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어거스틴의 고백록 - 개정완역판
성 어거스틴 지음, 선한용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단지 한 번 읽고 나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기에는 그리 녹녹하지 않은 내용들이다. 뭔가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짧게 요약하는 것도 쉽지 않은 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적기 위해서 끄적거리는 것은 지금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나중을 위한 하나의 작은 노력, 습관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뭔가를 읽고 그냥 지나치는 것보다는 그래도 한 두자, 몇 마디 끄적여 놓는 것이 좋지 않겠나. 나중에 다시 읽어본 다음 이전의 생각과 비교해 볼 수도 있고.. 뭐, 요지는 되든 안되든 내 머리 속에 남기기 위한 하나의 작은 시도라고나 할까.

기독교 신앙으로의 회심에 이르기까지 어거스틴이 써 내려가는 자신의 이야기, 고백록은 어떤 사건과 사고를 중심으로 펼쳐가는 이야기의 전개라기 보다는 일련의 사상체계 확립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어거스틴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깊이있는 철학적 성찰을 통해 이해의 체계를 넘어 삶의 방식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고백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읽어보는 것이 고백록을 읽는 큰 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거스틴이 직면했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였던 극단적 이원론에 입각했던 마니교나 그가 기독교 신앙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도움이 되었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은 1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분명히 유효한 고민거리들을 기독교 신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꼭 체계적이지 않더라도,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나 생각들 가운데 부분 부분 자리잡고 있어서 묘한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선악의 문제, 하나님 이해의 이미지화 등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 신앙인들이 혼란을 겪기 쉬운 부분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회심을 따라간다면 이러한 혼란들 가운데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정립해 나갈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되물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단지 머리 속으로 이해되어지는 차원에서 머물지도 않게 한다. 그것은 어거스틴의 고민도 이해와 삶 사이의 갈등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적인 회심과 마음의 회심이 따로 구분되어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거스틴이 이해하면서도 그대로 살지 못해서 겪었던 부침들은 지금의 기독교 신앙인들에게도 분명 유효하다. 성서에서도 말하지 않는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 부침들을 극복하는 것은 결국은 자신의 몫이지만 타인의 경험을 반추하는 것은 아주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과정을 겪은 어거스틴은 책의 후반부, 특히 10~13권에서는 보다 깊은 사유의 세계를 펼쳐보인다. 선한용은 그의 소개문에서 10권에서는 기억의 신비를 논하면서, 현재의 자기 혼의 모습(의식)을 심층 분석하며 성찰하고 있고, 11~13권에서는 각각 시간론, 창조론, 창세기 1장에 대한 은유적(영적, 상징적) 해석을 함으로써 미래에 있을 인간의 영원한 안식을 말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뭐.. 참고하시길.

고백록에서 내가 주목하면서 읽었고, 또한 주된 내용이라고 이해했던 내용은 "하나님과 인간의 전적인 다름"이다. 그것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이다. 어거스틴이 고백한 내용의 중심은 다름아닌 피조물이 창조자를 피조물의 범위 내에 가두고자 한 것, 여기에서 오는 교만한 인간의 죄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그래서 후반부에서도 자세하게 다루어지지만 어거스틴이 공들여 설명하는 부분은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성이다. 이와 맞물리는 것이 은혜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잘 사는 것 같지만 그것은 정작 보이지 않는 죽음일 따름이다. 따라서 참 안식과 참 기쁨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나 그 기쁨을 누리 수 있게 되는 것은 인간을 죽지 않고 살려두시는 절대자 하나님의 은혜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간이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회개밖에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의 왜곡이라고 말하는 어거스틴에게서 악으로 넘쳐나는 세상, 그에 일조하는 인간 존재는 회개밖에 할 수가 없다. 이런 인간이 하나님께 붙어있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 스스로가 해 낼 수가 없다.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거스틴은 이런 유한자, 인간에 대한 긍정을 남겨둔다. 하나님께 이르는 통로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억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거스틴은 은혜를 따라 사는 삶의 노력을 언급한다. 어거스틴이 추구했던 금욕적인 삶은 은혜 위에 비추어져야 할 것이다. 은혜를 향한 삶은 은혜를 입은 인간의 노력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은혜 앞에서 인간은 고백할 수 밖에 없고, 고백은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한다. 그 은혜는 더욱 갈구하게 하는 은혜다. 삶 속에서 누리면서 살아가게 만드는.. 

구절 인용은 생략한다. 글 파일로 구절구절들을 입력했더니 거의 50여쪽에 이르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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