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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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행복을 찾는다. 적당한 돈과 애정, 건강, 안락한 노후 등, 어찌보면 참으로 평범하다 싶은 것들이지만,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것조차 녹록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여기를 파고든다. 사람들이 찾고 구하는 그 평범한 행복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그리고 이 행복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며, 행복에 대한 답을 다르게 찾아 볼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저자는 모든 문제의 시작은 ‘자의식의 과잉’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근대 세계에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개인은 자유롭지 못했다.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신과의 관계인데, 예전에 사람들은 신과 연결되어 있었고, 신을 전제로 하였으며 그 아래에서 일정한 질서로 형성된 세계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근대가 되자 그 연결이 끊어지고, 개인은 자유롭게 방면되어 자유로운 의사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느긋하고 마음 편한 멋진 시대가 찾아왔다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근대 이후의 사람들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하는 자아와 관련된 것들을 일일이 스스로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기 때문이다.’(51) 이제 사람은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는 세속화된 근대 세계의 가장 본질적인 인간의 존재 방식이 된 것이다.(62)

 

고민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유대관계를 찾아야 했다. ‘자의식을 가진 자유로운 개인이 사회의 질서를 형성해 가기 위해서 찾은 것은 ‘사회계약론’이었다. 모두 자유로운 개인이 서로의 권리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은혜를 베푸는 관계를 맺자고 계약한 것이다.’(78) 이 때 사람과 사람을 결부시키는 인위적인 계약의 모델이 있었는데 그것이 시장경제의 교환관계였다.(79) 그러나 ‘이 경제시스템은 영리 추구와와 함께 팽창하면서 변형되고 말았다.(80) 자유경쟁의 규칙이 정당화되면서 우승열패의 가혹한 법칙이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패자는 철저히 세계 밖으로 쫓겨나게 되면서 소외되기 시작한 것이다.(37) 그 결과 자유로운 개인은 철저히 ‘외로운 존재’가 되었고, 흩어진 개인은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익명의 군중이 되었다.(81) 이러한 현상은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타인 지향형’의 개인을 만들어 냈다.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신경을 곧추세우게 되면서, 그에 따라 자기 의사를 결정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84) 이는 공공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익명의 불특정 다수 개인의 의사인 ‘시장’이 민주주의를 대신하게 만들었다.(86) ‘시장’은 그렇게 더욱 막강해 졌고, 자유로운 자아는 더욱 황폐해져 간 것이다.

 

평범한 행복의 불편한 진실은 여기에 있다. 그 행복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자유로운 자아는 자유경쟁의 사회 시스템 속에서, 더욱 큰 외로움으로 불안에 떨면서 황폐해져 간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의미의 상실과도 맞닿아 있다. 정말 살아야 하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것이 정말 사는 의미일까? 저자는 여기서 ‘믿음’을 제시한다. ‘인생에서 얼마간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람이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134) 정말 믿을 수 있는 것을 가진다면 그것은 ‘믿는 대상에 자신을 내 던지는 일이며, 그 대상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된다. 그러면 자기 안에서 헛돌기만 하던 고리를 끊고, 고독하고 불안하며 황폐한 세상을 살아갈 일말의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134) 행복에 대한 새로운 대답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러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저자는 첫째로 종교에서 찾는다. 과학이 종교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과학이 진정한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하며, 신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믿음, 의존심, 약함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142) 그리고 둘째로 저자는 인간 자신이 귀속하고 기반이 되는 원천에서 찾는다.(142) 자연, 가족, 지역, 국가와 같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모든 것은 그 실체가 이미 공허해진 상황에서 저자가 찾은 것은 다시 ‘개인’이다.(145) 여기서는 개인이 자신을 내던지고, 받아들이고 믿게 하는 곳, 개인의 공명이 이루어지는 곳이 중요한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저자는 진지함이라 말한다. 개인의 진지함, 적어도 불성실하지 않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의지할 것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148)

 

이 때 자유를 가진 인간이, 고뇌하는 인간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시장경제 속에서 경제적인 가치를 극대화 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고 사라져 버리는 인간이 다시 그 고유한 속성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것은 ‘일회성’과 ‘유일성’이라는 인간다움(167)이다. 인간다운 일회성은 시장경제가 강조하며 불안과 고독을 낳는 ‘미래’에 목을 매지 않고, 지금을 소중히 살아서 좋은 ‘과거’를 남기도록 한다. ‘유일성’은 둘도 없는 생명을 갖고 있고, 주장을 가진 개인, 누구라도 좋은 것이 아니라 대체할 수 없는 자신에 가치가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행복은 여기서 이미 다른 대답으로 바뀌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가치, 삶에의 태도에서 비롯될 수 있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생은 새로운 차원으로 펼쳐지게 된다. 새로운 차원으로 펼쳐지는 인생이 내던지는 다양한 물음 앞에서 진지한 개인으로 그 물음에 자신을 내던지며 책임을 지고 하나 하나 답해 가기 시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행복을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 저자의 마지막 대답을 적어본다.

 

행복은 추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노력해도 안 된다는 허무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도 괜찮다는 것. 지금이 괴로워 견딜 수 없어도, 시시한 인생이라도 생각되어도, 마침내 인생이 끝나는 1초 전까지 좋은 인생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 특별히 적극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특별히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당신은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 그러니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찾을 필요 같은 건 없다는 것. 그리고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담하게 쌓아 나가면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는 저절로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 등등. 이러한 ‘태도’가 아닐까요. 이것들은 우리가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경우의 ‘태도’입니다만,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는 어떤 사회나 세계를 바람직하다고 할까요. 그것은 ‘존엄’이라는 것이 의식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유일성’이나 ‘일회성’이 의식되는 사회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를 재검토 할 때 기본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19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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