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님의 "노자가 과연 그랬을까?"

아마도 일년전 쯤 노자, 곽점초간, 백서, 통행본을 완독, 비교 연구해 본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최근에 그 작업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일년의 소회라 하면, 생각보다, 현대 우리는 한문 독해 능력이 참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임교수님과 오교수님의 논쟁이라면, 저는 오교수님의 입장입니다 .참고로 백서의 표현은 '책상, 밥상, 안석 안案이라 했습니다. 번역해 보면 '큰 도가 기울고(大道廢), 책상이나 밥상 피고, 안석 기대 앉아 인, 의를 잡고 있다(案有仁義)'는 것입니다 즉 오교수의 번역에서 제 번역을 더 나갔는 데, 큰 도가 짓밟고(大道發), 편안히 인과 의리를 가졌다(安又仁義)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기존 통행본 도덕경에서, 安, 案이 없는 것 보다 더 파격적이고, 심한 비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도덕경은 安, 案을 누락해서 더 순화된 표현을 썼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가와 도가의 대립점이라면 유가 또한 무위를 주장하기도 하여 무위냐, 유위냐의 대립이 아니라, 무엇보다 正名과, 無名이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유가는 배워서 더 잘 분별해 이름에 걸맞게, 즉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살자는 것이고, 도가는 억지로 배우며 끌어 올리지 말고, 분별하지도 않고, 왕 스스로도 고아, 과부, 나쁜 놈이라 부르는 것처럼, 외롭고 천하기도 하니, 스스로 그러한 바 대로 내 맞겨도 왕은 왕이고, 신하는 신하고, 백성 또한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말 나온 김에 이를 다시 법가와 비교하자면, 법가는 刑名이라, 이름을 벌준다(?!)는 것이니, 신하가 신하 답도록, 백성이 백성 답도록 상벌을 명확히 해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저도 강신주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 가장 탁월한 관점은 아마도 무위이무불위에서, 무불치지나, 무소불위와 같은 개념이 나와서, 통치론으로 노자가 '활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강신주 님은 아예 노자가 곧 이러한 통치론, 심지어 파시즘적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강론하지만 말입니다 .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이무불위가 나오는 장은 도덕경에서 딱 두 장인데, 첫 째는 37장에 도상망위편이고, 두 번째는 48장에 위학자일익편입니다. 그런데 48장에는 초간 부터 而亡丕爲가 있는데 37장에 而無不爲는 현행 도덕경에서 덧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초간에는 아닐 불不이 아니라 커질 비丕를 쓰고 있으니, 짓길 잃고도 짓기가 커지길 잃는다는 뜻이거나, 丕가 혹 不의 오기라 하더라도 짓길 잃고도 짓지 않기를 잃는다는 뜻으로, 행위를 잃었는데도 행위하지 못함이 없다(無弗爲; 사실 이렇게 못한다는 것이라면, 不이 아니라 弗이라 해야 합니다. )는 뜻이 아니라, 행위를 잃고 또, 행위 하지 않아야 함도 잃었다, 곧 행위에 자유롭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대게 우리가 행위의 부자유를 느끼는 것은 어떤 행위는 한사코 하고자 하면서, 어떤 행위는 한사코 하지 않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8장에서는 이것이 직접 도를 말하는 술어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도를 무위라 하게 된 것은 [도덕경] 37장에서 道常無爲而無不爲라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25장, 도법자연이라 한 구를 덧붙여, 우리는 현재 대게 道는 無爲自然이라 보고 있습니다.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백서 갑이나, 을은 모두 道恒无名이라 했으니, 이무불위라는 구절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초간은 예초에 본 편에서 도를 말한 것이 아니고, 행위의 도인 行 가운데 人을 끼워 넣은 글자,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구전에, '도 인'자라는 것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간에선 그럼 이 행위의 도를 뜻하는 인과 노자의 도가 같은 것인가? 이는 똑같은 형식으로 즉 인항무뮈와, 도항망명이라 한 장을 비교해서 알 수 있는데, 결론 부터 말하면 초간은 도와 인을 같이 보지 않고, 인을 도에 못 미치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즉 노자는 본래 행위의 도 보다는 망명의 도에 더 큰 안배와 비중을 두었다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초간 12편(도덕경 32장) 망명의 도는(道恒亡名) 종놈이고(僕), 단지 점괘를 전하는 여자일 뿐이라도(唯{卜曰女}, 천지가 감히 신하삼지 못하고(天地弗敢臣), 만가지 날림들이 스스로 집안에 재물인데(萬勿將自{宀貝}) 비해, 도덕경 37장 즉 초간 6편 다섯번째 단락인, 행위의 도인 인은 항구히 짓기를 잃어({行人}恒亡名), 후황이 지켜지는 것임에도(侯王守之) 그래도 만가지 날림은 스스로 마음 짓고(而萬勿自{爲心}, 마음 짓고도 욕망을 갑자기 일으키니({爲心}而慾作}, 이름 잃은 깨침인 것으로써 바로 잡아지는 것이라({貞之以亡名之박}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백서에서는 이제, 행위의 도인 인과 망며의 도가 구별되지 않게 되니, 백서는 이를 차마 无爲라 하지 못하고, 오직 無名이라 밖에 옮기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미 망명인데, 다시 망명지막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통행본 처럼 다시 초간을 따라, {行人}이 이미 도로 바뀐 상황에서 무위라 하는 것 역시,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하니, 통행본은 도가 늘 함이 없고, 게가다 하지 못함이 없고, 후왕은 이를 잘 지키고(侯王守之) 만물도 장자 스스로 잘 바뀌는데(萬物將自化), 바뀌다가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욕망이 일어나고(化而欲作), 그러면 내가 이름 없는 통나무 인 것으로 누르는 것(鎭之以無名之樸)이라 했습니다. 즉 통행본의 논리라 속에서도 무위이무불위 한 도는 다시 무명지박의 힘을 빌어야 하는 만큼, 無所弗爲, 無弗治之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백서가 도를 차마 무위라 하지 못하고 논리적 모순이 있더라도 한사코 망명이라 한 것은 결국 도는 초간이나, 백서나 망명의 도라 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무위를 무불치지로 착각하여 통치술로 본 것은 법가의 오해라 볼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사실 초간에는 治자가 쓰인 적이 없고, '바로 잡아서 나라를 좌지우지 하고(以正之邦), 창을 크게 구부려서 병장을 꿰고((以{奇戈}甬兵), 기원해 섬기길 잃고서 천하를 취한다(以亡思取天下)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병법과, 천하를 취하는 일이 각기 다르다고 구분했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천하를 천자 또는 황제가 다스리는 천하로 본다면, 어쩌면 비약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춘추전국시대 천하를 주유했던 모든 유가들이 재패하길 소망하는 바, 당대의 세계, 세상을 말한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초간에서 백서로의 변화가, 혹 정치적 관심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 지라도 그것이 유독 법가적 관심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정밀한 문헌적 검토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노자, 특히 전국시대 백서 노자를 법가라 보는 김홍경씨나, 강신주님의 책에는 그러한 문헌적 검토가 없는데다, 이를 테면, 한 고조본 즉 백서 을 노자를 전국시대 노자로 보는 착각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대게 도덕경에 꿰어 맞추어진 현행 백서 노자 번역본을 빌어 쓰다 보니, 현행 도덕경을 전국시대 노자라 우기는 사태도 비일비재하게 됩니다 . 무엇보다, 강신주님이나, 김홍경씨는 증명해야 할 것이 있는데, 노자를 통치이념으로 써서, 춘구전국시대 '파시즘'을 구가한 군주가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 아다시피 현행 [도덕경]을 정리한 한 고조의 네째 아들 문제는 노자를 좋아하여 법령을 간소히 하고, 함이 없는 정치를 행하다, 비록 그 명만큼 제위기간을 늘일 수 있었지만, 흉노의 침임과 귀족들의 반란을 막지 못하였다는 것은 모두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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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몄ž ?대?
    from ?š瓦Ž慂‹ 2007-11-30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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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읽기 2007-12-18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신 답글이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깨져 있습니다. 안타갑습니다.
 
 전출처 : jkydder님의 "도경만읽고 덕경은 아직 ... 못읽었땅.^"

집중해서 보고 다시 2~3년 쉬었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마 도덕경 원문이 아닐까 합니다.....
도덕경은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책이 많습니다. 도덕경 하나 제대로 봐 볼까 하고 사 들인 책들이 무려 열댓권인데, 그 중에 이 경숙의 완역도덕경이 없습니다. 노자를 웃긴 남자는 있습니다. 확인해 볼 것은 완역 도덕경이 노자를 웃긴 남자에서 풀어낸 이야기를 스스로 부정한 것이 있는가, 아니면 더 참신 한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있다면 한번 사 보지요...^^.. 없을 것 같은데요. 제가 볼 때는 그것으로도 충분했지요... 안경을 썻는가 아닌가는..
사실 절학무우(학교를 끊으면 근심이 없다)불상현민리백배(더 나은 것은 떠받들지 않으면 사람들의 이익이 백배다) 사부지자불감위야라(무릇 안다고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간히 나서지 않게 한다)라 한 뜻이라면야 배운 학자 보다야 못 배운 아줌마가 날 것 같았지요.. 그런데, 배우지 못한 아줌마의 열등감을 본 것 같습니다... 그거야 서울대 열등감에 하버드까지 헤맨 도올로도 충분한 일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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