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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 본 슬픔 ㅣ 믿음의 글들 208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 죽음, 그것은 분명한 실재다. 회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고통, 아픔, 이별이자 현실이다. 남아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죽음은 없다라든가 죽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32) 이유가 여기 있다.
2.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죽음 이전의 삶에서도 우리에게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한,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보다 더한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이 죽음 넘어에서도 이전과 같은 고통을 주시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49) 어쩌면 이것이 더욱 하나님의 일관성있는 모습 아닌가? 그렇다면 종교적 위안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는가?
3. C. S. 루이스는 여기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 속에서, 죽음 이전의 삶과 넘어를 다루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숨겨져 있는 ‘허상’을 말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죽음을 상상하는 살아 있는 자신이다. 그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사랑하는 이의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자신이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다시 돌아와 달라는 외침조차도 온전히 자신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자신이다. (65)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마찬가지다. 극심한 고통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내뿜는 증오와 같은 표현들도 결국은 자신의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곧 내가 참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4. 죽음과 같은 극심한 고통은 ‘사랑’과 ‘믿음’의 ‘허상’을 깨부수고 ‘진실’로 이끌어 주는 길이 된다. 자신이 정말 사랑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진정으로 믿은 것이 무엇인지. ‘과연 믿음 안에 상상 외의 다른 것은 없었는지, 사랑 안에 이기주의 말고 다른 것은 없었는지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66) 이토록 극단적인 고통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쪽이든 선택해야 한다. 고통은 여전히 일어나는 현실이다. C. S. 루이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게임에 돈을 걸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게임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분명 이와 같다. 하나님이든 아니든, 선한 신이든 우주의 가학적 신이든, 영생이든 비존재든, 그에게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 진지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다가 판돈이 엄청나게 높아져 마침내는 가짜 돈이나 푼돈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할 순간이 되어서야 얼마나 진지하고 심각한 사태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보다 덜한 상황에서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사람을 머릿 속 생각이나 단지 개념적인 믿음으로부터 흔들어 떨쳐 버릴 수 없다. 그런 사람이 정신을 차리려면 한 대 얻어맞아 멍해져야 한다. 오직 극심한 고통만이 진실을 이끌어 낼 것이다. 오직 그러한 고통 아래에서만 그는 스스로 진실을 발견할 것이다. 오직 고난을 겪음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의 가학적인 신이나 생체 실험하는 신 따위는 불필요한 억측에 지나지 않게 된다. (62)
5. 여기서 고통과 슬픔은 상태가 아닌 ‘과정’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은 닫힌 문에 부딪히지 않는다. 먼저 떠난 사랑하는 이를 바라 볼 때에도 더 이상 공허한 진공을 만나게 되지 않는다’ (90) 여기서 기도와 같은 생각이 다가온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C. S. 루이스의 말이다. 진실을 향해 가야 하는 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두려움과 희망.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 둘 사이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된다. 가녀린 인간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솜사탕 같은 나무도, 가시투성이 나무도 기어오르고 싶지 않다. 아주 다른 두 가지 확신이 점점 더 내 마음을 짓누른다. 하나는 하늘에 계신 의사께서 우리 상상력이 미칠 수 있는 한계보다 훨씬 더 무자비하시고, 그 수술은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생각. 그러나 또 다른 하나는 ‘잘 되리라, 다 잘 되리라, 모든 것이 형통하리라’ 하는 생각. (93)
그래서 기도하게 된다. 허상, 고통, 두려움, 진실, 형통함을 앞에두고 해야 할 기도, 할 수 있는 기도는 이것 뿐이다. ‘주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주를 사랑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감내하게 한다. 사랑은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하나님은 내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온전하게, 가장 사랑하길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