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지옥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발을 올려! 발을!> <멍멍!> <더 올려!> <멍멍!> <더!> <멍멍!> <더!> O양이 병장으로 진급하여 내무반의 나폴레옹이 된 무렵부터였는데, 우엑! 우엑! 토하는 시늉을 하며 뒷짐 진 O양이 핵이다! 피해! 하고 외치면 후임들은 모조리 판초우의를 뒤집어쓴 채 몸을 납작하게 엎드리는 훈련이 그것이었습니다. 핵이 떨어졌을 때를 대비한, 일 년에 두 번 행해지는 야외 훈련을 따라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핵폭탄 역할은 상병인 저였고, 아니 저의 발이었고, 양 발을 허공에다 멍멍 치켜 올리는 임무였습니다. 크악, 크악. 후임 앞에서 벌이는 이 따위 우스꽝스런 짓으로 제 자존심은 깡그리 무너지고 말았으니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크악, 크악. 그러니 순찰하던 간부에게 엉터리 훈련이 목격되었을 때 제가 속으로 얼마나 환호성을 내질렀는지 상상할 수 있겠지요. 크악, 크악. 그야말로 모든 것에서 해방된 기분이었고, 당직사관의 반응도 정확히 제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뭐하는 짓이고?> 재빨리 경례를 착 붙인 O양이 소리치더군요. <충엉! 암 내무일 현재, 핵이 떨어졍을 때 앙아남는 법 훈련 중! 이앙 무!> <뭐라꼬?> 되묻는 당직사관을 향해 O양은 다시 외쳤고, 그래도 못 알아듣겠다는 뚱한 표정의 사관에게 다시 외쳤고, 또 다시 못 알아듣는 그에게 O양은 외치고, 외치고, 외쳐도 당직사관은 못 알아들었고, 또 알아듣지 못했고, 외치고, 외치고 못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 알아듣지 못하고, 외치고, 또 외치고 하였으나 또 알아듣지 못하는, 당직사관과 O양의 공 던지고 받기가 하릴없이 계속되는 가운데 여기저기 상병들과 일병들이 킥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ㅅ’을 ‘O’으로 발음하는 O양의 썩 유쾌한 사실을 당직사관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크악, 크악. 그런데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그가 갑자기 오른손을 O양의 어깨에 착 올리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래. 매우 잘 하고 있다.> 순간 저는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일지에다 무언가를 기록하는 당직사관을 노려보며 저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이런, 좆 박을 새끼! 그날 이후부터, 특히 2개월 후 O양이 전역을 해 버린 뒤로는 증오의 시선이 처음에는 대구 사투리를 쓰는 중사에게 다음에는 군의 모든 간부로 향했지만 그때는 이미 전역을 3개월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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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크악, 크악. 신이 난 오리새끼가 제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한 것처럼 결국 왔던 길을 되돌아오면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간 첫 번째 모퉁이에서 우리는 흥부보쌈을 발견했고, 테이블마다 놓인 4개의 나무의자가 저의 시야에 들어왔고, 저는 주먹을 쥐었습니다. <가자! 맛있어, 저기, 훨씬, 더, 놀부보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저를 따라 출입구에 들어섰고, 크악, 크악, 저는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왜 성공이냐고요? 왜냐하면, 제 의견이 받아들여져 우쭐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니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아, 갑자기 떠오른 몇몇 단어들 때문에 기분이 조금 우울해지는군요. 구더기와 귀때기, 그리고 때기, 때기, 뺨때기 말입니다. 크악, 크악. 또 다시 군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실 앞에서 고백하건데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타인을 괴롭혀 본 적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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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딱 한 놈이 문제야.> 군 입대를 삼일 앞두고 가진 동문들과의 술자리에서 한 선배가 충고한 말이었습니다. 옆자리의 선배가 제 등을 치면서 말하더군요. <조심해. 가 보면 알겠지만, 모든 인간들과 조화를 이룰 수는 없는 법이거든.> 그런데 그의 말은 모조리 틀렸습니다. 모든 인간들과 조화를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한 놈이 문제라는 말에서도 틀렸으니까요. 크악, 크악.
<현재 아귀는, 여자는?> 그게 O양이 내뱉은 첫 마디였습니다. <아귀? 이병! 진호! 말씀입니까, 아귀찜? 좋아합니다, 무척.> 입이 쩍 찢어져 형편없는 외모를 지닌 그 물고기를 떠올리고 있는데, 그때였습니다. 그 일병이 미친 듯이 흥분하면서 외치기 시작하더군요. <아귀는! 아귀는 여자! 아귀는 여자! 아귀는! 아귀! 아! 아! 아! 아! 아!> <이병! 진호! 여자입니까? 아귀가. 아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잘. 히힛.> 저도 모르게 그만 웃고 말았던 게 문제였을까요. 아니면 행동이 굼뜬데다 축구도 못했기에 사랑받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소의 뇌에 숭숭 뚫리는 구멍처럼 제 발에 찾아온 ‘빵꾸무좀’ 탓이었을까요? <야, 저리 비켜, 냄새나.> 제가 다가가거나 그들이 다가올 때마다 항상 코를 막으며 어깨를 툭툭 건드렸던 병사들을 탓하고 싶진 않습니다. 이제는 얼굴조차도 가물가물해졌으니까요. 그러나 ‘빵구’가 생기기 전부터 시작된 똥물 뿌리기, 즉 엉덩이를 걷어찬다거나 초코파이를 빼앗아간다거나 수시로 제 오른쪽 뺨을 때리거나, 철모로 머리통을 찍어대거나 말꼬리 하나하나에 시비를 걸어온 O양의 괴롭힘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크악, 크악. 최초의 감동적인 순간이 떠오르는군요. 크악, 크악. 혹한기 훈련 중이어서 더 그랬겠지만 O양이 먹어, 하고 내민 풍선껌 부푸러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었을 때 저는 울컥하여 울 뻔 했습니다. 그래도 인간적인 면이 있었구나. 겨우 그거에 감동받았느냐고요? 크악, 크악. 항상 잘해주는 사람의 배려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무시하기까지 하는 인간의 간사한 면을 볼 때 반대의 경우도 역시 성립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크악, 크악. 헌데 껌을 씹은 지 십초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삑, 내지른 그의 고함에 제 턱의 움직임은 딱 멈추고 말았습니다. <껌을 입으라 행나! 먹으라 행찌! 먹어! 먹어!> 저는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멀뚱 O양을 보다 더듬거렸습니다. <입으란, 말씀이십니까? 껌을? 어떻게, 입습니까? 옷도 아닌데, 껌을, 히힛> 화장실의 뒷담으로 끌려가 철모로 머리통을 세 대 찍힌 후 귀때기를 열 대 얻어맞은 건 또 웃었기 때문이었겠지요. 크악, 크악. 그날 이후부터였습니다. 재미를 붙였는지 심심하면 O양은 저의 뺨을 찰싹 찰싹, 가볍게, 장난스레, 때리기 시작했는데, 때리면서 때기, 때기, 귀때기, 라고 히죽거리곤 했습니다. 그러다 일병 때부터 찾아온 ‘빵꾸’는 O양의 악의적인 괴롭힘에 날개를 달아 주고 말았습니다. <니 발바닥엔 구더기 1억 마리가 기어 다니고 잉어. 더기, 더기, 구더기>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 사이에서 떠돌게 된 별명들은 모조리 O양에게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크악, 크악. <어이, 마술사, 이리와> <야, 폭탄.> <일병! 폭탄!> <야, 빵꾸야. 독가스 뿜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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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었습니다. 후문은 식당으로 향하는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오리를 기다리고 있던 해파리와 저 또한 수업이 막 끝난 직후여서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습니다. 잠깐 벤치에서 쉬는 사이 사람들 틈에서 나타나 손을 흔드는 오리의 주둥이가 보이더군요. 크악, 크악. 오래간만에 본 오리의 얼굴은, 특히 수염이 잡초처럼 뻗쳐서 그런지 무척이나 초췌해 보였습니다. 사법고시를 준비 중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지요. <오리 같아, 산적, 산적 같아, 오리, 넣어, 입, 넣으라니깐, 주둥이, 뭐가 불만이야, 도대체?> 만나자마자 내뱉은 제 말에 오리가 인상을 찌푸리더군요. 그럴 만도 했지요. 크악, 크악. 그래도 고향 맛이 좋아, 에서부터 삼포 만두, 김밥천국, 장작개비, 토담, 엄마 손 식당, 그리고 산에 나물, 까지 단골로 가던 식당 모두가, 오리가 늦게 온 탓에 사람들로 꽉 차 있었으니까요. 여기저기 훑어보다 골목 끝에 이르러서야 제법 한산한 놀부 부대찌개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제 눈에 들어온 게 무엇이었겠습니까? 크악, 크악. 마루에 올라선 양말들이었습니다. 맨 앞에 서 있던 제가 오리와 해파리에게 재빨리 고개를 돌렸습니다.

<귀찮잖아, 신발 벗기, 가서 먹자, 딴 데.>

<다리 아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들어가자.> 해파리의 말에 저는 반박했습니다. <곧, 날 거야, 자리가, 다른 곳에도, 그리고, 비싸, 여긴, 너무.> 오리새끼가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린 건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 순간 제가 얼마나 놀랬는지, 몰래 숨겨둔 자위기구가 발각되었을 때의 기분처럼 얼굴이 뻣뻣해지면서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박동과 보조를 맞춰 오리의, 그들의 낄낄거림이, 다 안다! 다 안다! 다 안다! 하고 제 귀에다 못을 박아대고 있었습니다. 겨드랑이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식은땀 또한 바늘이 되어 다 말해! 다 말해! 다 말해! 하고 제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고 있었으니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하여 저는 태연스레 다 말했습니다. <아직도 그래.> 그런데, 오리가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꽥 꽥, 야, 다시 해봐. 귀.찮.잖.아. 그 녀석 말투하고 똑같네. 히히. 귀-찮-잖-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귀차니스트의 하루’에 나오는 림보맨의 말투와 똑같다며 몇 번이고 웃음을 참지 못하는 오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무언가를 중얼거려야 했기에 저는 중얼거렸습니다. <더 많네, 아는 게, 나보다, 넌, 고시공부하면서, 태도인걸, 여유 만만한> <네가 모르는 거야, 더 많은 게 아니라, 아는 게, 안 좋아하잖아, 프로, 코미디, 넌, 어때 똑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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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일까요? 며칠 동안 우울한 기분 속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건 왜일까요? 성공하자마자 느끼게 된다는 끝 모를 허무감 때문에? 그것이 혀끝에서 빙글빙글 맴돌던 씁쓸함의 정체였을까요? 그러니 차라리 실패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 고통에 달콤한 위안이 되었을까요? 그랬을까요? 아아, 아닙니다. 위안······ 위안이 아니라 치켜든 가운데 손가락처럼 떠오른 그들의 조롱하는 눈초리가 떠오르는군요. 크악, 크악. 이튿날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킥킥거릴 동급생들,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수군거릴 후배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겨드랑이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크악, 크악. 그리고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인문학부 건물 전체로 소문이 쫙 퍼져나간 후 학교 전체의 안주거리로 전락하겠지요. 그 남자 봤어? 그레이 스키니 진을 입었잖아, 게다가 남자가 어떻게 저렇게 다닐 수 있어? 그로부터 며칠 후 한강에서는 눈알이 뜯겨나간 시체가 발견됩니다. 20대 후반의 청년으로, 취업난으로 인한 투신자살로 추정된다는 아나운서의 말에 안타깝게도 모두 놀라운 반응을 보입니다. <겨우 그거야?> <그래서 어쨌다고?> 다음날 그의 죽음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짝 남아있게 되고, 이틀 후에는 아주 살짝, 다음에는 희미한 그림자로써 아른거리다 종국에는 새로운 소식들에 짓눌려 완전히 증발해버립니다. 크악, 크악. 그리고! 반전이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서부터! 진실을 추구하는 끈질긴 기자에 의해 혁명적 삶을 꿈꾸었던 리얼리스트의 고뇌가 책상의 맨 아래 서랍 속에서 발견됨으로써 말이지요. 크악, 크악. 몇 개월간 다듬어져 발간된 그의 평전은 무려 1년 동안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냅니다. 그리하여 그의 삶이 재조명되고,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떨치게 되고, 진호를 함부로 대했던 자들은 후회하고, 이어 스테디셀러가 됨으로써 연인인 미미와 더불어 그의 존재가 국민의 기억 속에서 불멸의 신화로 자리매김하는, 바로 실패를 전제로 한 이런 달콤하고도 우울한 상상 속에서 위안을 받아온 그가 그날의 성공 이후 얼마나 허탈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지 이제야 아시겠지요? 크악, 크악.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그가 무슨 말을 했냐고요? 그렇습니다. 자리가 몇 개 비어 있던 식당 앞에서 그가 한 말은 고작 이것이었습니다.

<귀찮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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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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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드디어 제가 성공했습니다!

아무도 제가 한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으니까요, 크악, 크악, 놀부 부대찌개 앞에서 터트린 오리의 자지러지는 웃음에 제 얼굴이 뻣뻣해진 건 마침내 올 것이 왔다고 판단한 때문이었고,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수백 번도 더 되풀이했던 끔찍한 상상이 밤새도록 이어진 탓에 수업이 끝난 오후가 되어도 발끝까지 몰린 긴장은 여전히 풀어지지 않고 있었으나 그 이유를 아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첫경험은 언제나 두려운 법이니까 말입니다. 크악, 크악. <발 아파. 좀 쉬었다 가자.> 마지막 교양 수업을 마친 후 정대후문의 나무 벤치에 앉아 보란 듯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고 난 뒤에도 몇 분이 지나서야, 해파리는 제가 신고 온 갈색 구두를 알아차리더군요, <어, 신발 샀네?> 그러나 제가 한 말은 겨우 이것이었습니다. <샀어, 그냥, 보세골목에서, 싸구려 신발이야, 순, 8천원> <8천원 치고는 꽤 괜찮은데> 여전히 무관심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저는 청바지 아래로 비저 나온 구두코를 슬쩍 바라보곤 뇌까렸습니다. 꽤 괜찮다니, 당연하지. 크악, 크악. 5분의 1쯤 알아본 해파리를 제외하고 제 새 구두를 알아 본 친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질 때까지 둔감한 오리새끼는 아예 알아차리지도 못했고, 사실 반쯤 정도도 아니었기에 이는 해파리에게도 적용되며, 교정을 거닐다가 지나친 몇몇 동료들과 편의점에서 마주친 후배 두 명도 마찬가지였고, 도서관 엘리베이터를 대여섯 번이나 오르내리는 동안, 지하철에 올라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제게 손가락질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마침내 성공을 거머쥔 것이었습니다. 크악, 크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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