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인간에 대한 예의』를 통해 처음 만난 공지영에게 호감을 가졌고, 좀더 그녀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고등어』를 읽었다.

'배가 고프면서 제 이웃에게 빵을 나누어주는 아름다움, 하나밖에 없는 제 생명이 우주 속으로 사라져갈 것을 알면서 도청에 뛰어들었던 시민군의 아름다움, 고문을 받으면서 동료의 이름을 불지 않은 아름다움에 대해서 쓰고 싶다. .... 나는 내 소설의 주인공들을 그러한 역사적 사회적 의미의 복판에 가져다 놓은 일을 계속할 것이다.'

이 말은 공지영이 『인간에 대한 예의』 작가 후기에 썼던 글이다. 아직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적어도 『고등어』는 그 고민의 연장에서 쓰여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저마다 시대의 생채기를 간진한 채 살아가는 김명우, 노은림, 연숙, 여경.
학살자가 대통령으로 통치하고 있고, 학살당한 사람들은 웅크리고 있는 80년대는 숨쉬기 어려운 억압과 금방이라도 혁명이 일어날 것만 같은 열정이 교차하던 시대였다. 그 시대는 당연히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삶'을 버리고 '저 높은 곳의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저 높은 곳의 삶'이 결국 '자기의 삶'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땐 사랑하는 명우와 은림은 서로가 아닌, 다른 남자와 여자의 남편과 아내가 되었고 그것은 되돌릴 수 없었다. 자기 의지가 아닌 시대 의지에 의해서 살았던 이들에겐 그만큼의 간극과 상처가 존재했고, 그것은 치유하기 불가능해 보인다.

'저 높은 곳의 삶'을 살게 만들었던 그 시대가 저문 어느날 명우, 은림, 연숙, 여경은 한자리에 모인다. 언뜻 보기엔 조금 코믹한 장면이긴 하지만 그것이 결코 코믹적이지 않았던 것은 그 모습이 바로 지금 시대를(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은림을 버릴만큼 조직에 충실한 투사였다가 지금은 부르주아 전기를 만드는 대필작가가 된 명우, 파업현장을 지키기 위해 아이를 사산하고 만신창이가 된 은림, 공장에서 명우와 결혼해 결국 그 좁혀질 수 없는 간극에 이혼한 '공순이 출신' 연숙. 그리고 그들의 얽힌 삶과 가슴아픈 과거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신세대 여인 여경.

이들이 얽히고 섥혀 살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이다.

그렇다고 『고등어』가 허무주의를 그려내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는 그처럼 치유할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으며, 아직도 나름의 상처를 떼어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연민과 애정으로써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고등어』를 읽은지 많은 날들이 지났고, '저 높은 곳의 삶'을 생각하고 있다. 삶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그래서 자신의 몸에 눅진하게 배겨있는 사상과 가치관, 삶의 목표가 아닌 것은 정녕 '허망한 꿈'으로 밖에 머물 수 없는 것인가.

지난 80년대의 많은 사람들은 학교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버리고 '저 높은 곳의 삶'을 위해서 공장으로, 현장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 시대가 막을 내리자 '저 높은 곳의 삶'을 지향했던 이들은 이미 한참이나 늦은 다음에야 '자신의 삶과 길'로 되돌아 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에게 변절자, 심약한 사람들이라 했고, 어떤 사람들은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했다. 이렇듯 우리는 80년대 '그들'을 평가하는데 참 편안한 위치에 있으며, 그만큼 쉽게 말을 하곤한다.

그러나 심약해서 마음이 변했고, 그래서 변절자라는 소리까지 듣는 80년대 '그들'에게 우리는 참으로 냉정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적어도 그들처럼 살아보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용의도 없는 우리가 아닌가. 적어도 우리는 '저 높은 곳의 삶'을 향해 돌진해 볼 용기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예의는 아닐까.

시대가 미워 체루탄 자욱한 거리에 섰고, 그 죄로 고문을 받고 별 몇 개쯤은 기본으로 달았고, 이제는 그 시대가 저물자 변절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그들'의 삶은 누가 책임질 것이며, 누가 위로할 것인가.

의문은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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