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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양장) - 버려서 얻고 비워서 채우다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 7
노자 지음, 김원중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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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71장 知不知上, 不知知病의 해석에 대단히 실망했다.

두 구절은 서로 대조대구되었으니, 그 내용이 다를 지언정, 같은 구조, 형식의 문장이다. 그러니 전구를 뒤의 不知를 목적어로 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不知)을 아는 것이(知) 최상이라(上)" 풀이 했다면, 뒤구 역시, 知를 목적어로 하여, 같은 형식으로, '아는 것을(知) 알지 못하는 것이(不知) 병이다(病)' 풀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 책은, 유독 후자의 경우는, '알지 않는 것을 안다 [말]하는 것이(不知謂知) 병이라'고, 전구와 달리, 그 순서를 거꾸로 풀어 내용으로는 사실상 전구와 같은 뜻이다. 그리고 이를 모면하기 위해, 똑같은 不을 놓고도, 전구에선 '못한다'고 풀고, 뒤구에서는 '않는다'고 다르게 푼다. 그래도 부족하기에, 뒤구에서는 원문에 없던 '말한다(謂)'와 같이 노자가 말하지 않은 의미까지 덧붙이고 있다. 그러니 이는 '직역'이 아니다. 

기존 판본으로 보면, 전구는 왕필 주를 따른 것이고, 뒤구는 하상공 주를 따른 것으로, 원문의 어의를 살리기 보다는, 그냥 각기, 보고 싶은 대로 짜깁기해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오강남 교수 풀이에 이런 식의 '절충'이 있어, 눈 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종교학자고, 전문적인 한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그냥 지나쳤는데, 한학자 마저, 문외한과 똑같이, 이런 식으로 푼다는 건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이렇게 풀려면 아예 하상공 주를 그대로 따라, '알면서도, 알지 않는다고 말하면 최상(知, 不知, 上)이고, 모르면서도, 안다 말하면 병이라(不知, 知, 病)'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물론 이는 노자의 뜻이 아니라, 하상공이, [논어] 위정편에서, "알아지는 것이면, 알아지는 것이라 하고(知之, 爲(謂?)知之) 모른다면, 모른다 하는(不知, 爲不知), 이것이 안다 함이라(是知也)"던 공자님 말씀을 따라, 모르면서도 아는 체 함을 경계하고자 한 풀이이긴 하다.

그렇다고, 모두 왕필 식으로 풀자면, 이 구절들은 또 서로 모순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모르는 것을 아는 것(知不知)'이나, '아는 것을 모른다는 것(不知知)'은 결국 모두 '모른다는' 뜻으로, 겨우 그 순서가 다른 것으로, 하나를 최상이라 하면서 다른 하나를 질병이라 할 만한 근거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왕필 역시 뒤 구절에만 주석을 붙여, "앎이 (어떤 일을) 지탱하기에 부족한 것을 알지 않으면, 곧 병인 법이라 함이라"고, 즉 앎의 한계를 지적하여, 안다는 것 역시 거의 모름이라, 결국 모름을 모른다는 뜻으로 풀이하여, 이러한 모순을 피하고 있다.

따라서, 다시 노자 판본 비교로, 노자의 원의를 찾으려 했다면, 마땅히 '백서 갑 본'으로 돌아가, "모름을 알면(知不知), 바람직함이 아닌가(尙矣), 모름을 모르면(不知不知) 병이 아닌가(病矣)"라 풀어, 노자 원본이 무엇이고, 노자의 진정한 메세지가 무엇인지를 밝혔어야 했다.

그러니 이 책은, 본장에 대해서는 직역도 아닌데, 논리적 모순을 밝히지 못하여, 철학적 해석도 아니고, 공자에 편향되었으니 객관적이지도 않고, 문자학적의미는 살필 필요도 없었는데 판본상 이설을 교감하지 않았으니 문헌학적 의미를 종합판단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대구를 무시했으니, 문맥을 살핀 것도 아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고,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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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문헌을 통해서 본 중국 고대 사상 - 마왕퇴 한묘 백서와 곽점 초묘 죽간을 중심으로 심산학술총서 19
김경수 지음 / 심산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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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이 생긴 연대, 그리고 각 문헌들의 연대 추정에 이르기 까지..  

이 책은 명확한 근거를 찾지 않고, 고대 문헌 사이를 헤매는 느낌을 준다.  

이를 테면 무덤의 연대는 거기에 소장된 문헌들과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소장된 문헌들은 곧 바로 저자가 직접 쓴 저술이 아니라,  

대게는 필사본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연대는 무덤의 연대 뒤일 수 없을 뿐, 

그 앞으로는 거의 무한대로 펼쳐져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마치 요즈음에도 고문서를 수집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 같은 무덤에 발견된 책들간의 관계도 별로 없을 수 있다. 즉 어총과, 

노자 초간의 연대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며  

그것은 모두 필사본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논의들을 쓸데 없는 것일 수 있다.  

즉 왜 무덤이나 각 책들에 대한 탄소연대측정법에 의한  

과학적인 연대 추정이 보고 되고 있지 않은 지. 

이는 아마도 모든 불필요한 논란을 불식시킬 수 있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초간의 글자체들은 명확히 초국문으로,  

고문예서로 쓰인 백서에 명백히 앞선 것인데,  

특히  노자의 경우에는 기존 도덕경의 축약본이라는 영 근거 없는 주장을 되뇌이고 있다.  

즉 먼저 있었던 책이 나중의 나온 책을 축약, 요약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객관성을 가지려면,  

명확히 초국문으로 된, 기존 도덕경과 유사한 판본이 발견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정작 초국문으로 된, 혹은 백서로 된 원문의 고석, 혹은 변석에 기초하지  

않고, 막연히 그 내용이 현재의 통용본과 같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이런 저런, 추론을 하고 있는, 사상누각으로 보이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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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그 선의 향기
노자 지음, 감산덕청 주석, 심재원 옮김 / 정우서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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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번역만 보자면, 20년 전에 나온 오진탁의 감산노자 풀이에 한참 미치지 못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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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연재 2014-01-30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그 정도는 아니다. 번역 글투가 매끄럽지 못한 건 있지만 오진탁보다 못하다니? 오진탁 번역을 원문과 비교해 보라 직접. 못 읽는다.
노자철학개념의 번역어를 순우리말로 하는 독창적 시도가 있어서 기존번역에 익숙한 사람은 이게 뭐지 할 것이다. 한참 미치지 못하다고 말한 사람은 죽 보니까 철학을 잘 모르고 그런 느낌을 받았나 본데. 오씨 거 보다 2배는 좋은 번역이다.

노자읽기 2014-09-10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노자 철학 원문(죽간, 백서)으로 보면, 도덕경이 위작서고, 그에 대한 명대 감산주석은 한 참 빗겨나 있습니다... 불교에서 본 노자 정도의 의미일 것입니다...
 
노자 강의 - 묵점 기세춘 선생과 함께 하는
기세춘 지음 / 바이북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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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작년에 출간된, 강신주 [장자와 노자]와 비교된다. 두 분 다 어찌 보면, 장자로부터 노자로 거슬러 간 격인데, 그 결론은 사뭇 상반된다.

강신주씨는 장자와 비교하여 노자는 국가주의적이며, 심지어 파시즘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기세춘 선생님의 견해는 '반문명, 반체제의 저항문서'란다. 동일한 대상을 놓고 전혀 상반된 해석이 존재하는 '기현상'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강신주씨나, 기세춘 선생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초간 노자를 제외시켜 놓고, 도덕경과 백서 노자를 함께(어떻게, 결합, 발췌, 절충?) 본 끝에 전혀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강신주씨의 경우는 장자 이후 전국 말에, 노자가 출현하여 노자가 장자를 부인했다는 입장에서, 춘추말 혹은 전국초에 성립했다고도 볼 수 있는 초간 노자의 존재 자체를 무시한 반면, 기세춘 선생의 경우는 초간 노자가 유가와 대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시 초간노자의 정체성을 의심하며, 초간 노자를 제외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사실을 확인치 않은 오류에 기초한 것이다. 노자의 연대는 장자가 노자를 수 없이 인용해 [장자]라는 대서사시를 낳은 것처럼, 장자 이전이지 그 이후일 수가 없다. 또 기세춘 선생이 초간 노자가 유가와 대립하지 않았다는 근거로 본 중국의 초간 변석은 엉터리일 뿐더러, 설사 그 변석에 따라, 극히 일부 문장에서 노자가 인의를 반대치 않았더라도, 이 외에 초간 노자의 많은 내용은 현재 도덕경에서도 유가와 대립한다고 볼 수 있는 내용, 즉 學을 반대하고 수양론이 없으며, 유가처럼 天命이 절대적이지 않으며, 더 나아가, 제왕의 권위를 절대화 하지 않아서, 결코 유가의 논리에 동조했다거나 서로 유사하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초간 9편에는 
道亘亡名, 僕, 唯{卜曰女}, 天地弗敢臣. 侯王女能獸之, 萬勿將自{ 宀貝 }이라, "道는 항구히 이름을 잃어, 종이고 비록 점괘를 전하는 여자, 한낱 시녀일 뿐라도, 하늘과 땅이 감히 신하 삼길 떨친다. 제후, 왕이 여자처럼 음전이 앉아 사냥해지는 것이니, 만가지 날림들이 장차 스스로 집안에 재물이라" 했던 것이다. 이는 전국시대 맹자가 하늘의 뜻을 거스른 왕을 몰아낼 수 있다고 한 역성혁명론의 입장보다 시기적으로도 앞선 것이면서, 내용적으로도 제후나 왕도 사냥해질 수 있는 것인데 비해, 종, 마부, 시녀라도 영원히 이름을 잃은 道인 자는 천지도 감히 부릴 수 없다 본 파격으로, 아무리 聖君이라도, 기껏 하늘 아래 만인지상의 위치에 제왕을 두었던 유가의 논리를 넘어섰던 것이다.   

만일 기세춘 선생이 이 문장을 초간에서 찾아 내실 수 있었다면, 결코 초간 노자가 노자가 아니라고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강신주씨 역시, 초간의 이 문장의 내용을 알았다면, 결코 노자가 파시즘적 국가주의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도덕경]에 대해서는 강신주씨의 말도 맞고, 기세춘 선생의 말씀도 맞으나, 모두 부분적 사실을 지적한데 그친다는 것이다. 즉 노자는 춘추시대 원본 노자가, 전국초에 백서 갑으로 주석되었는데, 이 주석본을 근간으로, 1차 한고조 때 법가적으로 개작된 것이 백서 을 노자며, 한문제 때 2차 다시 이를 유가의 입맛에 맞게 개작한 것이, 현행 [도덕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행 [도덕경]에는 법가 또는 유가에 흡사한 내용을 얼마든 지 찾아 낼 수 있어, 강신주씨가 본 것처럼, 파시즘적 국가주의라고도 할 수 있고, 또 왕필이 유가와 노자를 통합해 노자의 저항 정신을 희석해 주석할 만한 내용이 충분히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세춘 선생이 잘 못 보신 것은, 이러한 저항정신의 희석과 체제내화가, 왕필의 주석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노자를 [도덕경]으로 '위작'한 한나라 왕실의 치적(?!)이라는 것이다. 또 이는 보다 근원적으로, 제후, 왕이라도 사냥해 질 수 있다는 초간 노자를, 제후, 왕이 지켜지는 것이라고, '사냥할 수獸'를 '지킬 수守'로 바꾼 백서 갑 주석본 부터, 시발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즉 기세춘 선생은 왕필에게 노자 왜곡의 혐의를 두었지만, 진범은 따로 있었으니, 이미 권력자들의 발 빠름은 그 이전부터, 책 [노자]를 손 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정확한 범행 시간은, 시황제의 '분서갱유'를 전후로 한 것이었고, 왕필 주석 이전에 주석의 원문을 훼손할 기회와 여견은 충분했었다 볼 수 있다. 사실 왕필이 한 역활이라야, 벌써 두차례나 위작되며 너무나 훼손이 심한 나머지, 그 내용조차 알 수 없게 된 도덕경을 적어도 유가가 이해할 수 있게 해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일 고고학적 대 발견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천년간 왜곡되어 알려진 권력자들의 노자, 즉 제왕학적 [도덕경]을 오직 노자의 저서로 밖에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자의 진의가 세상에 빛을 내는 것은, 아마도 험난한 과정이 될 것이니, 현재의 정치, 사회, 문화적, 지형은 강신주씨나, 기세춘선생처럼, 본래 노자에 대해, 어떠한 악의나 편견이 없었던 분들이라도, 각기 다른 이유로, 새로운 '분서갱유'를 불사하고라도, 과거의 노자를 덮어 두고자 하는 상황적 필연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이천여년 간 구축된 노자에 대한 선입관과 편견이 그 만큼 깊다는 뜻일 것이다.

한편 마지막으로 꼭 지적해야 할 문제는 기세춘선생의 번역이, 앞서 강신주씨 처럼, 주제별 발췌에 따른 것이란 점이다. 물론 기세춘 선생님이나, 강신주씨는 모두 책 [노자]를 한 사람에 의한 일관된 저작이 아니라, 춘추전국시대를 떠돌던 여러가지 금언들을 긁어 모은 편집서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발췌 번역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일 테지만, 

문제는 이러한 입장에서는 노자에 대해 어떠한 통일된 이해와 올바른 번역도 기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노자라는 사람도 책도 없고, 시대에 따라 각자의 입장과 해석에 따라 편집한 각자의 노자만이 존재할 뿐이니 무엇을 진정한 노자라 확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강신주씨와, 기세춘 선생은 이러한 동일한 발췌 번역의 방법으로, 서로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해서, 이러한 발췌 번역의 결과가 얼마나 상반된 결론을 유도할 수 있고 그 합치점을 찾기 어려운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증이 되었을 뿐이니 말이다.

그런데, 기세춘 선생은 정말, 노자 재번역 운동을 주창하고 싶으신 것일까?
스스로의 완역을 부인케 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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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해탈 아루나찰라 총서 14
까라빠뜨라 스와미 지음, 대성 옮김 / 탐구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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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바이타의 정수 중에 정수요, 청문의 끝이며, 이승에서 읽는 마지막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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