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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얘는 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 "농담?" "그래, 농담이지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거, 그거 농담 아니니? ... (142쪽)" "텍사스에도 파리가 있냐?" "없지. 사람들은 다들 이 세상에 없는 데를 가고 싶어해." "그럼 느네 집도 거기 있게꾸나. 그리고 날 보내줘" "취했어, 가봐. 차 태워줄게.(312쪽)" 어쩌면 사람은 현실을 살고 있지만 그보다는 알수 없는 그 어느 곳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들으면 즐거운, 그걸 철썩같이 믿는다고 해도 절대 손해를 입지 않는, 어쩌면 여분의 보험과도 같은 것 말이다. 때로는 그 보험이 과하게 될 때 현실과의 경계가 모호해질지도 모르겠다. 현실과 현실 너머의 어느 곳 사이의 경계선이 갖는 긴장관계다. 그 속에 인간의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 현실에 있지만,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그러나 현실은 벗어날 수 없는 그래서 갖게 되는 모순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모순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빈이 현금을 향하는 마음과 아내와 가족을 향하는 마음의 이중성, 그 속에서 팽팽한 긴장관계를 형성하며 둘을 지탱하는 허구적 가족 관계는 아마도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또하나 그 모순은 돈을 통해서 더욱 무지막지하게 드러난다. 어쩌면 사람보다 돈이 더 무서운 것 같기도 하다. 돈이라는 것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느순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경호의 죽음은,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면서 알면서도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영묘는, 그 모든 허울 마저도 돈으로 해결해 버린 영빈의 형은 이미 돈 앞에서 인격을 상실해 버린 듯한 사람의 모습을, 반대로 돈의 절대적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내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모순 속에 깊이 빠지면서 더욱 거짓말이지만 듣기 즐거운 농담같은 이야기를, 보험과도 같이 든든한 그 어떤 것을 기대하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삶은 살아가야하는 현실일텐데, 사람도 그리고 돈도 그 현실을 잊게 만들어 버린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래서 농담과도 같은 이야기를,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닌 듯 하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뭔가 그 곳을 넘어서는 것을 바라봐야 하지 않겠는가. 빨간 능소화의 생명력이 그것이라면 그 생명력의 모습을 한 번 눈여겨 봄직도 하다. 갑작스러운 현금의 변화가 그리 쉽게 납득이 가질 않지만, 삶은 이미 납득할 만한 이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법. 그래서 한 번 가능성을 찾아보아도 좋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