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 본 슬픔 믿음의 글들 208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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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죽음, 그것은 분명한 실재다. 회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고통, 아픔, 이별이자 현실이다. 남아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죽음은 없다라든가 죽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32) 이유가 여기 있다.

2.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죽음 이전의 삶에서도 우리에게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한,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보다 더한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이 죽음 넘어에서도 이전과 같은 고통을 주시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49) 어쩌면 이것이 더욱 하나님의 일관성있는 모습 아닌가? 그렇다면 종교적 위안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는가?

3. C. S. 루이스는 여기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 속에서, 죽음 이전의 삶과 넘어를 다루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숨겨져 있는 ‘허상’을 말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죽음을 상상하는 살아 있는 자신이다. 그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사랑하는 이의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자신이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다시 돌아와 달라는 외침조차도 온전히 자신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자신이다. (65)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마찬가지다. 극심한 고통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내뿜는 증오와 같은 표현들도 결국은 자신의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곧 내가 참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4. 죽음과 같은 극심한 고통은 ‘사랑’과 ‘믿음’의 ‘허상’을 깨부수고 ‘진실’로 이끌어 주는 길이 된다. 자신이 정말 사랑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진정으로 믿은 것이 무엇인지. ‘과연 믿음 안에 상상 외의 다른 것은 없었는지, 사랑 안에 이기주의 말고 다른 것은 없었는지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66) 이토록 극단적인 고통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쪽이든 선택해야 한다. 고통은 여전히 일어나는 현실이다. C. S. 루이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게임에 돈을 걸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게임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분명 이와 같다. 하나님이든 아니든, 선한 신이든 우주의 가학적 신이든, 영생이든 비존재든, 그에게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 진지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다가 판돈이 엄청나게 높아져 마침내는 가짜 돈이나 푼돈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할 순간이 되어서야 얼마나 진지하고 심각한 사태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보다 덜한 상황에서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사람을 머릿 속 생각이나 단지 개념적인 믿음으로부터 흔들어 떨쳐 버릴 수 없다. 그런 사람이 정신을 차리려면 한 대 얻어맞아 멍해져야 한다. 오직 극심한 고통만이 진실을 이끌어 낼 것이다. 오직 그러한 고통 아래에서만 그는 스스로 진실을 발견할 것이다. 오직 고난을 겪음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의 가학적인 신이나 생체 실험하는 신 따위는 불필요한 억측에 지나지 않게 된다. (62)

5. 여기서 고통과 슬픔은 상태가 아닌 ‘과정’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은 닫힌 문에 부딪히지 않는다. 먼저 떠난 사랑하는 이를 바라 볼 때에도 더 이상 공허한 진공을 만나게 되지 않는다’ (90) 여기서 기도와 같은 생각이 다가온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C. S. 루이스의 말이다. 진실을 향해 가야 하는 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두려움과 희망.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 둘 사이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된다. 가녀린 인간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솜사탕 같은 나무도, 가시투성이 나무도 기어오르고 싶지 않다. 아주 다른 두 가지 확신이 점점 더 내 마음을 짓누른다. 하나는 하늘에 계신 의사께서 우리 상상력이 미칠 수 있는 한계보다 훨씬 더 무자비하시고, 그 수술은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생각. 그러나 또 다른 하나는 ‘잘 되리라, 다 잘 되리라, 모든 것이 형통하리라’ 하는 생각. (93)

그래서 기도하게 된다. 허상, 고통, 두려움, 진실, 형통함을 앞에두고 해야 할 기도, 할 수 있는 기도는 이것 뿐이다. ‘주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주를 사랑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감내하게 한다. 사랑은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하나님은 내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온전하게, 가장 사랑하길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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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톰 라이트 지음, 양혜원 옮김 / IVP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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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을 통해서 저자는 신약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믿었던 바를 재조명하여 그 내용을 다시 살려내고자 했다.'(11)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부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궁극적으로 어떤 희망을 주는 것인지, 그 희망이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게 하는지에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거기에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가 있다.

2. 신약성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죽음 이후, 영혼의 천국행을 보장하는 티켓이 아니다. 부활은 인간의 몸, 이 땅의 공간, 시간, 모든 물질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온전하게 덧입는 새 창조의 사건이다. 따라서 부활은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을 뜻하며, 부활은 '죽음 이후의 삶'이라는 일종의 중간 상태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 때 더욱 주목해야 하는 것은 현실이다. (물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복된 안식'과 '최종적인 상실'이라는 상반되는 영역을 제시한다. 이것은 연옥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신약성서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보다 궁극적인 희망으로서의 새 창조를 위한 '죽음 이전의 삶'에 더욱 힘을 쏟기 때문이다.

3. 현실은 부활의 첫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무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적인 미래의 희망을 오늘이라는 현실에서 이루어가는 소명을 부여받는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세계관의 변화와 직결되고, 삶의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의 변화와도 연결된다. 다분히 정치적이고, 사회, 경제, 문화적인 현상을 수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정의(특히 경제적 정의), 아름다움, 선교(전도)의 차원에서 접근하며 교회의 사명으로 설명한다.

4. 복음은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임을 새삼스레 다시 느끼게 된다. 이를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 살기 위해서는 믿음도 필요하고, 소망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하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톰 라이트의 글을 인용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앎'의 세 번째 요소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과학을 넘어서는,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유추해야만 이해가 되는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역사'를 넘어서는 당혹스러운 영역이다. (127)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에 제대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 연구를 더 큰 맥락, 개인과 집단 모두의 복합적 맥락 안에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 (130) 도마가 역사적 과학적 앎을 초월하면서도 포함하는 믿음의 인식론을 대변한다면, 바울은 희망의 인식론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보게 될 사람은 베드로다. 베도르는 역사적, 과학적 앎을 초월하면서 또 포함하는 믿음의 인식론과 희망의인식론은 사랑의 인식론으로 이어진다. (135) 부활은 원칙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탄생하게 되는 새로운 창조 세계의 결정적 사건이다. 우리가 이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는 것은 둘째치고 그것을 잠깐 보기만 하려해도 우리에게는 다른 종류의 앎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참여시키는 앎, 객관적 자세로 연구하는 유사 과학 연구의 냉정한 평가만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하는 인식론이 필요하다. 그러한 인식론을 가장 잘 요약해서 표한한 말이 ‘사랑’이다. (136) 사랑은 가장 깊은 앎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실재에 완벽하게 관여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샐재를 확인하고 축하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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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토리 The story
션 글래딩 지음, 신현정 옮김 / 죠이선교회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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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내러티브적 성경 읽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 개인의 이야기에만 함몰된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 위치한 개인을 살피는 일의 중요성을 진지하게 되물어 보게 했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래서 너무 간과해왔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면서, 책의 저자가 서문에 밝힌 것처럼 성경공부 시간에 함께 읽으며 나누어도 좋을 책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쉽고 재밌으며 의미도 나름 묵직하다.

둘. 구약 이야기와 신약 이야기의 설정이 흥미롭다. 구약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노인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 한 이야기마다 시편의 노래가 함께 들려진다. 신약 이야기는 복음을 공유하고 있는 이스라엘인의 에클레시아에서 새롭게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의 에클레시아로 하나님의 이야기가 전파되는 과정을 그린다. 역사적 배경을 쉽게 이해하게 해 주고, 그 중요성도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했다.

셋. 저자의 추천 도서 목록 가운데 한국어로 번역된 저서들을 보니 눈에 띄는 저자로 톰 라이트, 월터 브루그만, 유진 피터슨이 있다. 톰 라이트의 저서 중에서는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 < Jesus 코드>가 있고, 월터 브루그만의 저서 중에는 <창세기>, <예언자적 상상력>이 있으며, 유진 피터슨의 저서 중에는 <메시지>, <이 책을 먹으라>가 있다. 개인적으로 월터 브루그만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넷. 성경을 더 많이, 더 자세히 읽어야겠다!! 성경에 대한 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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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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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행복을 찾는다. 적당한 돈과 애정, 건강, 안락한 노후 등, 어찌보면 참으로 평범하다 싶은 것들이지만,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것조차 녹록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여기를 파고든다. 사람들이 찾고 구하는 그 평범한 행복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그리고 이 행복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며, 행복에 대한 답을 다르게 찾아 볼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저자는 모든 문제의 시작은 ‘자의식의 과잉’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근대 세계에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개인은 자유롭지 못했다.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신과의 관계인데, 예전에 사람들은 신과 연결되어 있었고, 신을 전제로 하였으며 그 아래에서 일정한 질서로 형성된 세계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근대가 되자 그 연결이 끊어지고, 개인은 자유롭게 방면되어 자유로운 의사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느긋하고 마음 편한 멋진 시대가 찾아왔다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근대 이후의 사람들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하는 자아와 관련된 것들을 일일이 스스로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기 때문이다.’(51) 이제 사람은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는 세속화된 근대 세계의 가장 본질적인 인간의 존재 방식이 된 것이다.(62)

 

고민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유대관계를 찾아야 했다. ‘자의식을 가진 자유로운 개인이 사회의 질서를 형성해 가기 위해서 찾은 것은 ‘사회계약론’이었다. 모두 자유로운 개인이 서로의 권리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은혜를 베푸는 관계를 맺자고 계약한 것이다.’(78) 이 때 사람과 사람을 결부시키는 인위적인 계약의 모델이 있었는데 그것이 시장경제의 교환관계였다.(79) 그러나 ‘이 경제시스템은 영리 추구와와 함께 팽창하면서 변형되고 말았다.(80) 자유경쟁의 규칙이 정당화되면서 우승열패의 가혹한 법칙이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패자는 철저히 세계 밖으로 쫓겨나게 되면서 소외되기 시작한 것이다.(37) 그 결과 자유로운 개인은 철저히 ‘외로운 존재’가 되었고, 흩어진 개인은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익명의 군중이 되었다.(81) 이러한 현상은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타인 지향형’의 개인을 만들어 냈다.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신경을 곧추세우게 되면서, 그에 따라 자기 의사를 결정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84) 이는 공공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익명의 불특정 다수 개인의 의사인 ‘시장’이 민주주의를 대신하게 만들었다.(86) ‘시장’은 그렇게 더욱 막강해 졌고, 자유로운 자아는 더욱 황폐해져 간 것이다.

 

평범한 행복의 불편한 진실은 여기에 있다. 그 행복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자유로운 자아는 자유경쟁의 사회 시스템 속에서, 더욱 큰 외로움으로 불안에 떨면서 황폐해져 간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의미의 상실과도 맞닿아 있다. 정말 살아야 하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것이 정말 사는 의미일까? 저자는 여기서 ‘믿음’을 제시한다. ‘인생에서 얼마간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람이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134) 정말 믿을 수 있는 것을 가진다면 그것은 ‘믿는 대상에 자신을 내 던지는 일이며, 그 대상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된다. 그러면 자기 안에서 헛돌기만 하던 고리를 끊고, 고독하고 불안하며 황폐한 세상을 살아갈 일말의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134) 행복에 대한 새로운 대답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러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저자는 첫째로 종교에서 찾는다. 과학이 종교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과학이 진정한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하며, 신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믿음, 의존심, 약함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142) 그리고 둘째로 저자는 인간 자신이 귀속하고 기반이 되는 원천에서 찾는다.(142) 자연, 가족, 지역, 국가와 같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모든 것은 그 실체가 이미 공허해진 상황에서 저자가 찾은 것은 다시 ‘개인’이다.(145) 여기서는 개인이 자신을 내던지고, 받아들이고 믿게 하는 곳, 개인의 공명이 이루어지는 곳이 중요한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저자는 진지함이라 말한다. 개인의 진지함, 적어도 불성실하지 않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의지할 것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148)

 

이 때 자유를 가진 인간이, 고뇌하는 인간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시장경제 속에서 경제적인 가치를 극대화 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고 사라져 버리는 인간이 다시 그 고유한 속성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것은 ‘일회성’과 ‘유일성’이라는 인간다움(167)이다. 인간다운 일회성은 시장경제가 강조하며 불안과 고독을 낳는 ‘미래’에 목을 매지 않고, 지금을 소중히 살아서 좋은 ‘과거’를 남기도록 한다. ‘유일성’은 둘도 없는 생명을 갖고 있고, 주장을 가진 개인, 누구라도 좋은 것이 아니라 대체할 수 없는 자신에 가치가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행복은 여기서 이미 다른 대답으로 바뀌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가치, 삶에의 태도에서 비롯될 수 있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생은 새로운 차원으로 펼쳐지게 된다. 새로운 차원으로 펼쳐지는 인생이 내던지는 다양한 물음 앞에서 진지한 개인으로 그 물음에 자신을 내던지며 책임을 지고 하나 하나 답해 가기 시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행복을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 저자의 마지막 대답을 적어본다.

 

행복은 추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노력해도 안 된다는 허무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도 괜찮다는 것. 지금이 괴로워 견딜 수 없어도, 시시한 인생이라도 생각되어도, 마침내 인생이 끝나는 1초 전까지 좋은 인생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 특별히 적극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특별히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당신은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 그러니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찾을 필요 같은 건 없다는 것. 그리고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담하게 쌓아 나가면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는 저절로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 등등. 이러한 ‘태도’가 아닐까요. 이것들은 우리가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경우의 ‘태도’입니다만,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는 어떤 사회나 세계를 바람직하다고 할까요. 그것은 ‘존엄’이라는 것이 의식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유일성’이나 ‘일회성’이 의식되는 사회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를 재검토 할 때 기본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19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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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하나님의 권위 - 톰 라이트, 성경을 말하다
톰 라이트 지음, 박장훈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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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는 이 책에서 성경이 그동안 어떻게 읽혀왔는지 그 역사를 살피면서, 오늘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말한다. 여기서 중심 논제는 성경의 권위이다. 성경의 권위야말로 성경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략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톰 라이트는 성경의 권위를 ‘어떤 방식이든 성경을 통하여 발휘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위’의 약어일 경우에만 기독교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전제한다.(46) 이 문구는 ‘하나님 자신의 권위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님이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임마누엘로서 가졌던 권위가 성경에 위임되어 중재됨을 나타내는 말이며, 이렇게 이해할 때만 비로소 기독교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뜻한다.(49) 여기서 ‘하나님의 권위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맥락 안에서 가장 선명하게 이해될 수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54) 이것은 이야기이도 하다.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는 이야기’로서(52), ‘창조세계를 휩쓰는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전능하신 통치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죄를 없애고 새 창조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62)이 그 중심에서 역동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삶에서 차지하는 성경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구약과 유대교의 맥락 속에서 성경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성경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이 누구인지 또 어떻게 하나님 나라와 목적들이 진행되는지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68)

 

셋째,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성경에 의해 빚어지고 형성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참 이스라엘이셨다.(80)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그 분의 백성 안에 그리고 그들을 통해 세상에 임하게 하는 일을 결정적으로 이루셨고, 그 절정에 이르게 하셨던 것이다. (80)

 

넷째, 초대교회는 구약을 읽으며 그 속의 이야기와 계명들 전부를 예수님 안에서 발견한 내용에 되비추어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했다.(81)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구약의 언약 이야기의 완성이자 실현으로, 그렇기 때문에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였으며, 교회를 탄생시키고 교회의 사명과 삶을 형성할 수 있는 창조적 능력으로 이해했다.(86) 따라서 그들은 구약성경에 대한 다층적이고 미묘한 차이를 살린, 신학적인 근거를 가진 해석 방식을 개발시켰다.(95) 그리고 새롭게 계시된 언약을 토대로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나갈 수 있었다.(105) 이것이 신약성서이다.

 

다섯째, 그 이후 2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성경 이야기가 지닌 유대교적, 이스라엘적 요소를 상실하면서 성경의 권위에 대한 개념도 이야기, 즉 내러티브의 맥락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목적인 하나님 나라의 차원과 분리되는 결과가 이어져 왔다.(115) 그 결과 역동성이 사라지고, 윤리적 지침서 혹은 경건 생활을 위한 영적 독서 차원의 교재로 취급되기 시작했다.(116) 톰 라이트는 그 과정을 성경 주해의 과정을 통해 증명한다. 중세의 알레고리적 해석, 종교개혁의 문자적 해석이 그것이다.

 

여섯째, 계몽주의의 도전은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이성의 역할이 극대화되면서 역사적으로 충실한 성경 해석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주장 속에서 중립적이지도 못하고, 객관적이지도 못한 연구를 통해 성경의 권위를 해체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151) 한쪽에서는 성경이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책으로 치부되며, 한쪽에서는 학문과는 상관없이 단지 개인적 경건의 도구나 영원한 구원에 대한 참된 교리의 교과서로서만 취급된 것이다.(155) 반면 이성은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성의 역할에 대한 무한 신뢰는 악의 존재 마저도 무력화시켰고, 세계의 운영권이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정치가들과 경제학자들의 수중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155)

 

일곱째, 포스트 모더니즘은 자신의 기반이 되는 계몽주의의 성공적 성취를 부정하면서 서구 체계의 경제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성경의 일부 텍스트가 제거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포스트 모더니즘적 성경 해석은 제국에 항거할 수는 있었지만 제국에 대해 항거하도록 도와주는 성경의 능력을 가져오지는 못했던 것이다.(171) 남은 것은 허무주의에 불과했다.(172)

 

여덟째,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톰 라이트는 그 대안으로 이야기, 내러티브적인 동시에 비판적 실재론적인 성경이해를 제시한다.(173) (그러나 비판적 실재론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이는 성경이해의 양극단에 빠지는 것이 아닌 통합적 견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나님 나라가 궁극적인 목표로서 자리잡고 있다.(196) 톰 라이트는 이를 위해서 교회가 일할 때 비로소 성경의 권위가 가장 충실하게 발휘됨을 강조한다.(198) 이 때 전통은 과거의 해석들과 대화하는 역할을 한다.(201) 이성은 컨텍스트, 의미, 모든 종류의 광범위한 지식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204) 그리고 신약과 구약을 아우르는 다층적인 견해가 필요하다.(206) 이것은 일종의 기독교 세계관이기도 하다. 또한 켄텍스트를 고려하면서, 예배의식에 기초하여, 개인적인 연구를 통해, 또한 적합한 학문의 도움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가 승인한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성경을 읽는 작업이 필요하다.(216)

 

이상의 내용을 볼 때 무엇보다 주목하게 되는 점은 이것이다. 내러티브적 성경읽기의 필요성이다. 이것은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로도 이어지는 부분이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시각을 확보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소극적으로는 기독교 변증에, 적극적으로는 선교에 임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자아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 세계가 안고 있는 파괴적인 문제도 외면할 수 없고, 상대화가 안고 있는 허무주의적 해체성도 외면할 수가 없다. 어찌되었든 자아와의 싸움은 피할 수가 없다. 아직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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