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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안도현 / 열림원 / 2000년 3월
평점 :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며 이야기의 세계 속에서 또 다른 삶을 살고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책은 열일곱의 한 소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이 이야기 속에서 나의 열일곱을 떠 올려 보았다. 그리고 웃음 지어 보았다.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삶이라는 것은 그런건가보다. 보이지 않게 쌓여가는 그리고 알지 못한 사이에 달라져가는 몸과 마음 속의 흔적들.
저자의 후회대로 이 이야기에서는 가출, 부모님에 대한 원망, 오토바이를 통한 자유, 그리고 혼자만의 울음이 잔잔한 이야기로 묶여있다. 무언가 다른 돌파구를 찾아 헤메던 소년의 눈에 들어왔던 오토바이, 그리고 짜장면 배달, 한 여자아이와의 만남, 폭주로 비추어지는 질주, 되돌아오는 선택과 아픔, 이 가운데 소년은 성장한다. 특히 오토바이는 소년에게 있어서 유일한 자유였다. 짜장면 배달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오토바이였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아픔이기도 하다.
첫 번째 사고에서 소년은 자신이 들어야 할 꾸중을 대신 듣는 어머니를 보았고, 어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폭력을 보았다. 어머니의 무력함에 대한 원망은 곧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저항으로 표면화 되고,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원망은 곧 겉치레적이고 사회통념과 규정들에 대한 원망으로 표면화 되는 중요한 사고였다. 아픔이다. 두 번째 사고에서 소년은 열 일곱과의 작별을 고하는 눈물을 고한다. 첫 번째 사고 이 후 펼쳐진 열일곱의 삶, 원망과 가출, 뭔가 새로운 삶, 사랑, 무질서했던 자유, 이 모든 것들이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린 오토바이와 함께 또 다른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픔이다. 그리고 소년은 울었다.
나는 정말 거기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나를 받아 안은 가지보다 좀더 든든해 보이는 가지로 기어 건너갔다. 등을 기대고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자리가 잡히자 갑자기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슬픔이었다. 그래서 나는 울었다. 살아 있다는게 그렇게 두려운 적이 없었다. 또 그렇게 억울한 적도 없었다. 나는 철들지 않은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한동안 울고 나니까 마음이 좀 안정되었다. ...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혼자서 마음놓고 울어보지 못했고 나 자신 때문에, 남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 때문에 울어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막 허물을 봇고 최초로 내 목소리로 울어본 매미였다.
나는 그곳이 혹시 천국이 아닐까 싶어 코를 잡아당겨 보았다. 그러다가 감짝 놀랐다. 손끝에 미세하게 양파 냄새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양파는 가슴속에 아무것도 감추고 있지 않으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존재였다. 짜장면 속에 들어가서는 자기가 양파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대로 짜장면 냄새가 되는게 양파였다. 내 손끝에 남은 양파 냄새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었다. 그 팽나무 위에서 나는 두어 시간쯤 머물러 있었다. 햇볕이 따가울 때는 그 애가 준 선글라스를 끼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애 생각도 조금 했다. 그리고는 곧 그 애를 잊어버렸다. 내가 양파 냄새를 잊어버리듯이, 양파 냄새가 내 손가락을 잊어버리듯이. 아무도 내 옆에 없었지만 나는 외롭지 않았다. (pp. 119-120)
그러나 그 아픔은 삶에 대한 자각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두렵다는 자각, 아무도 내 옆에 없어도 외롭지 않은 자각, 삶의 일부가 되어 스며들어 버리는 자각. 보이지 않는 흔적처럼. 그리고 성장하는 것이다.
어른들이 만들어내고 규정시켜 버린 "자장면" 대신 "짜장면"을 먹고 싶은 마음을 불러 준 책..
참고. 부분부분 인용.
아무튼 좋다. 다만 평소에 여러분이 노랑머리 중국집 배달원에 대해 크게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리고 넘어가야겠다. 여러분은 중국집 배달원을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문제아로 본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말이다. 우리 나라의 모든 중국집 배달원들의 이름을 걸고 말하건대, 그들은 여러분이 걱정하실 만큼 문제적 인간이 아니다. (pp.27-28)
내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조금도 상상력을 발휘할 줄 모르는 미술 선생이 보기 싫어 그날 이후 학교 운동장이나 복도에서 그를 마주치게 되면 인사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술 시간이 되면 수업이 끝날 때까지 책상 위에 팔베개를 하고 엎드려 잠을 잤다. ... 내가 문제아라면 여러분 말대로 구제할 수 없는 문제아라면 그런 참회의 반성문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친구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걸어다는 찬 복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말이다. (p.35)
사고는 해수욕장 윗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일어났다. 돌이킬 수 없는 과오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오토바이 마그마는 그 마을 이름을 새겨놓은 길쭉한 바윗돌을 들이박고는 다시 고쳐 쓸 수 없을 정도로 조각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다른 데도 아니고, 하필이면 아버지의 애향심과 아이디어가 발동해 세워진 그 바위에다 말이다. (p.48)
편의점의 이 멋쟁이 노부부는 ... 꼭 짬뽕 한 그릇을 주문했다. 두 노인이 이마를 맞대고 짬뽕 한 그릇을 언제나 함께 드시는 것이다. 그 모습은 지금 상상해도 기분이 뿌듯해진다. ... 꼬끼리 편의점에서의 그 일 때문에 나는 참으로 중요한 삶의 비밀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인생이란 짬뽕 국물을 숟가락으로 함께 떠먹는 일이라는 것을 (pp.60-62)
"엄마가 친철하게 구는 사람을 조심하랬단 말이야! ... 아니긴 뭐가 아니야! 철가방은 짜장면만 갖다 놓고 가야 되잖아. 근데 지금 신발을 벗고 우리 집 식탁가지 걸어와 있잖아. 이런 철가방은 이제가지 한 번도 없었어! ... 노랑머리 철가방 꺼져!" ... 오해도 풀렸다. 하지만 내 기분은 영 개운치 않았다. 나는 그날 아이들 속에 숨어 있는 어른을 보았던 것이다. 아이들은 축소한 어른이었다. (pp. 80-81)
"나도 바닷가에 살고 싶어. 하루 종일 수평선을 보며 말이야." 그 애의 눈알이 금세 빨갛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후회하였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싶었다. 그런데 또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절거리고 말았다. "우리 엄마는 매일 수평선에다 빨래를 넌단다." "와, 참 멋있는 분이겠다. 그렇지?" 그 애는 박수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바다가 아름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 때라는 것을 그 애는 모르고 있었다. (p.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