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소설로 그린 자화상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는 "자신의 말"의 지면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교정을 보느라 다시 읽으면서 발견한 거지만 가족이나 주변인물 묘사가 세밀하고 가차없는 데 비해 나를 그림에 있어서는 모호하게 얼버무리거나 생략한 부분이 많았다. 그게 바로 자신에 정직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한계를 스스로 말하고 있음에도 작가는 이 이야기는 자화상을 그리듯이 쓴 글이라고 말했다. 이 부분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우리 가족에게 참아 내기 힘든 가혹한 고통의 시기가 닥쳐왔다. (253쪽) ... 그들은 마치 나를 짐승이나 벌레처럼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돼 주었다. 벌레처럼 기었다. (254쪽) 다행히 그들은 빨갱이를 너무도 혐오했기 때문에 빨갱이의 몸을 가지고 희롱할 생각은 안 했다. ...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신이 들곤 했다. (255쪽) ... 그 때 문득 막다른 골목가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269쪽)"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그것이 한계에 봉착하고, 정직하기 어렵더라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서 발견된다. 그것은 자신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제한이 있을지언정 완전히 감추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있는 힘껏 드러내 보이는 것, 가장 수치로운 순간 마저도 감추지 말고, 진정한 공포는 망각에서 온다는 것을 기억함으로써 최선의 증언을 선택하는 것, '벌레'로서의 삶을 보임으로써 '벌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자신을 살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생명과 삶 속에 자리잡은 역설과도 같은 진실이 아니겠나.

이러한 작가의 흔적은 이야기에 흠뻑 젖어들게 만들었고 그 속에서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 벌레같은 삶의 모습을 넘어선 주옥같은 삶의 모습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행복함 속에서 함께 웃고, 그녀의 슬픔 속에서 함께 울게 만들었다. 박적골의 이야기는 싱그러운 싱아를 찾아 맛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일제 시대의 암흑기와 해방기, 전쟁기를 거치는 시공간 속에서 들려진 이야기는 아린 가슴을 더욱 아리게 했다. 무엇보다 그녀를 '벌레'로 만들었던 해방과 전쟁기의 이야기는 읽는이로 하여금 그녀가 어서 그 곳을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읽게 했다. '순진하지만 허약했던' 오빠를 통해 자연스럽게 접했던 급진적인 사상,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서 그것의 "황폐의 극치(248쪽)"를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며 지쳐 나자빠졌던 그녀, 죽음이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삶의 깊이가 매몰되고 단순한 흑백논리와 미치광이와 같은 광기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 그 모습을 읽는 것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희망을 찾는 절망과도 같았다. 이 가운데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버린 그녀의 마지막 순간은 그래서 더욱 가슴에 와 닿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조목조목 하나 하나 말해줄 수 있는 작가의 "기억과 묘사"는 놀라웠다. 아니 그와 더불어 그것을 "상상"으로 엮어가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상상이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대면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사실성을 더했다. 그리고 희망을 현실화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감동을 더했다. 그녀의 이야기에 귀울 기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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