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살라 (양장) - 영적 성숙 유진 피터슨의 영성 5
유진 피터슨 지음, 양혜원.박세혁 옮김 / IVP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하나님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사랑 안에서 강해지는 것. 이것이 내가 다룰 주제다. "거룩함의 아름다움"이라고 어느 시편 번역본이 발하는 그것을 찾고 그것에 따라 사는 것. 우리의 정신과 영혼과 삶이 빚어지는 것.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는 것. ... 미국인들은(내가 보기에는 한국인들도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성숙이 일어나는 환경에 순응하는 삶을 잘 견디지 못한다. 성숙이 일어나는 환경이란 조용하고, 명확하지 않고, 인내해야 하고, 인간의 통제와 관리에 종속되지 않는 환경이다. 미국 교회는 그러한 환경에 처하면 불안해한다. 그래서 '현실에 참여한다'는 핑계로 미국의 지배 문화에 스스로 순응해 버리고, 머지않아 그 문화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비슷해진다. 말이 많고, 시끄럽고, 바쁘고, 통제하고, 이미지를 의식하는 집단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세속 사회가 교육과 활동, 심리적인 영역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교회의 목표가 된다. 인격 형성, 기도의 삶, 거룩의 아름다움과 같은 문제는 특수 목회나 단체에 위임되고, 교회 생활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것들이 중심을 차지하지 못한다. ... 우리는 진리를 위해서 싸우고,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 선한 일을 주장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동하는 일에 열정을 가진다. 그러나 진리와 선이 인간의 삶에서 드러나는 형태인 아름다움은 대체로 무시하고,아름다움을 꽂꽂이 장식가와 실내 장식가에게 맡긴다. ... 아름다움이 없으면 진리와 선이 담길 그릇이 없어지고, 형태가 없어지며, 그것을 인간의 삶에서 표현할 길이 없어진다. 아름다움과 분리된 진리는 추상적이고 혈색을 잃는다. 아름다움과 분리된 선은 사랑과 은혜가 없다. 이것을 일컬을 공식 용어가 필요하다면, '신학적 미학'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 무엇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성숙해질 수 있는 토대는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 살아계시고 현존하시는 예수님.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었고 우리의 견해와도 상관 없었던 예수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인식해야만 우리의 성장을 직접 책임지려는 태도를 극복할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자주 묵상해야 우리의 대화를 우리가 규정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언어로 축소하지 않을 수 있다. ... 부활을 살 때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큰 무엇으로 끊임없이 들어가게 된다. 부활을 살 때 우리는 살아계시며 현존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게 된다.  (들어가는 글에서)


유진 피터슨의 영성신학 마지막 권이다. 이로써 유진 피터슨은 영성신학, 영적 독서, 영적 리더십(제자도), 영성 지도(언어), 영성 형성(영적 성숙)이라는 일련의 논의를 마무리지었다. 이 책들은 내게는 잊지 못할 의미있는 책들이다. 마지막으로 달려온 영성의 형성과 성숙의 과제는 삶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을 유진 피터슨은 부활을 살아내는 것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 삶을 교회와 그리스도로 초점을 모두어 간다. 이 때 주목하는 것은 인간을 뛰어넘는 곳으로 들어가는 겸허함이다. 인간이 스스로 소유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에게 주어진 것을 발견하는 마음, 곧 선물과도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삶을 낭만화 시켜버리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삶을 규율로 조건화시켜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들이고 여기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시는 일상의 풍성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은 죽음의 세상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죽음의 나라에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생명을 끌어아는 일이다. 시간 안에서 영원을 사는 기적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이 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먼저 고백한다. 삼위일체가 하시는 일을 먼저 드러내고, 그 영광의 풍성함을 바라본다. 너무 큰 세상이고, 인간의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깊은 곳이다. 그런데 바로 그 속에 교회가 있고, 인간이 초대 받았다. 그 방식에 주목해야한다. 이 모든 과정은 "인격"으로 이루어졌다! 그 증거는 인간의 이름이다. '성도' 거룩한 백성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그것이다. 이 이름은 삼위일체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새로운 정체성이고, 그가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 부르심에 인간은 믿음으로 응답할 뿐이다. 여기서 인간에게는 '의도된 수동성, 의지적인 수동성'이 요청된다. 이 때 은혜는 일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율법도 그리고 인간의 단순한 자발성이나 자연스러움도 아닌 부활을 사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유진 피터슨은 이를 세속주의와 경건주의의 왜곡을 피해하는 길이라 말한다. 

성도라는 이름은 이제 그리스도인을 공동체로 초대한다. 은혜를 믿음으로 받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르는 성숙의 삶은 개인주의에 국한될 수 없다. 이미 모든 곳에서 활동하시는 삼위일체의 은혜, 그 일에 들어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흔히 혼자서 영적인 삶을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세상을 바꾸겠다고 투쟁하는 실용주의적인 삶도 여기서는 발을 붙이지 못한다. 여기서 익숙해지는 것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신 그리스도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가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엮어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개개인은 모든 주어를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한다. 이 때 우리는 '비인격화'의 유혹을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사물화, 대상화에 능숙하다.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방식은 '인격'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평화를 이루시는 방법, 그것은 그의 피, 그의 십자가였다. 예배는 이를 지키는 중요한 방편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더 큰 곳으로 들어간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머리와 몸으로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이해한다. 그러면서 더 큰 세계, 이미 삼위일체께서 이루신 세계, 부활의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곳이 다름아닌 일상의 삶 한 가운데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교회는 그 삶을 펼쳐내 보이는 중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적이면서 신적이다. 이 두 가지가 교회에 함께 존재한다. 이 둘을 분리해서는 교회가 교회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종교적 형식만 남게 되거나 비인격적인 과업들만 남게 된다. 이 위험은 상존해 있고, 교묘하다. 그래서 기도가 요청된다. 기도는 인격적인 언어이자 인격적인 관계를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을 그분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반응과 결합(247)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그리고 '속사람'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 즉 교회라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 분이 교회 안에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방식과 일치되어야 한다.(286) 여기서 부정적인 공간이 중요하다. 부정적인 공간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지 못한다.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정 뿐이다. 다만 부정의 역할은 주된 활동, 곧 하나님의 활동을 위한 여지를 마련하는 것이다.(299) 그렇게 하나님의 활동의 여지를 마련하며 살아내는 삶, 부활의 삶은 사랑과 예배로 이어지게 된다. 사랑은 하나님이 그 기원이며 예수님이 그 내용이고 성령이 그 동력이 되시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최고의 관계적 언어, 최고의 인격이기도 하다. 예배하는 것은 그 사랑을 살아내며 길러가도록 돕는다. 이제 가장 익숙한 장소에 이르게 되었다. 바로 가정과 일터이다. 그리스도의 풍성함, 그 광대함, 이 모든 깊이와 넓이는 이제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평범한 곳, 인간의 일상으로 펼쳐지게 된다. 교회의 크기와 깊이, 의미도 재확인된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늘과 보이는 땅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위한 무대(365)이다. 그리고 부활을 사는 새로운 삶, 그 중심에 있는 인격도 재확인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굳게 서는' 일이다. 악처럼 보이지 않는 악으로부터, 악으로 알아차리기 어려운 악으로부터, 인격을 비인격화시키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을 축소시키는 모든 악으로부터 '굳게 서는' 일이다. 그 길 또한 철저히 인격적이다. 일상과 초월을 넘나들면서 하나되게 하는 일, 영원을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일,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교회의 의미를 살아내는 일, 삶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일,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일, 그길은 곧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 은혜를 사는 것, 바로 부활을 사는 것이다. 에베소서를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 해준 유진 피터슨에게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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