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칠 수 있는 용기 - 출간 10주년 증보판
파커 J. 파머 지음, 이종인 옮김 / 한문화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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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er J. Palmer의 번역본 중에서 두 번째로 읽게 된 책이다. 가르침의 행위는 단순히 테크닉이라는 기술적인 차원에 국한될 수 있는 것이 아님에 분명하다. 테크닉이 득세할 때 생겨나는 현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한다면 가르침의 현장에서 인격이 사라지고 대신 물질이 가득해 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곧, 지식의 거래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지식 거래의 도구로 전락한 가르침은 사람의 내면 깊숙히 파고들지 못한다. 이는 가르침의 현장에서 오고가는 감동이 줄고들고, 그에 따라 마음이 좀처럼 움직여지지 못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의 철저한 분열이 남겨진다. 저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따라서 현란한 테크닉이 아니라 테크닉 기저에서 발견해야만 하는 본질, 곧 교사의 내면세계이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곳은 테크닉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정체성 인식과 자신의 정체성에 성실할 수 있는 마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면 세계 속에서 자아가 어딘가에 연결되고, 관계되고 있음을 자각하고, 그 상호성, 전체성에 스스로를 온전하게 위치시킬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비로소 독단적인 주체가 왜곡시키는 진리의 폭넓음, 속깊음을 겸손하게 발견할 수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가르침의 주제가 품고 있는 신비스러운 비밀이 그 스스로 열려지는 폭을 더 넓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하게 한다는 의미 이겠다. 여기서 독단적 주체를 극복하는 상호성, 전체성의 연결망은 가르침의 현장에서 볼 때는 1차적으로 가르침의 주제를 중심에 두는 것이고, 2차적으로 그것을 둘러싼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그물망과 같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역설이 설명된다. 주체의 독단성이 사라지나, 오히려 주체는 온전해 진다. 커뮤니티에 속하게 되나 개인이 절대 함몰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렵다. 익숙한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주체는 독단적이고 싶어한다. 진리의 폭을 제한하여 소유하고자 한다. 그것이 실상은 진리를 고스란히 망가뜨리고 진리와 분열되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손에 쥐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손을 놓아버리면 허물어질 것 같고, 불편하며, 무엇보다 이러한 분열이 현실적으로 공고하게 제도화되어 있는 실존의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리어 이상태가 실존의 가장 큰 위협을 겪어내고 있는 상황임은 자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이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편안한 분열되신 불편한 온전함을 향해 꿋꿋하게 걸어가겠다는 용기이다. 곧 불편한 온전함에서 다가오는, 이전의 편안한 분열을 상쇄하고 채우고도 넘쳐날 만큼의 보람을 누릴 수 있다는 용기이다. 이렇게 용기를 내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동체, 커뮤니티를 이루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꿈은 현실의 다른 말이 될 수 있다.  

내가 이 책에서 탐구하려고 하는 영역은 가르치는 자아의 내면 풍경이다. 이 풍경의 지도를 잘 작성하려면 지성, 감성, 영성의 3대 노선을 취해야 하며 그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교육을 지성으로 축소해버리면, 그것은 차가운 추상적인 개념이 되고 만다. 반면 감성으로만 다룬다면 나르시스적인 감상주의가 되고 만다. 영성으로만 접근한다면 이 세상과의 연결을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지성, 감성, 영성이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바람직한 전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인간의 자아와 교육에서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지성, 감성, 영성을 이 책속에 긴밀히 엮어 넣으려고 한다. 지성은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뜻한다. 사람들이 알고 배우는 방법에 대한 개념, 학생과 학과의 본질에 대한 개념의 구체적인 내용과 형태를 뜻한다. 감성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와 학생들이 느끼는 방식을 말한다. 교사와 학생 간의 교감을 증진시키기도 하고 위축시키기도 하는 그런 느낌을 뜻한다. 영성은 삶의 장엄함에 연결되려는 가슴 속 동경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방식을 뜻한다. 사랑과 노동을 촉진시키는 동경, 특히 가르침이라는 노동을 촉진시키는 동경을 뜻한다. ... 이러한 영혼의 친교를 위한 내면의 탐구는 동시에 외부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탐구가 된다. 우리의 영혼 속에 기거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자기 집처럼 편한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39-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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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귐의 기도
김영봉 지음 / IVP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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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이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무엇'을 느꼈다. 교회 생활을 충실히 하고, 늘 신학적인 문제와 씨름하고 신학을 가르치면서, 공허감에 시달렸다. 그 공허감은 목사가 되기 전부터 계속 나를 괴롭혔고, 나는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 헤맸다. 만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나의 신앙을 칭찬했지만, 나는 여전히 '이건 아닌데'라는 번민을 가지고 있었다. 제자리에서 맴도는 내 삶의 수준에 수없이 절망했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처럼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깊이 고뇌했다. '영성'에 대한 관심은 이 고뇌를 해결하려는 한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10쪽)

기독교 신앙은 신비롭다. 신비로움은 그 속에 무언가 알지 못하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 있는 그 무엇,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낯선 세상을 포괄하고 있다. (믿음이라는 것이 여기서 고백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 이런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이런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것, 이런 신비에 대한 고백이 믿음말고 어떤 단어로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신비롭고 낯선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는 이미 크나큰 제한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내가 거부하고 싶다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제한을 인식하지 못하고 마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을 단순화시켜버리고, 축소시켜버린다면 그것만큼 기독교 신앙을 왜곡할 위험의 소지가 다분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 신비로움 속에 들어가고, 또한 그것을 고백해 내고자 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 이것을 영성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실제적 수단 중의 하나가 바로 기도이다. 하나의 수단으로서 살펴볼 때에도, 이는 다소간의 노력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앞서 말했는 자칫하면 축소, 왜곡,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게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한 번 이 책을 들고 살펴보면 좋을 듯 싶다. 주의하고 조심해야하는 이유, 실제적인 노력의 필요성 및 방향성 등을 적절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은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전반적인 한국 개신교회가 겪고 있는 기도 생활의 문제점들에 대해 반성하면서 개선 방안을 생각해 볼 것이다. 제2부는 기도의 시간적, 공간적 환경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제3부에서는 기도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여러가지 주제를 살펴보고, 제4부에서는 기도를 돕는 다양한 도구들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른 기도를 통해 맺게 되는 열매들을 살펴봄으로 논의를 마칠 것이다. (12쪽)

매 챕터가 끝날 때마다 그 장에 대한 간단한 요점을 달았고, 연구를 위한 질문, 실천을 위한 제언, 참고 도서 목록도 정리되어 있어서 조금은 천천히 그리고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도 제공했다. 한 번 실제적으로 사용해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기도는 정말 필요조건인 것 같다. 기도에 대해서 신학적 의미를 여러모로 부여하면서 확장시켜봐도, 기본적이고 물리적인 측면에서의 기도를 행하는 최소한의 노력,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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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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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인즉 작년에 한정된 구호 자금 때문에 한 말은 씨를 배분하고 그 옆 마을은 주지 못했단다. 안타깝게 비가 오지 않아서 파종한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씨를 나누어준 마을 사람들은 씨를 심어놓았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수확기까지 한 명도 굶어 죽지 않았는데, 옆 마을은 아사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똑같이 비가 오지 않는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씨앗을 뿌렸다는 그 사실 하나가 사람들을 살려 놓은 것이다. 이곳에서의 씨앗이란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 있었다. (76-77쪽)

한비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의 경험을 눈에 그려보고 이 세상의 아픈 문제들을 대면하는 그 넘치는 열정을 마음에 담아 보다.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냐? 내 열정을 만들어내고 쏟아붇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 세상을 향해 지도를 넘어 걸어가보라. 사람들 사이로 한 길 깊은 그 심연 속을 향해 걸어가보라. 넘치는 열정과 두근거림으로.... 그 두근거림으로 희망 삼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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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창비시선 238
문태준 지음 / 창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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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의 시를 읽으면 흙먼지 뒤집어쓴 시골 찻길이 생각난다. ...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 시골길 풍경이 1980년대까지 온존했던 것을 생각하면, 내가 본 60년대와 시인이 본 70년대 풍경이 많이 다르지는 않았을 성싶다. 그 길은 1.5차선 정도로 버스 두 대가 지나치기는 쉽지 않을 너비였고, 길가 미루나무와 '점방'들은 사철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버스는 자갈을 튕기며 먼지를 피우며 달렸고, 그 먼지는 멀리서도 보여 차가 가는 표시가 되곤 했다. 귀가 밝은 이는 30리 밖의 버스 소리도 듣던 시절이었다. ... 문태준의 풍경에는 사람의 숨결이 있다. 그의 풍경은 사람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풍경과 사람은 분리되지 않는다. 사람의 자리를 마련해둔다는 점에서 그의 풍경은 동양화의 전통과 다르지 않다. ... 풍경을 생산하는 시인의 독특한 재주에서 더 나아가 이 시를 주목할 만한 다른 이유는 이 시에, 새 시집의 몇몇 굵직한 줄기를 가늠할 단서들이 있기 대문이다. 그 세목을 들면, 첫째, 시인이 저녁 무렵을 애호한다는 점, 둘째, 인생 또는 세월에 대한 일말의 무상감을 드러낸다는 사실, 셋째, 낡거나 사라져가는 것들을 향한 시인의 시선과 추억 속의 풍경을 되새기는 이유가 드러난다는 점, 넷째 어머니의 세계로 수렴되는 상상력의 흔적 등이다.   (시집에 대한 이희중의 해설, "풍경의 내력", 86-92쪽에서)

사람마다 익숙한 세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도 내가 익숙한 세계가 있고, 그 세계에서 즐겨쓰는 언어와 편안한 느낌을 즐긴다. 그러나 때로는 다소 낯선 세계를 접할 때에 뭔가 알지 못할 느낌을 받을 때까 있다. 그것이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든 아니면 책과의 만남이든지 말이다. 그 낯설음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오래 갈 것인지는 가늠할 수가 없다. 그 낯선 세계와의 접촉은 첫인상만큼이나 일정부분의 인식적인 선입관같은 것을 심어놓고 일종의 왜곡현상을 지속적으로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 낯설음의 이유는 때로는 모호할 때도 있다. 그저 느낌, 어떤 감정적인 느낌때문이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나'라는 자아의 익숙함 또는 자아의 희망이나 가치관 등에서 발생할 수 있는 미묘한 차이가 이를 더욱 부추길 수도 있을 것이다. 문태준의 시집을 읽으면서 지극히 주관적인,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느낌은 모호한 낯설음 같은 것이었다. 풍경과 사람을 그려내는 그의 세계에서 나는 뭔가 조금 불편하다. 노르스름한 저녁 분위기에 뭔가 아쉬움이 짙게 배여있는 듯한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이 내게는 그다지 반가운 것 같지 않다. 편견일 수도 있고, 왜곡일 수도 있고, 어찌되었든 뭔가 답이 없는 듯한 느낌에 당분간 조금 쉬었다가 다시 집어들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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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하나님의 세계 - 영성신학 유진 피터슨의 영성 1
유진 피터슨 지음, 이종태.양혜원 옮김 / IVP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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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피터슨의 영성이라는 시리즈로 나온 저술의 첫 번째 책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영성 시리즈 첫 권을 제일 마지막에 읽게 되었다. 현재(2009년 9월) 그의 영성 시리즈는 이 책을 포함해서 총 4권이 나와 있다. 4권을 다 읽게 된 지금, 책의 순서에 맞추어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의 영성에 대한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이해를 한 뒤 다른 주제를 조금씩 더 깊이 읽고 싶다면 조금 두꺼운 분량이더라도 첫 권을 읽고 이어지는 책을 읽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실 첫 권은 분량이 영성 시리즈의 다른 책들에 비해 두껍다. 분량적으로도 두꺼울 뿐만 아니라 활자 크기, 간격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첫 권이 주는 조금의 부담인 셈이다.)

첫 권 답게 이 책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영성에 대한 신학적인 얼개를  상당히 오밀 조밀하면서도 조잡하지 않고, 깊이 있는 신학적 논의를 담으면서도 현실적이고 목회적 차원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는 폭넓고 속깊은 내용을 아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아주 묘한 느낌이다. 조직신학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조직신학은 아니며, 각 주제마다 성서 한 권의 전체적인 구조와 내용을 충실히 해석하함으로써 조직신학적인 체계를 강력하게 뒷받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학도 아니고, 예배와 함께 예배적 삶을 말하면서도 예배설교학은 아닌, 신학과 목회의 그 갖추기 힘든 균형을 갖고 있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책을 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얼마나 공부하고 얼마나 실제적으로 살아야 이렇게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말그대로 영성신학이다. 유진 피터슨이 말하는 영성신학은 다음과 같다.

'신학'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울이는 주의,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알고자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을 가리킨다. '영성'은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해 계시하시는 모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정과 일터에서 살아낼 수 있는 것들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영성'은 '신학'이 하나님 하나님과 멀찍이 거리를 둔 채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것으로 타락하지 않게끔 해준다. '신학'은 '영성' 그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것이 되지 않게끔 해준다. 이 두 단어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 영성신학이란 신학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우리가 기울이는 주의를 가리킨다. 신학을 살아낸다는 것은 먼저 신학을 기도가 되게 한다는 말이다. ... 영성신학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믿는 바를 삶으로 살아내고자 기울이는 주의다. 우리 삶이 성부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예배로서의 삶, 성자 하나님을 따라 걷는 희생 제사로서의 삶, 성령 하나님의 공동체를 포옹하는 또 그 공동체의 포옹을 받아들이는 사랑으로서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영성 신학은 조직신학, 성서신학, 실천신학, 역사신학 등과 나란히 책장 한 자리를 차지하는 또 하나의 신학 영역이 아니다. 영성신학이 표명하는 바 무릇 모든 신학은, 우리를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살아가는 살아 있는 창조물로 창조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과 고나계 맺는 일이어야 한다는 확신이다. ... 영성은 신학에서 시작되며, 신학의 인도를 받는다. 그리고 신학은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사람들, 충만한 구원의 삶을 살도록 뜻하신 사람들의 몸을 통해 표현되는 바(영성)를 떠나서는 결코 참된 신학으로 존재할 수 없다.  (26-28쪽)

그래서 그의 영성신학은 삼위일체를 구조로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복음으로 함께 풀어낸다. 그리고 인간의 삶의 차원을 성서 속의 이야기들 속에서 은유로서 풍성히 건져올려 그 구조에 알찬 살을 덧입힌다. 이 가운데 삶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 조심하여 세심하게 경계해야 할 것들과 더 깊이 삶으로 드러내야 할 것들을 교차적으로 이야기 해준다. 그리하여 성서는 삶으로 녹아들어가고, 삶은 성서와 맞닿게 된다. 이것의 총체적인 모습이 예배의 삶, 삶의 예배다. 결코 근본주의적 보수성만 자리잡고 있지않으면서, 극단적이고 급진주의적인 진보성도 중심 축이 되지 않는다. 도덕적 율법주의도 정의 실현을 위한 투쟁도 아닌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가는 자연스러운 길이다. 그래서 이념이 아닌 (재밌는 사실은 양 극단을 볼 때 어느정도 이념성이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보수성은 교리가 이념으로, 진보성은 정의가 이념으로 등장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저 하루 하루를 풍성하게 살아내는 삶, 그 인격적인 관계성이다.

내게 최고의 관심사는 삶으로서의 기독교적 삶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내 정체성이 서로 일치하는 삶, 이 분주하고 번잡한 북미와 하나님 나라의 교차점에서 사는 삶, 나의 사지와 눈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말이다.  (577쪽)

바로 이것이 내게도 최고의 관심사이다. 지금까지도, 그리고 지금도. 그래서 깊이 빠져들었다.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고 들었고 신나게 함께 놀이했다. 이 많은 내용들을 일일히 기억하지 못하는 능력이 아쉬울 따름이다. 유진 피터슨의 영성 시리즈가 총 5권으로 출판 기획되었는데 아직 5권은 나오지 않았다. 기다려진다. 영성신학, 영적 독서, 영적 리더십, 영성 지도, 영성 형성의 순서로 짜여진 이 시리즈는 아마도 내게 있어서 최고의 읽기 즐거움을 가져다 준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읽기 즐거움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삶을 살아내는 기대감도 가져다 준 책이다. 다른 그의 책들도 읽어야 겠다.

숲 속에 홀로 있을 때, 또 이 투쟁이 무의미하고 헛되게 느껴질 때, 또 대중 집회에서 번번이 거부당할 때,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작은 것들이 중요하다고. 나는 정말 그렇게 믿는다. 나는 믿는다. 당신이 당신의 마음을 정말로 조금만 확고하게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 기울여만 줘도,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어느 날 흔들림이 시작될 것이고, 그러면 오랜 시간 동안 아무것도 없었던 그 곳에 마침내 얼음이 형성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이다. 한 평생, 아니 두 평생, 세 평생 동안 꾸준히 계속해 가라. 그러면 어느 날, 분명 마침내 그 얼음은 미끄러져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583쪽)
 

이 책에 대한 아주 짧은 정리라고 한 다면 다음의 인용문을 보면 될 것 같다..

성 삼위일체를 구조와 맥락으로 삼고, "수많은 곳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 은유로 삼고 있는 본서의 대화는 먼저 그 놀이터를 말끔히 치운 뒤, 창조, 역사, 공동체라는 우리 삶의 세 차원들, 그 서로 교차되는 차원들을 탐험하는 순서로 진행될 것이다. 놀이터 치우기. ... 현재 영성의 놀이터는 온갖 즉흥적 시도와 미봉책들로 상당히 어지럽혀져 있다. 나는 기독교적 삶을 성경적이고 인격적인 견지에서 이해하도록 돕는 몇몇 기본적 이야기와 은유와 용어들을 통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이 모든 것을 말끔히 치워내고, 대화를 위한 공동 지반을 다질 생각이다. 창조 안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 모든 사물과 사람을 점점 더 기능화시켜 가는 이 시대에, 사물과 사람의 성스러움과 거룩함에 대한 감각이 점차 스러져 가는 이 시대에, 우리는 모든 창조를 ,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시작되며 충만하게 표현되는 거룩한 선물로서 그리스도인이 받아들이고 경축하고 높이는 방식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역사 속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그러나 삶은 단순히 창조의 선물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또한 죄와 죽음이 주름잡고 있는 역사 속에 던져져 있기도 하다. 그것은 고통과 아픔, 실망과 상실, 재난과 악의 역사다. ...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존재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탐구할 것이다. 그 역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그리고 그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구원의 생명에서 결정적 의미를 얻는다. 공동체 안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기독교적 삶은 타자들과 더불어, 타자들을 위해 사는 삶이다. ...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형성되는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 부활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전 존재, 전 행위에 충만히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3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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