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 지음, 최원준 옮김 / 두란노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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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정도로는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관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말로 기다림의 능력을 과소 평가하지 맙시다. 사람이 고뇌하고 있을 때는 단 한 번의 눈짓이나, 단 한 번의 악수가 몇 년 동안 쌓아온 우정을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영원할 뿐 아니라, 눈 깜짝할 사이에 생길 수도 있습니다. (94쪽)

헨리 나우웬은 이 저서에서 현 시대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현 시대 속에서 시대의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직시하고 있다. 차분하고 조용하지만 내면을 깊이 돌아보게 하는 그의 이야기는 지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이면서, 신학적이면서도 목회적인 느낌을 가져다 준다. 그의 이야기는 그의 신학과 심리학, 그리고 그의 삶이 어우러진 솔직한 내면의 소리인 듯 하다. 특히나 한 사람, 한 인간에 대한 잔잔하지만 깊이있는 애정을 읽게 해준다. 그래서 더욱 읽는 이의 내면을 돌아보게 하고, 솔직하게 내어놓게 만든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다.  

가장 긴박하고 직접적인 일과 항상 일정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이 그에 빠져 드는 일이 없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그는 인간과 인간 세상이 지니는 진정한 아름다움, 즉 항상 다르고 항상 매력적이며 항상 새로운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합니다. ... 그는 자기 생각은 없이 좌절감만을 표현하는 사람들에 동조하기 위해 그들이 벌이는 시위에 무조건 동참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더 많은 사회적 안전 장치, 더 많은 경찰을 요구하며, 사회에 좀더 기강이 잡히고 좀더 질서가 다져지도록 계속해서 요구만 하는 일에도 쉽게 가담하지 않습니다. 그는 비판적인 눈으로 사태를 지켜보며, 명성을 얻으려는 욕망이나 거절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따라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저항하는 자들과 무사 안일주의자들 모두를 그들의 동기가 그릇되고 그들의 목표가 의심스러울 때 비판합니다. ... 그는 조작된 세계의 환상적 가면을 벗겨 버리고 실제 상황이 어떤지 보여줄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보로, 미친 사람으로, 사회에 위험한 존재로, 인류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의 비전으로 말미암아 그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할 수 있고, 어떤 위험이 따르더라도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소망과 약속의 표징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64-66쪽)

그의 글과 그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을 뛰어넘어 사는 사람들, 세상을 뛰어넘어 살지만 결코 세상을 등지거나 세상살이를 무시하지 않는 사람들, 초월을 추구하지만 내재 또한 고백하는 사람들, 개인적 고독을 추구하나 관계적 환대를 잊지 않는 사람들, 상처를 가지고 있으나 상처를 지우는 대신 상처의 굴곡을 직시함으로 치유의 공간을 열어내는 사람들, 비판적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신앙의 신비에 경외의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길이다. 이 저서에서도 (시대의 사역자, 그러나 여기서 내가 이해하기에는 특정한 사역자, 목회자만을 염두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라 지칭해도 무방하다.) 헨리 나우웬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자신의 상처를 온전히 직시할 수 있는 깊이 있는 영성과 그 영성에서 비롯한 겸손한 받아들임의 영성, 타자를 향한 환대의 넉넉한 공간을 가진 영성을 제시한다. 그 영성의 길은 세속적이지만 세속적이지 않다.구별되는 듯 하나 배타적이거나 강제적이고, 계급적이지 않다. 오히려 구별되나 관계하고 연대하며 포괄한다. 그리고 신뢰하며 끊임없이 나아한다. 상처 입은 치유자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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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알리스터 맥그래스·조애나 맥그래스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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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딜레마에 빠져있다. 자신을 절대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그리스도인 저자들과, 이에 못지 않게 자신을 절대 부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그리스도인 저자들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은가? 자존감에 관련된 문제들을 심리학적으로 식견있고 신학적으로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충분하고도 직접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이 바로 본서의 취지다. ... 그리스도인의 자신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지만, 현대 심리학의 일부 치료적 통찰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 본서의 논지다. ... 본서는 자존감과 관련된 심리학과 신학의 통찰을 유익하고 책임감있게 통합하려는 일관된 시도의 산물이다. ... 자존감이라는 특정 분야에서 신학과 심리학 사이에 진정 시너지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둘이 서로 어떻게 조명하고 있는지 이해함으로써 목회 사역에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믿음이다. (서문, 11-14쪽)

여러 가지 생각을 가져다 준 책이다. 먼저는 저자, 맥그래스의 신학적 노선, 신앙 고백의 성향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책날개의 저자 소개는 알리스터 맥그래스를 21세기 복음주의를 이끌고 갈 차세대 복음주의 사상사요 신학자로 말했다. 복음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현실적으로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범주 내에서의 의미를 본다면 흔히 말하는 보수적인 신학자로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나 싶다. 사실 신학은 모두 복음주의적인 신학이 아닐까? 신학에서 예수가 선포한 복음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이 어디 있겠나? 다만 복음에 대한 해석과 이해의 폭이 다를 뿐이지. 어찌되었든 복음주의라는 말이 사용되는 현실에서 그 언어의 뉘앙스는 상당히 폐쇄적인 듯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진보적 성향, 급진적 성향의 신앙 고백은 복음주의가 아니라는 식의 이해가 무의식적으로 전제되어 있기는 하다. 따라서 복음주의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보다 신중한 사용이 필요하다. 어찌되었든 복음주의 신학자라는 소개에서 실상 맥그래스는 보수적인 복음주의, 정통주의적 신앙을 변증하는 유형의 신학자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본 저서는 그의 신학적 입장을 아주 기본적으로 써 내려간 저술임에 틀림없다. 저자들이 신학과 심리학 사이의 일관된 통합이라고 말했지만, 전체적인 논조나 분위기를 볼 때 신학과 심리학의 동등된 통합이라기 보다는 신학이 보다 우위의 입장에서 심리학의 서술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일종의 근거처럼 활용한 듯한 인상은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존감에 대한 심리학적 주제들을 신학적 내용, 특히나 보수적, 정통적 입장에서 중요시 여기는 교리, 특히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재해석을 하는 결과를 낳은 듯한 느낌이다. 아마도 교리에 대해, 이러한 신앙적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과의 대화는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심리학과의 통합이라고 했지 대화라고 하지 않았으니 그리 큰 문제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 교리에 근거한 신앙 고백에 의문을 제시하며 심리학과의 관계 속에 무언가 다른 기대를 가지고 글을 읽게 된다면 그다지 새롭거나 깊이 있게 숙고할 만한 내용은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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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 박노자의 한국적 근대 만들기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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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사회를 지배하여 개개인에게 체제를 뒷받침할 '경쟁의 영웅'이 되게끔 강요하는 '힘'의 논리를 예쁘게 포장하는 군대, 스포츠, 종교 등 각종 담론들을 해부하여 그들의 '고상함' 뒤에 숨겨져 있는 진짜 내용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근대적인 군사 담론이나 스포츠, 기독교와 같은 대표적 '근대 종교'가 처음으로 들어온 개화기로 내려가서 그 담론들을 애당초에 만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했는지 파헤쳐야 한다. 이 책이 개화기에 초점을 맞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360쪽)

힘만 믿고 힘을 키워 남을 이기고 짓밟는 인간은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산의 고요함을 즐길 수 없을 것이고, 잎사귀의 속사귐을 들을 수 없을 것이고, 지저귀는 새들과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이다. '힘의 숭배'는 생명 파괴의 길이요, 죽임의 길일 뿐이다. 인간에게 삶을 구하려는 그리고 삶을 지키려는 본능이 있기에 이 사실은 결국 파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65쪽)

구한말, 시대가 바뀌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내렸으며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지금 우리가 꿈꾸고 기대하는 내일의 미래는 무엇인가. 과연 어떠한 내일, 꿈의 날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인가?  "근대성" 에 대한 논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우리가 선택하고 추구했던 근대의 모습이라는 것을 박노자는 "힘에의 의지" 라고 말한다. 하나,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적자생존 사회로의 진입을 추구하고 추구해야만 했던 우리의 근대, 더불어 자본의 논리에 매몰되어 서구 열강의 나라들과 같은 근대 민족국가의 반열로 들어가고자 안간힘을 썼던 우리의 근대, 한편으로는 열등의식이 감추어진 욕구의 발현으로서의 근대, 그러나 정작 누구를 위한 근대였는지. 두울, 진정한 인간 개개인의 가치와 소중함을 무시당한 채 국가라는 것, 발전이라는 개념에 얽매여 희생이 강요되었던 시대로서의 근대는 아니었는지 한 번 되짚어 보다.

진정한 "근대" 또한 "탈근대"라는 거대 담론적 논의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 속에서 "나의 자아"가 살아 숨쉬며 활짝 웃을 수 있는지, 그러지 못한다면 과연 내일을 열어가는 노력과 시도를 어떻게 작게라도 이끌어 갈 수 있는지, 생각과 배움의 실천적 현실화에 대한 작지만 깊이 있는 파장을 남겨주다. 자본주의의 극대화, 민족주의의 극대화, 인종주의의 극대화. 국가주의의 극대화. "근대".. 이것이 바로 폭력의 세기였다. 나의 내일은??  우리의 내일은?? 역시 폭력의 세기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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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1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2
금난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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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삶은 그가 속해 있는 사회 분위기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예술작품은 그것을 창조한 예술가의 삶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것..  (90쪽)

밤 새워 대학원 세미나 발제문을 써 내려간 다음 날 오후, 무작정 한 카페에 들어가서 집어들고 읽었던 책. 마치 뭔가 다른 것을 마음 편안하게 쉽게 읽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아서, 마음을 달래 줄 수 있는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생각으로 선택했던 책. 음악을 모르는 문외한인 내게 첫 삽을 뜨게 해 준 책. 각 장이 긑날 때마다 저자가 추천해 주는 음악가들의 작품을 발견하는 쏠솔한 재미를 안겨다 준 책. 한 사람과 그 사람이 살았던 삶의 시간과 공간을 모른다면 그 사람의 글도, 그 사람의 그림도, 그 사람의 음악도 제대로 알 수가 없다는 걸 다시 읽게 해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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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 기념시선집 창비시선 300
박형준 외 엮음 / 창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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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창비시선 300번을 맞아 '사람'을 주제로 선택한 것은 시가 대화여야 한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난 이래로 타인과 교류하면서 생성된 또다른 자아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공동체를 이루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주체를 만들어갑니다. "시인의 기능은 시적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 속에 그것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발레리) ... 즉 하나의 개성이 아니라 다양한 개성 속에서 우리들이 만지고 보는 사물과 만나는 인간들이 다른 깊이를 가지고 있음을 느기는 것, 그렇게 생성된 리듬이 시적 대화의 출발입니다.   - 엮은이의 말 (154쪽) -

어린 시절 외할머니를 통해서 듣던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이야기 하나에 울고 웃고 즐거워했던, 그리고 잠을 청했던 시절... 그러나 어느 순간 삶 속에서 이야기가 사라져 버렸음을 문득 떠올린다. 마음을 달래주고, 마음을 녹여주고, 마음을 이어주는 이야기 대신에 차갑고, 계산적이고, 이해타산적이고, 위선적인 말들의 묶음이 난무하는 지금이다. 이러한 말들 가운데서 휴식처를 얻기란 그리 쉽지 않은 법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어보일 만한 공간,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할 만한 공간 더불어 타자의 존재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만한 공간이 자리하기에 턱없이 비좁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던 이유는 이러한 공간의 턱없음과 크게 대조되면서 외할머니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고, 나와 외할머니가 함께 자리하는 공감의 큰 공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직 시를 많이 접해보지는 못했지만, 시를 읽는 다는 것은 짧은 이야기들을 작은 노래처럼 들어보면서 최소한의 공간을 내어보도록 하는 작은 출발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짧은 언어에 담긴 긴 여운을 듣기 위해서는 빠르게만 스쳐 지나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울고 웃으며 아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그 공간에로의 참여는 삶에의 대화, 결국 나를 보게 하면서 동시에 타자를 보게 하는 감정적 공감대를 이어주고, 보이지 않는 느낌, 그 말없음의 이야기를 활짝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사람'을 주제로 엮어놓은 시들을 통해 이러한 느낌을 조금이나마 가질 수 있다면 큰 소득이 아닐 수 없다. 또하나의 소득이 있다면 여러 시인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알지 못했던 시인들과의 만남을 열어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저 느낌 와 닿는대로 그 시인의 대화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다면 또 하나의 이야기를 얻는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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