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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단편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평점 :
오늘날 체호프는 기 드 모파상과 함께 현대 단편소설의 형식을 확립한 가장 중요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특별히 놀라운 사건을 도입하기보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설정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 사건이 있더라도 그 자체의 외부적인 측면보다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다양하고 모순된 반응에 주목한다는 점, 대체로 매우 느슨한 플롯인데다가 그 결말이 미결정의 상태로 끝나고 주인공들도 이에 대해 어리둥절하고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는 점, 등장인물들 간의 의사소통의 단절 등 여기서 이루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이런 체호프의 특징들은 현대 단편소설의 출현을 예고하는 핵심적인 징후들이기도 하다. ... 체호프는 한없이 차갑지만 따뜻하고 단호하지만 부드럽다. 그의 익살 뒤에는 천근 같은 우수가 기대어 있다. 그의 페시미즘 속에는 질긴 낙관이 숨쉰다. 그의 비밀은 가장 단순하기에 결코 알아낼 수 없다. - 작품해설, 현대 단편소설의 완성자 체호프, 191-192쪽 -
체호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마치 삶의 속내를 엿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삶의 짙은 그늘을 여지없이 그러나 아주 무덤덤한 듯 보여주는 그의 이야기는 도리어 그 삶에 대한 진한 여운을 드러내는 듯 했고, 삶의 아름다움을 즐거이 노래하는 그의 이야기 속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겹쳐지며 한 쪽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죽음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차갑도록 냉정하게 이야기의 끝을 내는 그 결말은 인간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가벼운듯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하게 드러내며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하게 한다. 때로는 그 끝이 한 개인의 알 수 없는 마음의 문제인 것처럼(관리의 죽음), 때로는 미처 깨닫지 못한 사소한 행복을 잃어버린 막심한 후회인 것처럼(베짱이), 때로는 나로 인해 일어난 너무나 가슴아픈 불행인 것처럼(티푸스), 때로는 삶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풀어내는 실타래처럼(주교) 말이다. 그래서 삶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통찰은 날카롭다. 특히나 삶을 살아가는 가장 구체적인 실존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의 세계, 심리적 상태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어 때로는 흠칫 나 자신의 이야기인양 놀라게 된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몽환의 세계 속에서 인간의 처절한 욕망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작은 몸짓과 말 한 마디에서 인간 군상의 실재를 재현하며,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 세상의 얽힘을 보여준다. 이 삶을 무덤덤히 살아가는 것, 아둥바둥 무언가를 쫓고 무언가에 쫓기며 허우적 대는 것, 그러나 무언가를 꿈꾸고 갈망하는 것, 그 모든 이야기 속에는 바로 나도 있었다. 그렇다면 또 질문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삶은 무엇인가? 삶의 진정한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