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 강영안 양희송 2박 3일의 대화
강영안.양희송 지음 / 홍성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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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처음 일독한 책은 양희송 대표와 강영안 교수의 대화를 기록한 <묻고 답하다>이다. 내가 크게 정리해 두어야 할 내용은 다음의 것들로 보인다.

첫 번째는 신앙의 일상성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에게는 종교가 마치 비일상이고 초일상인 것처럼 생각되는 부분이 강하다’(60)그러나 사실 ‘종교도 일상을 벗어날 수 없다’(64) 중세에 비상한 삶을 만들었던 수도원 조차도 전혀 비상하지 않은 일상의 테두리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종교개혁은 여기서 신앙의 일상성을 재발견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와 칼뱅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일 뿐만 아니라 부르심, 곧 소명이라 보았다. 적어도 원칙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행한다면 일상적 삶이 거룩하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중세의 성속이원론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중요한 공헌이었다.’(66)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교회에서 여전히 부추기는 비일상이다. ‘비전’으로 ‘선교’로 제시되는 신앙의 모습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 강영안 교수의 대답은 기억해 봄직하다.

교회는 선교 비전만 비전인 것처럼 계속 이야기하죠. 외국 전도를 선교라고 부르니가 전도 중심의 선교 비전만 이야기할 뿐 일상을 변화시키자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거대담론, 이데올로기, 구호를 외치던 상황이 지나가고 포스트모던 현실에서 사소한 이야기를 빚어내고, 그 작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해요. 그런 이야기가 이어져서 하나의 퀼트를 만들어 내는 거지요. 큰 이야기가 동시에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최후 완성을 위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의 전망이 필요합니다. 전통적으로는 ‘계시사’라 불렀고 최근에는 ‘기독교 세계관’이라 부르는 그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에서 민감하고 섬세한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고, 만들어 가는 일도 필요하고, 이런 이야기를 모으고 방향을 보여주는 큰 이야기도 동시에 필요한 것이지요.(60) ... 이 하나님 이야기가 우리의 현실을 비범하게 만들지요. 일상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날마다 기대 가능한 새로운 현실입니다.(72)

두 번째는 목회자,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개신교에 대한 문제이다. 이 부분은 신앙의 일상성과 연장선에 놓여있다. 목회자와 교회가 신앙의 일상성 회복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목회자와 교회가 삶에서 어떤 영역을 차지하는지가 논의되었다. 먼저 ‘가톨릭 교회의 방식은 건축물에 비교된다. 상층부와 하층부로 나뉘는 것이다. 하층부는 세속 정부와 세속적인 영역, 상층부는 거룩한 영적 영역이다. 하부구조인 이 땅에 나름의 체제가 있기 때문에 그 사회의 전통이나 관습을 존중하는 동시에 교회 전통과 하나님의 율법도 지켜야 하는 것으로 보게 된다.’(77) 이에 반해 개신교 교회에서 목회자와 교회가 삶에서 차지하는 영역은 동심원으로 그려진다. 강영안 교수는 이를 이렇게 그린다.

저는 삶에서 교회나 예배가 차지하는 위치를 하나의 원이라고 생각해요. 큰 원을 그린 뒤, 중심에 작은 동심원을 그려 보세요. 큰 원을 우리 삶의 영역들이라 생각해 보지요. 그 안에는 정치, 예술, 문화, 학문, 스포츠 등이 다 들어갑니다. 중앙의 작은 동심원을 전통적 의미의 종교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 교회와 기독 공동체와 예배라고 부르는 삶이 속한다고 생각해요. 큰 원 안에 있는 정치, 문화, 예술 역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배죠. 변화된 삶, 거듭난 삶을 산다면 그것이 곧 예배이고 종교 행위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란 ‘세상에서 삶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떠받쳐 주는 예배의 의미가 있죠.(75) ... 앞서 이야기한 원의 모형에서 가운데 부분을 교회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가운데를 단순히 목회 영역이라고 하면 성도들이 배제되고 의미가 너무 좁아져 버립니다. 이를 가시적인 예배 공동체라고 표현해서 목회자들의 활동과 성도들의 활동이 공유되면 좋겠어요. 목회 영역을 왜 가운데 놓고 다른 모든 영역과 연관을 짓느냐면 결국 하나님의 일꾼으로 키움받은 성도들이 각 영역에서 주되심을 인정하고 섬기려면 교회 공동체에서 양육받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87)

세 번째는 (교회)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이다. 여기에는 딜레마가 있다. ‘개인성 인정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실제 발현될 때 발생한 문제는 주체를 중심에 놓고 벌어지는 타자화, 주변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 등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이 딜레마를 풀기 위해 홉스 같은 이들은 국가기구를 통한 평화를 제안한 것인데 이는 개인성을 극단적으로 수용한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강력한 집단주의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132) 한국 교회의 현실이 여기에 있다. 한국 교회는 극단적 개인주의, 곧 타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는데, 이것이 모였을 때 자기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극단화된 집단을 이루고, 그 집단의 유지를 위해 모든 것을 수단화하는 집단주의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140)

 

이를 극복하는 것은 한 가지이다. 자기 존재 유지 원리의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어야 함이 제시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바로 십자가이다. 그것은 존재의 근본 원리가 자기 존재 유지가 아니라 ‘타자를 위한 존재’라는 점을 근본적으로 드러낸 것으로서(140) 이를 회복하게 될 때, 개인과 (교회) 공동체는 그 각각의 고유성을 인정받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은 공동체가 될 수 없고 공동체는 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시 말해 비환원적 관계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하나가 되는 존재 방식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교회의 존재방식’(136)이 되는 것이다.

그 외에 신앙과 지성의 문제도 있으나 이 정도로만 정리해 두어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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