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 강영안 양희송 2박 3일의 대화
강영안.양희송 지음 / 홍성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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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처음 일독한 책은 양희송 대표와 강영안 교수의 대화를 기록한 <묻고 답하다>이다. 내가 크게 정리해 두어야 할 내용은 다음의 것들로 보인다.

첫 번째는 신앙의 일상성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에게는 종교가 마치 비일상이고 초일상인 것처럼 생각되는 부분이 강하다’(60)그러나 사실 ‘종교도 일상을 벗어날 수 없다’(64) 중세에 비상한 삶을 만들었던 수도원 조차도 전혀 비상하지 않은 일상의 테두리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종교개혁은 여기서 신앙의 일상성을 재발견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와 칼뱅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일 뿐만 아니라 부르심, 곧 소명이라 보았다. 적어도 원칙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행한다면 일상적 삶이 거룩하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중세의 성속이원론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중요한 공헌이었다.’(66)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교회에서 여전히 부추기는 비일상이다. ‘비전’으로 ‘선교’로 제시되는 신앙의 모습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 강영안 교수의 대답은 기억해 봄직하다.

교회는 선교 비전만 비전인 것처럼 계속 이야기하죠. 외국 전도를 선교라고 부르니가 전도 중심의 선교 비전만 이야기할 뿐 일상을 변화시키자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거대담론, 이데올로기, 구호를 외치던 상황이 지나가고 포스트모던 현실에서 사소한 이야기를 빚어내고, 그 작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해요. 그런 이야기가 이어져서 하나의 퀼트를 만들어 내는 거지요. 큰 이야기가 동시에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최후 완성을 위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의 전망이 필요합니다. 전통적으로는 ‘계시사’라 불렀고 최근에는 ‘기독교 세계관’이라 부르는 그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에서 민감하고 섬세한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고, 만들어 가는 일도 필요하고, 이런 이야기를 모으고 방향을 보여주는 큰 이야기도 동시에 필요한 것이지요.(60) ... 이 하나님 이야기가 우리의 현실을 비범하게 만들지요. 일상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날마다 기대 가능한 새로운 현실입니다.(72)

두 번째는 목회자,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개신교에 대한 문제이다. 이 부분은 신앙의 일상성과 연장선에 놓여있다. 목회자와 교회가 신앙의 일상성 회복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목회자와 교회가 삶에서 어떤 영역을 차지하는지가 논의되었다. 먼저 ‘가톨릭 교회의 방식은 건축물에 비교된다. 상층부와 하층부로 나뉘는 것이다. 하층부는 세속 정부와 세속적인 영역, 상층부는 거룩한 영적 영역이다. 하부구조인 이 땅에 나름의 체제가 있기 때문에 그 사회의 전통이나 관습을 존중하는 동시에 교회 전통과 하나님의 율법도 지켜야 하는 것으로 보게 된다.’(77) 이에 반해 개신교 교회에서 목회자와 교회가 삶에서 차지하는 영역은 동심원으로 그려진다. 강영안 교수는 이를 이렇게 그린다.

저는 삶에서 교회나 예배가 차지하는 위치를 하나의 원이라고 생각해요. 큰 원을 그린 뒤, 중심에 작은 동심원을 그려 보세요. 큰 원을 우리 삶의 영역들이라 생각해 보지요. 그 안에는 정치, 예술, 문화, 학문, 스포츠 등이 다 들어갑니다. 중앙의 작은 동심원을 전통적 의미의 종교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 교회와 기독 공동체와 예배라고 부르는 삶이 속한다고 생각해요. 큰 원 안에 있는 정치, 문화, 예술 역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배죠. 변화된 삶, 거듭난 삶을 산다면 그것이 곧 예배이고 종교 행위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란 ‘세상에서 삶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떠받쳐 주는 예배의 의미가 있죠.(75) ... 앞서 이야기한 원의 모형에서 가운데 부분을 교회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가운데를 단순히 목회 영역이라고 하면 성도들이 배제되고 의미가 너무 좁아져 버립니다. 이를 가시적인 예배 공동체라고 표현해서 목회자들의 활동과 성도들의 활동이 공유되면 좋겠어요. 목회 영역을 왜 가운데 놓고 다른 모든 영역과 연관을 짓느냐면 결국 하나님의 일꾼으로 키움받은 성도들이 각 영역에서 주되심을 인정하고 섬기려면 교회 공동체에서 양육받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87)

세 번째는 (교회)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이다. 여기에는 딜레마가 있다. ‘개인성 인정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실제 발현될 때 발생한 문제는 주체를 중심에 놓고 벌어지는 타자화, 주변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 등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이 딜레마를 풀기 위해 홉스 같은 이들은 국가기구를 통한 평화를 제안한 것인데 이는 개인성을 극단적으로 수용한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강력한 집단주의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132) 한국 교회의 현실이 여기에 있다. 한국 교회는 극단적 개인주의, 곧 타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는데, 이것이 모였을 때 자기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극단화된 집단을 이루고, 그 집단의 유지를 위해 모든 것을 수단화하는 집단주의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140)

 

이를 극복하는 것은 한 가지이다. 자기 존재 유지 원리의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어야 함이 제시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바로 십자가이다. 그것은 존재의 근본 원리가 자기 존재 유지가 아니라 ‘타자를 위한 존재’라는 점을 근본적으로 드러낸 것으로서(140) 이를 회복하게 될 때, 개인과 (교회) 공동체는 그 각각의 고유성을 인정받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은 공동체가 될 수 없고 공동체는 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시 말해 비환원적 관계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하나가 되는 존재 방식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교회의 존재방식’(136)이 되는 것이다.

그 외에 신앙과 지성의 문제도 있으나 이 정도로만 정리해 두어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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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살라 (양장) - 영적 성숙 유진 피터슨의 영성 5
유진 피터슨 지음, 양혜원.박세혁 옮김 / IVP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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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사랑 안에서 강해지는 것. 이것이 내가 다룰 주제다. "거룩함의 아름다움"이라고 어느 시편 번역본이 발하는 그것을 찾고 그것에 따라 사는 것. 우리의 정신과 영혼과 삶이 빚어지는 것.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는 것. ... 미국인들은(내가 보기에는 한국인들도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성숙이 일어나는 환경에 순응하는 삶을 잘 견디지 못한다. 성숙이 일어나는 환경이란 조용하고, 명확하지 않고, 인내해야 하고, 인간의 통제와 관리에 종속되지 않는 환경이다. 미국 교회는 그러한 환경에 처하면 불안해한다. 그래서 '현실에 참여한다'는 핑계로 미국의 지배 문화에 스스로 순응해 버리고, 머지않아 그 문화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비슷해진다. 말이 많고, 시끄럽고, 바쁘고, 통제하고, 이미지를 의식하는 집단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세속 사회가 교육과 활동, 심리적인 영역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교회의 목표가 된다. 인격 형성, 기도의 삶, 거룩의 아름다움과 같은 문제는 특수 목회나 단체에 위임되고, 교회 생활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것들이 중심을 차지하지 못한다. ... 우리는 진리를 위해서 싸우고,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 선한 일을 주장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동하는 일에 열정을 가진다. 그러나 진리와 선이 인간의 삶에서 드러나는 형태인 아름다움은 대체로 무시하고,아름다움을 꽂꽂이 장식가와 실내 장식가에게 맡긴다. ... 아름다움이 없으면 진리와 선이 담길 그릇이 없어지고, 형태가 없어지며, 그것을 인간의 삶에서 표현할 길이 없어진다. 아름다움과 분리된 진리는 추상적이고 혈색을 잃는다. 아름다움과 분리된 선은 사랑과 은혜가 없다. 이것을 일컬을 공식 용어가 필요하다면, '신학적 미학'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 무엇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성숙해질 수 있는 토대는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 살아계시고 현존하시는 예수님.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었고 우리의 견해와도 상관 없었던 예수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인식해야만 우리의 성장을 직접 책임지려는 태도를 극복할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자주 묵상해야 우리의 대화를 우리가 규정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언어로 축소하지 않을 수 있다. ... 부활을 살 때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큰 무엇으로 끊임없이 들어가게 된다. 부활을 살 때 우리는 살아계시며 현존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게 된다.  (들어가는 글에서)


유진 피터슨의 영성신학 마지막 권이다. 이로써 유진 피터슨은 영성신학, 영적 독서, 영적 리더십(제자도), 영성 지도(언어), 영성 형성(영적 성숙)이라는 일련의 논의를 마무리지었다. 이 책들은 내게는 잊지 못할 의미있는 책들이다. 마지막으로 달려온 영성의 형성과 성숙의 과제는 삶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을 유진 피터슨은 부활을 살아내는 것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 삶을 교회와 그리스도로 초점을 모두어 간다. 이 때 주목하는 것은 인간을 뛰어넘는 곳으로 들어가는 겸허함이다. 인간이 스스로 소유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에게 주어진 것을 발견하는 마음, 곧 선물과도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삶을 낭만화 시켜버리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삶을 규율로 조건화시켜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들이고 여기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시는 일상의 풍성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은 죽음의 세상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죽음의 나라에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생명을 끌어아는 일이다. 시간 안에서 영원을 사는 기적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이 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먼저 고백한다. 삼위일체가 하시는 일을 먼저 드러내고, 그 영광의 풍성함을 바라본다. 너무 큰 세상이고, 인간의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깊은 곳이다. 그런데 바로 그 속에 교회가 있고, 인간이 초대 받았다. 그 방식에 주목해야한다. 이 모든 과정은 "인격"으로 이루어졌다! 그 증거는 인간의 이름이다. '성도' 거룩한 백성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그것이다. 이 이름은 삼위일체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새로운 정체성이고, 그가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 부르심에 인간은 믿음으로 응답할 뿐이다. 여기서 인간에게는 '의도된 수동성, 의지적인 수동성'이 요청된다. 이 때 은혜는 일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율법도 그리고 인간의 단순한 자발성이나 자연스러움도 아닌 부활을 사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유진 피터슨은 이를 세속주의와 경건주의의 왜곡을 피해하는 길이라 말한다. 

성도라는 이름은 이제 그리스도인을 공동체로 초대한다. 은혜를 믿음으로 받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르는 성숙의 삶은 개인주의에 국한될 수 없다. 이미 모든 곳에서 활동하시는 삼위일체의 은혜, 그 일에 들어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흔히 혼자서 영적인 삶을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세상을 바꾸겠다고 투쟁하는 실용주의적인 삶도 여기서는 발을 붙이지 못한다. 여기서 익숙해지는 것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신 그리스도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가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엮어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개개인은 모든 주어를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한다. 이 때 우리는 '비인격화'의 유혹을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사물화, 대상화에 능숙하다.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방식은 '인격'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평화를 이루시는 방법, 그것은 그의 피, 그의 십자가였다. 예배는 이를 지키는 중요한 방편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더 큰 곳으로 들어간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머리와 몸으로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이해한다. 그러면서 더 큰 세계, 이미 삼위일체께서 이루신 세계, 부활의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곳이 다름아닌 일상의 삶 한 가운데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교회는 그 삶을 펼쳐내 보이는 중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적이면서 신적이다. 이 두 가지가 교회에 함께 존재한다. 이 둘을 분리해서는 교회가 교회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종교적 형식만 남게 되거나 비인격적인 과업들만 남게 된다. 이 위험은 상존해 있고, 교묘하다. 그래서 기도가 요청된다. 기도는 인격적인 언어이자 인격적인 관계를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을 그분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반응과 결합(247)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그리고 '속사람'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 즉 교회라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 분이 교회 안에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방식과 일치되어야 한다.(286) 여기서 부정적인 공간이 중요하다. 부정적인 공간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지 못한다.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정 뿐이다. 다만 부정의 역할은 주된 활동, 곧 하나님의 활동을 위한 여지를 마련하는 것이다.(299) 그렇게 하나님의 활동의 여지를 마련하며 살아내는 삶, 부활의 삶은 사랑과 예배로 이어지게 된다. 사랑은 하나님이 그 기원이며 예수님이 그 내용이고 성령이 그 동력이 되시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최고의 관계적 언어, 최고의 인격이기도 하다. 예배하는 것은 그 사랑을 살아내며 길러가도록 돕는다. 이제 가장 익숙한 장소에 이르게 되었다. 바로 가정과 일터이다. 그리스도의 풍성함, 그 광대함, 이 모든 깊이와 넓이는 이제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평범한 곳, 인간의 일상으로 펼쳐지게 된다. 교회의 크기와 깊이, 의미도 재확인된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늘과 보이는 땅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위한 무대(365)이다. 그리고 부활을 사는 새로운 삶, 그 중심에 있는 인격도 재확인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굳게 서는' 일이다. 악처럼 보이지 않는 악으로부터, 악으로 알아차리기 어려운 악으로부터, 인격을 비인격화시키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을 축소시키는 모든 악으로부터 '굳게 서는' 일이다. 그 길 또한 철저히 인격적이다. 일상과 초월을 넘나들면서 하나되게 하는 일, 영원을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일,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교회의 의미를 살아내는 일, 삶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일,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일, 그길은 곧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 은혜를 사는 것, 바로 부활을 사는 것이다. 에베소서를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 해준 유진 피터슨에게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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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미덕
톰 라이트 지음, 홍병룡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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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논의의 요점 중 하나는 예수의 첫 제자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새로운 창조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다름 아닌 예수의 부활이었다. ...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주제를 더욱 더 발전시켜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미덕'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 하지만 이 책은 이른바 '윤리'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루지는 않는다. 흔히들 그리스도인의 행실에 관한 책에서 기대하듯이 모든 경우를 섭렵하는 규칙을 제시하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오히려 나는 일반적인 성품이 어떻게 빚어지는지 구체적인 실례를 듦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형성되는 방법을 탐구하려 한다. ... 부류와 전통을 막론하고 내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적 미덕을 추구하도록 자극하고 격려함으로써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본래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심어주셨던 성품을 가진 인간으로 다듬어지도록 다독이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제이다. 일차적으로 예배와 선교를 주 관심사로 삼고, 이 두 가지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써 우리의 성품을 가꾸어 가는 일이 바로 기독교적 미덕을 추구하는 일이다.                                                    (머리말 중에서) 
 

톰 라이트의 <기독교 여행>을 인상깊게 읽은 다음 집어든 책이다. 톰 라이트는 이 책에서 기독교 신앙이 인간의 삶을 뒤바꾸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한다. 여기서 오해는 피해야 한다. 하나는 율법주의이다. 규칙에 따라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는 삶이다. 기독교 신앙의 깊이는 도덕을 뛰어넘는다. 따라서 율법주의에 귀결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내면성을 긍정하며 이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일종의 계몽주의, 이성주의, 자아실현, 심리적 이해 등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담보하지는 못한다. 인간성을 그대로 긍정하는 것, 인간이 인간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은 이미 그 한계를 드러냈다. 성서는 그것을 인간의 타락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이미 세상은 타락한 인간이 함께 하는 '악'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전쟁, 환경오염, 자본의 문제 등 인간성은 그렇게 긍정할 만한 것이 못된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의 의미를 주의깊에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이중적이고 포괄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이미 시작된 새로운 창조가 현존하는 미래다.

기독교 신앙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이유는 인간 스스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은혜에 기반한다. 여기서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본래적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그 모습을 톰 라이튼 먼저 통치자와 제사장으로 말한다. 그것은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일,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새 창조에 동참하는 일, 궁극을 바라보며 이 삶을 사는 일, 예배하는 일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재 이 세상을 뚫고 들어온 새로운 현실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현실의 언어로 이러한 삶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은 어쩌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앞서 말한 양 갈래의 오해가 생겨난 것은 당연한 이치다. 여기서 이를 이루어가는 것이 놀랍다. 그것은 절대 권력이 아니고, 무절제한 자유도 아니다. 이를 이루어가는 수단은 다름 아닌 사랑과 고난이다. 십자가의 소명이 담고 있는 신비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완전히 새로운 삶을 낳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이러한 삶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질리 없다. 이는 은혜를 통해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결단과 선택, 훈련, 동참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톰 라이트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이는 마치 새로운 언어를 익히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익히고 문장을 외우고 더듬거리는 과정을 거쳐나가면서 점차 그 언어를 몸에 자연스럽게 덧입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재차 강조하나 이것은 아무 생각없이 규율에 순종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인간의 마음을 따라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수준에 이르기까지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마음이 새롭게 되는 변화가 있어야 하며, 이로 인해 삶의 습관과 방향이 통전적으로 재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입혀지는 삶은 "사랑"으로 모아진다. 그것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보다 정확하게는 인간을 가장 온전하고 완전하고 성숙하게 한다. 그 삶은 성령과 더불어 맺는 열매로 드러난다. 이는 결코 자동으로 자라지 않고, 이루어질 수 없다. 마음과 생각의 습관을 개발하겠다는 의식적인 결단에 따른 결과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율법 아래 놓이지 않는 자유가 있다. 참된 자유함, 위대한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톰 라이트는 이 모호하게 보이는 관계를 "규율과 미덕을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미덕의 틀 안에서 규율을 조망하는 것(331쪽)"이라 말한다. 이 삶은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서 공동체적인 삶으로 확대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몸'에 주목하게 된다. 풍성한 다채로움과 통일성이 자리잡은 교회는 그래서 중요하다. 인간은 교회 안에서 공동체로서 예배를 드리고, 선교를 행하며서 통치자와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기 때무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제 더이상 단순한 가치 판단 기준이 아님이 더욱 분명해졌다. 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며 이루어가야 하는 것, 그래서 삶의 훈련이 필요한 미덕이다. 겸손과 인내, 박애, 순결이 요청된다.

이제 톰 라이트는 마지막 질문은 던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렇게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그 미덕을 갖출 수 있는가? 그 대답으로 톰 라이트는 "미덕의 순환"을 제시한다. 특정한 활동과 실천의 순환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 순환 고리의 출발점에는 '은혜'가 있고, 그 목표점에는'영광'이 있다. 그리고 이 순환은 '정의'와 '아름다움'을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다. 또한 그 속에는 성경, 이야기, 본보기, 공동체, 실천 등 다섯 가지 요소가 있다. 성경 속으로 들어가 그 드라마 속 배우가 되는 연습,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본보기를 찾는 연습, 공동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실천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이 때 저자가 중심으로 제시하는 것은 "예배"다. 예배 가운데 이루어지는 기도와 말씀, 성찬, 세례, 헌금 등이 그리스도인됨의 새로운 삶의 차원, 그 신비롭고 영광스럽고 위대한 전환이 이루어지는 궁극의 현존을 이루어내는 중요한 실천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톰 라이트는 참으로 긴 이야기를 풀어냈다. 470여쪽에 이르는 긴 이야기라 조금은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고 내용전개의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핵심 주제가 편만해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던 것 같다. 이전에 읽었던 <기독교 여행>을 떠올리면서 조금 더 간략하게 집약된 논의를 풀어내면 어땠을까 하는 바램이 슬쩍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쉬움 보다 감사함이 더 크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율법과 은혜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그래도 좋은 실마리를 잡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 미덕의 순환은 그런 측면에서 교회에서 목회자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소명의 역할을 깊이 돌아보게 했다. 조금씩 조금씩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고, 그렇게 온전하고, 완전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전을 일깨워준 것도 마차가지 이 책을 통해 얻은 큰 수확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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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주의 목회자
유진 피터슨 외 지음 / 좋은씨앗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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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들이 빠져들기 쉬운 우상은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소명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즉 목회자 자신이 직접 성취할 수 있는 목회자로서의 성공이라는 우상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직업적인 성공과 정반대 개념인 '목회적 거룩함'이다. ... 목회자들은 말로는 목회가 거룩한 소명이라 하지만, 실제로 사역하는 모습을 보면 성공이나 출세를 더 간절히 추구한다. 목회자들의 실제 사역은 신학의 진리나 영성의 지혜가 아닌 시장 원리와 시장의 압력에 밀려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의 경건에 못지않게 목회적 거룩함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 요나서는 그 중심부에 기도를 담고 있는 일종의 비유다. 비유와 기도는 지나치게 종교적인 현실 속에서 습관적으로 살아감으로써 무뎌진 영적인 개념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진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성경적인 도구다. 목회자들이 바로 그러한 상황 속에 몰두해 활동하고 있으므로 요나 이야기의 비유와 기도는 올바른 목회적 소명과 질서를 세우기에 매우 적합한 것이다. ... 요나 이야기는 희극적인 요소와 과장된 표현을 사용해 세속 문화의 영향으로 발생한 성공의 우상들을 간접적으로 꼬집는다. 우리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으며 즐겁게 웃는 동안, 우리의 방어벽은 허물어진다. 요나 이야기는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 우리가 소명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우리는 심연의 막다른 길에서 망설이다가 비유와 기도에 단단히 사로잡혀 목회적 소명에 적합한 영성을 개발할 수 있는 깊은 골짜기 속으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끌려 들어갈 것이다. (들어가는 글 중에서)


유진 피터슨은 요나의 이야기를 통해 목회자의 소명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한다. 이를 두고 유진 피터슨은 목회적 거룩함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 목회적 거룩함은 하나님을 향하는 것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서 비로소 환하게 드러날 수 있음을  요나가 다시스로 향하다 배에서 뛰어내리는 비유를 통해 제시한다. 이 때 회복되는 소명에 대한 이야기가 5장에서 자세히 이루어지는데 이 부분을 특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부분은 저자가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부분이기도 하다. 여기서 유진 피터슨은 자신이 소명을 회복하는 과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목회를 두고 겪은 내면의 갈등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황, 그리고 그의 말처럼 마침내 '섭리'처럼 발견하게 된 멘토,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진다. 마치 목이 타는 것 같은 갈증으로 인해 기진맥진해 있는 듯한 상황에서 눈이 절로 뜨이게 하는 맑은 옹달샘을 마주한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만큼 단비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이와 같은 것을 나도 찾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 옹달샘을 마시며 목을 축이고 이제 회복한 소명을 들고 저자가 찾아가는 곳은 물고기의 배 속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기도다. 자신이 말하는 것으로서의 기도가 아닌 먼저 있는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기도, 그리고 이를 위해 마련된 기도 학교로서의 시편이 제시되고, 묵상하는 목회자로서의 모습이 더불어 제시된다. 저자는 이를 영성의 토양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이를 읽는 것은 읽는이로 하여금 자신의 영성 토양은 어떤지 조용히 되묻게 한다. 소명과 기도 다음은 본격적인 현장, 니느웨이다. 여기서는 니느웨라는 지리적 특성과 이 곳에서 행한 예언이라는 종말론이 균형있게 제시된다. 이 때 구체적이고 평범한 일상의 삶과 인간의 일상적인 상상의 크기를 넘어서는 영원의 생명, 곧 목회의 중요한 두 축인 이 이중적 요소의 중요성이 밝히 드러난다. 이제 마지막으로 목회자에게 남은 것은 상상력을 통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이것은 우리의 소명을 정화시키고 온전하게 만들어 내는 광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며, 인간의 왜소함이 하나님의 거대함 속에 온전히 흡수되는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우주적인 일이다. 이 상황은 왜소한 인간으로 하여금 요나처럼 불평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보이지 않는 광할한 하나님의 거대한 생명을 가리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왜소한 한 인간의 속좁은 시야를 극명히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마지막은 열려 있다. 요나 이야기의 열린 끝맺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목회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지는 유진 피터슨의 책은 그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났던 것과 같은 느낌을 내게 계속해서 던져주고 있다. 그래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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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2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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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허망한 방황이 서글퍼지면서 바다가 비로소 실감나는 존재로 다가왔다. 녀석이 한 눈에 알아본 것은 바로 내 진정한 모습이었다. 나는 선배들의 신화와 모험을 동경했지만, 그들의 이념에는 투철하지 못했다. 내가 처음 그들에게 매혹됐던 것은 그들의 강인한 의지와 신념이 아니라 화려했던 지난 승리의 기억이었다. 그리하여 그것들이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분쇄되고 부인되자 나는 미련 없이 떠났다. 몇 개의 추상적인 이념의 껍질과 과장된 울분만을 품은 채. 다음에 내가 몸담았던 문예서클과 탐미의 세계에서도 그랬다. 그때 진실로 내가 추구한 것은 아름다움의 실체였던가. 아니었다. 사이비의 것, 촛불 문학의 밤에 낭독한 시 한 줄, 초라한 동인지에 실린 몇 십매의 잡문이 가져다 준 갈채에 취하고, 그 너머에 있는 보다 큰 허명에 갈급했었다. 그래, 그 때 나는 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렇지만 그 또한 탐구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내 마음에 불타고 있던 것이 진정한 이데아의 광휘였을까. 아니었다. 세 번 아니었다. 소년의 허영심으로, 목로주점의 탁자를 위하여, 어쭙잖은 숙녀와 마주 앉은 다방의 찻잔을 위하여 읽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감히 말하였다. 이념은 나를 배반했고, 아름다움은 내 접근을 거부했으며, 학문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라고. 판단을 얻기도 전에 가치를 부인했고, 근거없는 절망과 허무를 과장했다. 그리고 끝내는 말초적인 도취와 탐락에 빠져 모든 것을 망쳐버렸을 뿐이었다. (187-188쪽)

무언가를 찾아 떠난 여행길이었다. 그것은 어떤 완벽함, 어떤 완전함, 모든 것을 채우고도 남을 충분한 의미, 그야말로 절대적인 것을 향한 여행이었다.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다. 강진에서는 삶의 자잘한 군상들을 발견했고, 대학교에서는 끊임없는 지적 유희에 열을 올렸으며, 애잔한 사랑도 경험했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 무언가를 향한 질문이 몸을 마음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함께 대학시절을 보낸 김형의 죽음이 기어이 자신마저도 그 낯설고 두려운 경험을 마주하도록 이끌었다. 그 마지막 고개를 넘기 전에 주인공 '나, 영훈'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한 창백한 폐병쟁이로부터였다. 그 모습은 '방황의 허영성'이었다. 위의 인용문은 그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념이 자신을 배반했고, 아름다움은 자신의 접근을 거부했으며, 학문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는 근거없는 절망과 허무의 과장, 그에 따른 말초적 도취와 탐락에 몸과 마음을 내 던진 그 자신이었다. 이제 여기서 주인공은 한 발자국 더 나간다. 그리고 떨어질 나락이 더 이상 없는 그 곳에서 비로소 무언가를 발견한다. 창수령, 그 자연의 무한한 "아름다움"이었다.

고개를 다 내려왔을 때 나는 하마터면 울 뻔하였다. 환희, 이 환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학자들이 무어라고 말하든 나는 그것을 감지한 것이 아니라 인식하였다. 아름다움은 모든 가치의 출발이며, 끝이었고, 모든 개념의 집체인 동시에 절대적 공허였다. 아름다워서 진실할 수 있고 진실하여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워서 선할 수 있고, 선해서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워서 성스러울 수 잇고, 성스러워서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모든 가치를 향해 열려 있고, 모든 개념을 부여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 거기에 아름다움의 위대성이 있다. .... 그 감격에 뒤이어 돌연히 나를 사로잡은 아름다움의 또 다른 측면은 그것이 어떤 신적인것, 인간은 본질적으로 도달이 불가능한 하나의 완전성이란 것이었다. 인간은 한 왜소한 피사체 또는 지극히 순간적인 인식주체에 불과하며, 그가 하는 창조란 것도 기것해야 불완전하기 짝이없는 모사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예감하는 삶의 형태는 처음부터 불가능을 향해 출발하는 셈이었다. 그런 삶을 채워가야 한다는 것은 그때의 나에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어리석고 무모해 보였다. (198-199쪽)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공허'했다. 너무 아름다워서 완전했으나 도달할 수 없는 것,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찾고자 했던 그 무엇을 만났는데, 그것도 떨어질 곳이 없는 처절한 자기 인식의 끝자락에서 그렇게 바라던 것을 마주했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은 '공허'함, 불가능을 향해 달려가는 어리석음과 무모함이었던 것이다. 그를 엄습한 것은 또 한 번의 좌절이었다. 그는 길을 계속 걸어갔다. 산을 넘어 결국 바다에 닿았다. 그 곳은 '공허'와 맞닥뜨리기 위한 장소였다. '공허'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아름다움과 신적인 것이 지나가고 공허와 무의미, 죽음만이 남겨진 자리에서도 그는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더욱 큰 허탈함만 가져다 주었을 뿐이었다. 이 때 주인공 '나, 영훈'은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여태 몰랐던 것, 애써 무시했던 것, 그래서 어떤 이데아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본능적인 것이었다. 살고자 하는 본능, 몸의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여기서 비로소 모든 것이 끝이 난다.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나, 자신이었다.

돌아가자. 이제 이 심각한 유희는 긑나도 좋을 때다. 바다 역시도 지금껏 우리를 현혹해 온 다른 모든 것들처럼 한 사기사에 지나지 않는다. 신도 구원하기를 단념하고 떠나버린 우리를 그 어떤 것이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갈매기는 날아야 하고 삶은 유지되어야 한다. 갈매기가 날기를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갈매기가 아니고, 존재가 그 지속을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존재가 아니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 사실 나는 아직도 절망을 내 존재의 출발로 삼을 만큼 그것에 철저하지는 못하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그 바닷가에서 확인한 절망은 내게 귀중한 자유를 주었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우리를 인도할 수 없다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의 손으로 넘어온 것이며, 우리의 삶도 외재적인 대상에 바쳐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서 시인되고 충만되어야 할 것이었다. ... 나는 생각한다. 진실로 예술적인 영혼은 아름다움에 대한 철저한 절망 위에 기초한다고. 그가 위대한 것은 그가 아름다움을 창조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도전하고 피흘린 정신 때문이라고 (212-213쪽)

이 여행길은 이렇게 끝났다. 절망 속에서 발견한 자아, 그 속에서 비로소 시작된 진정한 삶과 자유, 구원. 이 때문에 절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또한 그만큼 처절한 절망을 해 볼 필요도 있다. '젊은날의 초상'을 아름답게 그려낸 이유다. 진정한 삶, 아름다움을 향한 불가능한 도전이 이 속에 담겨졌기 때문이다. 일견으로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뭔지 모르게 아쉽다. 이상하게 2% 부족한 듯한 느낌이다. 이 커다란 자각을 향해 달려온 숨가빴던 이야기들이 어느 순간 낯설게도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자아'의 재발견, 조금은 오만한 듯한 깨달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가만히 보니, 이거 같다. 아름다움과 공허함의 끝자락에서 발견한 진정한 삶, 그러나 이 마저도 왠지 '허영'같이 들린다는 것이다. 어쩌면 주인공은 도리어 자아의 또 다른 '허영'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소설의 허구성을 인정하나 그 현실적 토대를 무시하지 못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또한 삶은 관념이나 이념을 뛰어넘어 마음을 향해 다가오는 진실한 삶에 더욱 쉽게 반응할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 '허영'같은 느낌은 삶의 현실적 토대, 삶 그 자체로 이야기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의 다른 말이 아닐지..    

(인용 페이지 수는 1995년 판본을 사용하여 기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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