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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먹으라 - 영적 독서 ㅣ 유진 피터슨의 영성 2
유진 피터슨 지음, 양혜원 옮김 / IVP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학문적인 언어와 목회적인 언어는 다소간에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둘의 차이에 대해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각각 그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현장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의 차이는 때로 갈등하기도 한다. 아니 서로에 대한 불신이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학문적인 언어(신학자들이라고 지칭해도 무난할 듯 싶다)의 자리에서는 목회적인 언어(목회자들이라고 지칭해도 무난할 듯 싶다)의 자리를 깊이 없고, 타협이 가득한 곳이라 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실일 가능성도 크다. 반대로 목회적이 언어의 자리에서는 학문적인 언어의 자리를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때로는 무시하며 현실을 모르는 상아탑의 언어라고 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또한 사실이다. 이 둘의 자리는 분명 서로에게 필요하며 서로를 상호 보완해야 하는 자리임에 틀림없다. 마치 초대교회 시절, 교부들의 시대에서는 목회자가 곧 신학자였고, 신학자가 곧 목회자였듯이 말이다.
유진 피터슨의 언어에서는 이 둘의 교차지점을 읽어볼 수 있는 것 같다. 신학적인 깊이를 확보하기 위한 책 읽기를 멈추지 않은 지속적인 노력을 한 흔적이 골골이 패어 있고, 목회적인 현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신학을 목회에 접목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경험한 과오들을 극복해 나가고자 했던 시도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 읽기를 '영적 독서'로 말하며, 성서를 개인의 수단으로 격화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대신, 성서가 자신을 드러내도록,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 참여하고 살아내기를 권고하는 그의 주장은 그래서 보다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성서 속으로 들어가는가, 성서를 인간 개개인 속으로 끌어들이는가? 이것은 인격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계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을 비인격화시키는가,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는가의 질문이다. 이를 경계하기 위해 '렉치오 디비나'의 방법을 제시하는 그의 주장은 충분히 숙고할 만한 내용이다. 은유의 세계, 이야기의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며, 대화함으로써 살아내는 성서 읽기는 성서를 먹어내는 유용한 방법이다. 글을 말의 세계로 옮겨내고 마침내는 몸으로 살아내는 번역의 작업은 기독교 신앙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매혹적인 작업이어야만 할 것이다. 신학은 목회와 연관되어야 한다. 목회는 신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살아내야 하는 삶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