마다 취향이 있기에 별문제 될 것은 없지만, 협소한 독서는 상상력을 좁게 만든다. 전문성의 결여에 문제를 나타내기도 하겠지만 여러 분야의 책을 두루 봐야겠다.

그리고 독서일기는 쓰려는 욕심보다 책을 많이 읽겠다는 자세를 가져야겠다. 쓰기는 읽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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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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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비록 일시적인 현상으로 머물지도 모를 일이지만, 내 독서 편향에 변화를 주었다. 우선, 그처럼 나도 외국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했고, 첫 시작으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

외국작품에 문외한인 탓에 샐린저의 이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 받아왔고, 좋은 작품이라 평가받은 것도 알지 못했다. 하긴, 사실 샐린저라는 이름도 이번에 처음 알게되었다. 많은 사랑과, 좋은 평가가 있었다고 해서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찾은 병원 의사가 말했듯이 '정답을 모두 알고 시험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조숙하게 보이는 16세 홀든 콜필드가 네 번째로 학교에서 쫓겨나 3일 동안 뉴욕을 헤매이며 경험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다. 청소년이 그 순수한 시선으로, 자신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세상의 모습, 그리고 어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것들은 언제나 위선적이고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런 세계와 어른에게 적응하지 못한 콜필드는 언제나 비웃고 조롱할 뿐이다.

그런 콜필드의 꿈은,

'어쨌거나 나는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조그만 어린애들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항상 눈앞에 그려본단 말야. 몇천 명의 아이들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곤 나밖에 아무도 없어. 나는 아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누구든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가서 붙잡아주는 거지. 애들이란 달릴 때는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런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애를 붙잡아야 하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정말 되고 싶은 것은 그것밖에 없어.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지만 말야.'

그의 꿈이 호밀밭의 파수꾼이기에 책 제목을 그렇게 정했나보다. 솔직히 난 책을 읽는 내내 어떤 의사의 말처럼 정답을 모두 알고 보는 시험처럼 시시하고, 하나도 재미없었으며, 별 흥미도 없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유치하다고나 할까.

이런 류의 성장기 소설, 혹은 순수 소설이라면 차라리 『어린왕자』,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낫다. 어쩌면 그런 글을 읽고 나중에 이 책을 읽어서 그토록 재미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이미 콜필드가 바라본 위선적인 어른이 되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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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드의 여왕 (구) 문지 스펙트럼 3
알렉산드르 셰르계예비치 푸슈킨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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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도예프스키, 톨스토이, 푸슈킨.
어릴적부터 이들의 이름은 귀가 마르고 닳도록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작품을 썼는지 모른다. 단 이번에 읽은 『스페이드의 여왕』을 통해서 이들이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시 배움이란 좋은 것이다.

『스페이드의 여왕』은 수많은 푸슈킨의 글 중, 「고 이반 페트로비치 볠킨의 이야기」와 「스페이드의 여왕」 이 두 작품만을 뽑아서 엮은 책이다. 그러나 「고 이반....」의 형식은 다른 여러 이야기들로 구성된 것이어서 신기하기도 했고, 한 편의 글이 아닌 여러편의 단편 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행복했다. 1800년대 쓰여진 글들이라서 그런지 몰라서 이 책을 읽는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아주 흥미 진진한 '옛날 이야기'를 소곤소곤 재미나게 듣고 있는 느낌이다. 모든 이야기들은 난해하거나 세련된 문장으로 채워져있지 않고, 대신 평이하고 깔끔한 문장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모두가 탄탄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 하더라도 그 결말이 너무 궁금해 책장이 빨리 넘어가곤 했을만큼 그 구성이 참으로 탄탄하며, 그야말로 '재미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속담이나, 기타 여러 잠언의 계몽적 혹은 교훈적 메시지의 성격을 담은 글들도 있는데, 대개 이런 글들은 유치하거나 내용이 뻔하게 느껴지는게 보통이다. 그러나 푸슈킨의 『스페이드 여왕』은 유치하지 않고, 찬찬히 자기 내부 깊숙한 곳을 바라보게 만든다.

책 읽는데 취미가 없거나, 책만 들면 구토 증상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읽는다면 재미있게 읽을 듯 하다. 또 그만큼 책도 조그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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