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 역사의 가장 위대한 수수께끼를 추적한 BBC 다큐멘터리
톰 라이트 지음, 이혜진 옮김 / 살림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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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 한 편과 손 쉽게 읽을 수 있는 사복음서 개론을 한 편의 책으로 보고 읽은 듯한 기분이다. 도대체 왜 지금도 우리는 예수를 찾고 있고, 예수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그 질문에 대한 유용하면서도 도전적인 초대를 받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수는 그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복음서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이 만남은 당시의 사람들을 고려하면서 읽어내야 하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질문에 대한 유용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지점은 아마 여기까지이겠다. 그러나 이 정보들은 정보로만 그치지 않는다. 복음서의 이야기, 이 속에서 만나는 예수는 예수 자신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예수에 대한 심각한 사고를 요구한다는 것이겠다. 이 요구는 다름아닌 예수의 삶,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에의 동참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이기도 하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를 만나고 싶다면 저자의 목소리에 한 번 진지하게 귀 귀울여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첫째 복음서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읽으면서, 예수가 정확히 어떤 분이셨는지를 더욱더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둘째, 복음서의 첫 장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 읽으면서, 각 전도자가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복음서 각 권과 씨름해 보라. 복음서 기자의 최초 독자였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 처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 생각해 보라.
셋째, 복음서의 첫 장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 읽으면서, 제2, 제3의 질문을 해보라.
넷째, 복음서의 첫 장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 읽으면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리고 심도 있게 고민해 보라. 내가 그 장면 속의 군중이었다면 예수는 나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당신 편에서는 할 말을 다했다 하더라도 조급하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거나 그 장면에서 달아나 버리지 말라. 그 자리에 머물러 기다리라. 잠잠하라. 그리고 들어보라

그 자리에 머물러 기다리고 잠잠하게 들어보라는 저자의 말은 성서읽기에서 조차 교리로 먼저 틀을 갖다 대고, 피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때로는 너무나 노골적인 개개인의 감정이입 내지는 지나친 도덕 교훈 추출식의 방법에 익숙한 많은 독자들에게 (나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잔잔한 반성거리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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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먹으라 - 영적 독서 유진 피터슨의 영성 2
유진 피터슨 지음, 양혜원 옮김 / IVP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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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학문적인 언어와 목회적인 언어는 다소간에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둘의 차이에 대해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각각 그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현장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의 차이는 때로 갈등하기도 한다. 아니 서로에 대한 불신이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학문적인 언어(신학자들이라고 지칭해도 무난할 듯 싶다)의 자리에서는 목회적인 언어(목회자들이라고 지칭해도 무난할 듯 싶다)의 자리를 깊이 없고, 타협이 가득한 곳이라 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실일 가능성도 크다. 반대로 목회적이 언어의 자리에서는 학문적인 언어의 자리를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때로는 무시하며 현실을 모르는 상아탑의 언어라고 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또한 사실이다. 이 둘의 자리는 분명 서로에게 필요하며 서로를 상호 보완해야 하는 자리임에 틀림없다. 마치 초대교회 시절, 교부들의 시대에서는 목회자가 곧 신학자였고, 신학자가 곧 목회자였듯이 말이다.

유진 피터슨의 언어에서는 이 둘의 교차지점을 읽어볼 수 있는 것 같다. 신학적인 깊이를 확보하기 위한 책 읽기를 멈추지 않은 지속적인 노력을 한 흔적이 골골이 패어 있고, 목회적인 현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신학을 목회에 접목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경험한 과오들을 극복해 나가고자 했던 시도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 읽기를 '영적 독서'로 말하며, 성서를 개인의 수단으로 격화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대신, 성서가 자신을 드러내도록,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 참여하고 살아내기를 권고하는 그의 주장은 그래서 보다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성서 속으로 들어가는가, 성서를 인간 개개인 속으로 끌어들이는가? 이것은 인격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계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을 비인격화시키는가,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는가의 질문이다. 이를 경계하기 위해 '렉치오 디비나'의 방법을 제시하는 그의 주장은 충분히 숙고할 만한 내용이다. 은유의 세계, 이야기의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며, 대화함으로써 살아내는 성서 읽기는 성서를 먹어내는 유용한 방법이다. 글을 말의 세계로 옮겨내고 마침내는 몸으로 살아내는 번역의 작업은 기독교 신앙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매혹적인 작업이어야만 할 것이다. 신학은 목회와 연관되어야 한다. 목회는 신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살아내야 하는 삶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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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발돋움
헨리 나우웬 지음, 이상미 옮김 / 두란노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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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추구해야할 참된 자아상, 관계 공동체, 인격 공동체란 어때야 할까? 그 시작은 자아가 인격적으로 성숙해질 때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 자아가 진정으로 자아를 마주할 수 있는 고독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성숙해 지는 것이 그 출발이 되겠다. 이 때 자아는 타자를 인격적으로 존중할 수 있게 된다. 타자에 대한 진심어린 공간을 열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의 욕심을 버리고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가 필요없는 상태로 타자가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볼 수 있는 자유 공간을 생산해 낸다는 것이다. 신앙인은 여기서 하나님을 고백한다. 자아가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그리고 타자에 대한 적대심에서 환대로 전화시킨 이 지점은 실상 보다 새로운 만남, 본질적인 만남을 지향하기 위한 발돋움이다. 곧 하나님을 향한 영적 발돋움이라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기도라는 방법이 제시된다. 자아가 만들어내는 환상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움직임은 고독으로 향하는움직임과 따뜻한 환대, 곧 타자에 대한 진심어린 공간을 향하는 움직임을 뒷받침한다. 이 속에서 인간은 인간의 유한성을 확인하며 인간 안에서 호흡하시며 인간에게 내적인 생명으로 친교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이로써 인간은 거듭나게 된다. 인간은 이 길을 찾아나가야 한다. 비록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자기 나름의 길을 찾는 특별한 방법이 요구된다. 이 때 공동체가 중요하다. 인간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함께 참을 수 있으며 매일의 고난을 통해 자신의 환상을 기도로 바꾸어 낼 수 있는 토양을 제공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유한함을 자각하고, 계속해서 가난해 지는 것, 마음과 생각이 가난해 지고, 더욱 풍성한 생명을 갈망하는 것, 이것이 기도가 아닐까.

나는 마음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기도의 훈련이 보다 필요해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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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을 걸으라 (양장) - 제자도 유진 피터슨의 영성 3
유진 피터슨 지음, 양혜원 옮김 / IVP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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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유진 피터슨은 교리 신앙을 말하지 않는다. 진리로 일관되는 예수에 대해 잠시 쉬었다 간다. 그의 관심은 삶에 있다. 이 삶에 있어서 또 하나의 오해는 없어야 겠다. 그것은 교리 신앙에 입각한 청교도적 엄격함, 일종의 율법의식이 강조되는 금욕주의를 강조하는 삶이 아니다. 그 삶이 가질 수 있는 치명타는 인간의 공로 의식이다. 은혜와 율법 사이의 묘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자칫하면 율법으로 넘어가 죄책감과 정죄 판단을 위한 법전으로 급부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루터는 행위는 의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라 했다. 곧 은혜를 강조한 말이다. 어찌되었든 유진 피터슨이 말하는 것은 내가 이해하기에 어거스틴(몇개의 작은 논문을 맛보기 했고, 고백록을 읽었다)도 그랬고, 루터(역시 몇 개의 논문을 읽었고 지금 로마서 강해를 읽고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범위 내에서 이해한 바임을 밝힌다)도 그랬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엄격한 거리 인식, 곧 하나님을 인간의 사리 사욕으로 끌어내리는 것을 철저하게 경계하는 입장에서 말을 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적 판단에 입각한 삶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유진 피터슨이 관심을 두는 삶의 방식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에게로 향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예수가 걸었던 "길"이다. 길이 함축하고 있고 보여주는 상징성, 그 풍부한 의미에 주목하는 것이다. 다소 모호하고 애매하게 보일지 모르나 뒤엎서 생각해보면 더욱 풍성할 수 있는 은유에서 해답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 길 안에서 인간은 율법으로 정죄되고, 몸과 영혼이 철저히 이원화되고, 그에 따라 몸과 관련된 것들은 모든 것들을 죄악시 해버리게 되며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만 국한된 구원 개념이 강화되는 동시에, 내세적 종말론에 입각한 천국 개념과 같은 것들은 잠시 뒤로 물러나게 된다. 대신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인정하며 긍정하고 이 가운데 이 모든 한계들을 감싸 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길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창조와 성육신 안에서, 사건과 장소 안에서, 그리고 예수 안에서 작용하는 복음(p337)"이다. 

이 길은 예수 이전의 6명의 성서 인물들을 통해 더욱 풍성하게 그려지고 있으며, 이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던 1세기의 저명한 지도자 3명의 인물들을 통해서 더욱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이 길은 유진 피터슨의 표현대로 "포괄적이면서 복잡하게 얽혀 있고, 끈기있게 인격성을 견지하며, 사회성을 기꺼이 끌어안으며, 정치적 관계성을 끈질기게 고수한다. 곧 세상과 인간을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다름아닌 우리가 참여하는 길이다. (p23)"  이 길을 이끌어 나가는 중심 소재는 다름 아닌 성서다. 성서의 이야기들 속에서, 성서를 풀어내는 것을 통해서, 성서의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들을 마치 하늘에 풍성하게 날아다니는 비누방울처럼 끌어내고 터뜨려준다. 마치 움직이는 듯하게 말이다. 관념적 풀이가 아니라 이야기 듣기의 시간과 같이. 그래서 이런 책을 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나보다. 그냥 설교집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려운 용어들과 무수한 자료들을 탐독하며 정리해 내야 하는 논문집도 아닌 듯한 것이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일까.

읽어보고, 한 권 즈음 가지고 있어도 아깝지는 않은 책 같다. 유진 피터슨의 다른 책들에도 손이 가게 될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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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어거스틴의 고백록 - 개정완역판
성 어거스틴 지음, 선한용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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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한 번 읽고 나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기에는 그리 녹녹하지 않은 내용들이다. 뭔가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짧게 요약하는 것도 쉽지 않은 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적기 위해서 끄적거리는 것은 지금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나중을 위한 하나의 작은 노력, 습관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뭔가를 읽고 그냥 지나치는 것보다는 그래도 한 두자, 몇 마디 끄적여 놓는 것이 좋지 않겠나. 나중에 다시 읽어본 다음 이전의 생각과 비교해 볼 수도 있고.. 뭐, 요지는 되든 안되든 내 머리 속에 남기기 위한 하나의 작은 시도라고나 할까.

기독교 신앙으로의 회심에 이르기까지 어거스틴이 써 내려가는 자신의 이야기, 고백록은 어떤 사건과 사고를 중심으로 펼쳐가는 이야기의 전개라기 보다는 일련의 사상체계 확립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어거스틴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깊이있는 철학적 성찰을 통해 이해의 체계를 넘어 삶의 방식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고백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읽어보는 것이 고백록을 읽는 큰 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거스틴이 직면했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였던 극단적 이원론에 입각했던 마니교나 그가 기독교 신앙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도움이 되었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은 1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분명히 유효한 고민거리들을 기독교 신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꼭 체계적이지 않더라도,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나 생각들 가운데 부분 부분 자리잡고 있어서 묘한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선악의 문제, 하나님 이해의 이미지화 등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 신앙인들이 혼란을 겪기 쉬운 부분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회심을 따라간다면 이러한 혼란들 가운데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정립해 나갈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되물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단지 머리 속으로 이해되어지는 차원에서 머물지도 않게 한다. 그것은 어거스틴의 고민도 이해와 삶 사이의 갈등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적인 회심과 마음의 회심이 따로 구분되어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거스틴이 이해하면서도 그대로 살지 못해서 겪었던 부침들은 지금의 기독교 신앙인들에게도 분명 유효하다. 성서에서도 말하지 않는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 부침들을 극복하는 것은 결국은 자신의 몫이지만 타인의 경험을 반추하는 것은 아주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과정을 겪은 어거스틴은 책의 후반부, 특히 10~13권에서는 보다 깊은 사유의 세계를 펼쳐보인다. 선한용은 그의 소개문에서 10권에서는 기억의 신비를 논하면서, 현재의 자기 혼의 모습(의식)을 심층 분석하며 성찰하고 있고, 11~13권에서는 각각 시간론, 창조론, 창세기 1장에 대한 은유적(영적, 상징적) 해석을 함으로써 미래에 있을 인간의 영원한 안식을 말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뭐.. 참고하시길.

고백록에서 내가 주목하면서 읽었고, 또한 주된 내용이라고 이해했던 내용은 "하나님과 인간의 전적인 다름"이다. 그것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이다. 어거스틴이 고백한 내용의 중심은 다름아닌 피조물이 창조자를 피조물의 범위 내에 가두고자 한 것, 여기에서 오는 교만한 인간의 죄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그래서 후반부에서도 자세하게 다루어지지만 어거스틴이 공들여 설명하는 부분은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성이다. 이와 맞물리는 것이 은혜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잘 사는 것 같지만 그것은 정작 보이지 않는 죽음일 따름이다. 따라서 참 안식과 참 기쁨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나 그 기쁨을 누리 수 있게 되는 것은 인간을 죽지 않고 살려두시는 절대자 하나님의 은혜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간이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회개밖에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의 왜곡이라고 말하는 어거스틴에게서 악으로 넘쳐나는 세상, 그에 일조하는 인간 존재는 회개밖에 할 수가 없다. 이런 인간이 하나님께 붙어있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 스스로가 해 낼 수가 없다.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거스틴은 이런 유한자, 인간에 대한 긍정을 남겨둔다. 하나님께 이르는 통로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억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거스틴은 은혜를 따라 사는 삶의 노력을 언급한다. 어거스틴이 추구했던 금욕적인 삶은 은혜 위에 비추어져야 할 것이다. 은혜를 향한 삶은 은혜를 입은 인간의 노력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은혜 앞에서 인간은 고백할 수 밖에 없고, 고백은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한다. 그 은혜는 더욱 갈구하게 하는 은혜다. 삶 속에서 누리면서 살아가게 만드는.. 

구절 인용은 생략한다. 글 파일로 구절구절들을 입력했더니 거의 50여쪽에 이르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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