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나는 턱의 동작을 멈추고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빛은 여전히 그곳에 떠 있었다. 세계는 나와 상관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울타리를 가운데 두고 세계는 저쪽에, 나는 이쪽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누나의 망막과도 같은 짙은 어둠 속에서, 뜨거움과 차가움의 경계에서 눈물이 뺨을 지나 턱 아래로 떨어지고 있음을 문득 알아차렸다. ‘황제구이’의 화제 후 뉴스와 시사 잡지를 통해 얼마간 대중으로부터 관심을 받아 환한 대낮으로 떠오른 누나는 죽음으로 그렇게 삶을 보상받았다. 그러나 모든 게 의문이었다. 서울행을 결심할 때부터 ‘우리’를 의식에서 지우려 한 게 아니었을까, 내가 할머니를 버림으로써 다시 누나와 나, ‘우리’가 되었지만 누나는 여전히 나를 짐으로 여기지 않았던가. 그러한 확신 속에서 밤을 뒤척이다가도 생각을 고쳐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누나가 떠나면서 내 서랍에 남겨놓은 연락처 때문이었다. 어머니처럼 새벽에 그냥 달아나려고 했다면 굳이 연락처를 남겨놓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날 저녁 허겁지겁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막 현관문을 나서는 누나를 몰래 뒤따라가자는 엉뚱한 생각이 찾아온 것도 이 모든 혼란과 무관치 않으리라. 그러나 밤참을 챙겨온 ‘동생’ 대신 뜻하지 않게 나는 그날 어쩔 수 없이 ‘남자’가 되어야만 했다. ‘패밀리 레스토랑’은 없었다. ‘에덴동산’으로 휘청휘청 걸어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으로 어둠이 황폐해져가고 있었다. 문득 묘한 느낌이 엄습했다. 나는 손에 힘을 넣었다. 전해오는 감각은 뚜렷했다. 주먹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가죽 장갑이 새까만 어둠과 몸을 섞어 만들어낸 착시였던 것이다. 장갑 낀 손을 가만히 응시하자, 다시 손을 감싼 까만 장갑이 밤의 어둠과 섞이어 까마귀의 광활한 날개처럼 팽창하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찾아온 웃음처럼 휴대전화가 울었다. 허벅지가 가냘프게 자맥질했다. 정우인지도 몰랐으나 나는 받지 않았다. 곧이어 다시 떨리기 시작했을 때 배터리를 몸체에서 완전히 분리시켰다. 팽팽한 정적이 보름달처럼 찾아오면서 바람이 차차 잦아들고 있었다. 구겨진 부동산 명함이 길게 포물선 그리다 툭 떨어져 흰 눈에 섞여들었다. 둥글게 몸을 말아 어둠의 손바닥에 웅크려 앉은 나의 머리 위로 하얀 눈이 끝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밤새도록 내릴 모양이었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5 


 뺨을 스치는 깃털의 촉감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눈을 떴다. 어둠이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몸이 차갑게 굳어가고 있음을 깨닫고선 등짝이 흠칫 떨렸다. 칠이 벗겨진 그네 기둥 하나에 등을 기대어 졸음운전을 하듯 졸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비비고 주위를 둘러보자 무수한 낙하산처럼 가늘게 휘날리는 눈발과 함께 바스락거리는 추위 사이로 공원 밖으로 몇몇 행인들이 추상화처럼 흘러가는 게 보였다. 바람 한 자락이, 세게 움켜쥔 내 손에서 얼음조각처럼 부서져 발치로 후드득 쏟아졌다. 차디찬 공기를 가슴 가득 담았고, 알싸한 기운이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왔다. 휴대전화의 진동음이 다시 허벅지에서 울기 시작했다. 부재중 전화였다. 나는 확인하지 않았고, 대신 단물이 빠져 딱딱해진 껌을 뱉어냈다.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나간 것 같았다. 공원 입구의 쓰레기통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조끼를 벗은 다음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 벤치로 되돌아와 벤치 등받이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받치고 앉았다. 주머니에서 빳빳한 껌을 하나 꺼내 씹었다. 위태로운 촛불처럼 나는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세계를 돌리는 발전기인 양 턱을 움직였다. 건물 가득 차오른 빛과 대조적으로, 내가 앉은 공간은 어둠에 완전히 묶여 있었다. 공원 밖을, 각진 건물들을, 통유리 안의 환한 불빛을 나는 날카로이 노려보고 있었다. 간판들의 불을, 이 세계의 빛을 깡그리 꺼뜨리고픈 욕구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고개를 숙여 발끝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의 사내가 읽고 있던 스포츠 신문을 내려놓은 후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유리 재떨이에 비벼 껐다. 치지직, 소리를 내며 불 꺼진 담배꽁초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 나의 감정도 식어갔다. 중개인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입가에 주름을 만들며 팔걸이의자에 팔을 올려놓았을 때에는 모든 게 정리된 기분이었다. 소파에 앉은 채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 방을 좀 구하려고 하는데요.”
내 말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지금 나온 집이, 보자······.”
이곳에 집을 구해도 상관없을 것이었다. 혼자지낼 만한 조그만 방을 구한다는 내 말에 잠시 서류를 뒤적이던 중개인이 이내 10평의 자그마한 원룸을 추천해 주었다. 지대가 높아서 좀 불편한 게 사실이긴 하지만, 하고 중개인이 설명했다. 전세가 싼 대신에 월세는 56만원이었다. 또 다른 집은 지하단칸방이었다. 나는 두 군대 다 기억해 내려 애써 보았다. 어렴풋이 스쳐가던 당시의 뿌연 영상이 중개인의 말에 흩어졌다. 지금 약속도 잡혀있고, 시간도 저녁 무렵이니 집은 내일 보여주겠다는 중개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이튿날 2시로 잡혔다. 명암을 받아들며 적힌 번호로 연락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는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고, 중개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사무적으로 짧게 대답했다.
“음, 전에는 금은방이었어요.”
금은방 전에는 무엇이었는지 주인도 더 이상 알 수 없으리라. 6년 동안 온갖 자영업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을 것이다. 뒤돌아서려는데 월간 지를 뒤적이던 소파의 사내가 기억났다는 듯 불쑥 내뱉었다.
“아, 그 전에 화장품 가게였지. 화장품 가게.”
“그랬었나?” 중개인이 코를 문질렀다.
“그럼, 혹시, 화장품 가게 전에는 뭐였는지 아세요?”
나는 좀 더 자세히 물으려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근데 왜요? 무슨 사정이 있어요?” 중개인이 끼어들었다.
더 이상 나는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고맙다고 꾸벅 인사하고는 문을 열었다. 그 전에 명함을 하나 받아 쥐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몸이 물 먹은 해먹처럼 급작스레 무거워졌다. 거대한 자석에 이끌려가듯 나의 두 발은, 그 당시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은 적 없었던 공원으로 내딛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양 손의 허전함을 알아차렸다. 비닐우산이 사라지고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 달 전 즈음이었다. 그날도 만장이 형을 포함해 우리 셋은 너구리를 후후 불어가며 먹고 있었다. 거의 다 먹어갈 즈음 별안간 문이 벌컥 열렸다. 팔짱을 낀 털보 과장이 문턱에 서서는 깜짝 놀라 동작을 멈춘 우리에게 인상을 구겼다.

“자네들! 일은 안 하고 여기서 뭐하나!”

그러더니 갑자기 하하하하하,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장군처럼 내뱉는 것이었다. 허파를 들썩이게 하는 특유의 너털웃음. 그것은 바로 BBQ아저씨의 전매특허가 아니었던가. ‘척 하면 딱’인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확신이 스무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급속히 빛을 잃어감에 따라 ‘딱 하면 척’이라는 생각이 벌써부터 나의 등짝을 때리고 있었다. 그건 자기암시고 기만일 뿐이야. 명백히 그 둘은 전혀 별개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혹시나 싶었다. 시장 끝에서부터 목적지까지 단숨에 당도했으나 눈앞에 나타난 간판은 ‘현대부동산’이었다. 그러므로 주인아저씨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뛰쳐나와 나의 손목을 꽉 잡아끌기를 원했으므로 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 맞은편 건물 벽에 기대어 서 통유리에 덕지덕지 나붙은 매물전단지 덩어리를 응시하는 사이 낡은 트럭과 자전거가 한 대씩 지나갔다. 10분이 영원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한 차례 터져 나온 기침으로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중개인은 느긋한 표정으로 누군가와 통화중이었다.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태연히 주름 잡힌 갈색 소파에 앉아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스포츠 신문을 펼친 맞은 편 사내가 나를 쓱 일갈하더니 다시 신문을 치켜 올렸다. 나는 주위를 찬찬히 뜯어보며 카운터와 냉장고, 테이블, 그리고 각종 집기가 놓였던 자리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내부는 확장공사로 훨씬 커진 것 같았고, 양 끝이 거무스름한 형광등 때문인지 실내는, 살이 오른 볼에 기름으로 머리를 뒤로 바싹 넘긴 중개인처럼 권태가 묻어나 보였다. 중개인의 눈썹은 아주 옅었고, 뺨에도 수염이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그 실패의 운명은 어느 날 헌병들에게 를 까이고 나서였다고 했다. 그가 옷을 올려 보여준 곳에는 20년 전에 까인 자리에 흉터가 아직도 약간 거무튀튀하게 변색된 피부로 남아 있었는데, 나에게도 그런 상처가 있었다. 그의 말대로 사업의 결과는 항상 부도였고, 현재는 도피 중이었다. 만수 형을 통해 창고를 임대한 후 채권자들의 눈을 피해 인터넷으로 아기 옷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가 나온 문이 바로 사업장이었다. 말이 사업이었지 내가 휴식을 취할 때마다 본 모습은, 인생을 달관한 듯 큰 대자로 누워 잠을 자거나, 만화책을 보며 시시덕거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도망자라고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은 사내의 초연한 태도 때문이었을까. 나의 내부에서 점점 자라나던 못마땅함이 엉뚱한 상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파란만장’이 나의 돈을 갖고 달아난 중학교 동창과 공범이라는.
버거킹에서의 우연한 만남 후 가진 첫 술자리에서 대화는 예상외로 길어지고 있었다.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세련된 말투를 구사하는 그 친구의 눈빛이 사뭇 진지한 때문이었을까. 반듯한 정장에 넥타이를 맨 믿음직한 회사원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5년간 모아온 돈이 사라지는 건 눈 깜짝할 사이였다. 적금 모두가 펀드 광풍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게 보편적 흐름이고 유행이었다. 뒤처진 인간이라고 은근히 그들의 시선에서 나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 어차피 사기가 아니었더라도 돈을 날렸을 것이다, 그러니 사기이든 인터넷 사이트는 폐쇄되어 있었고, 종적을 감춘 동창을 찾으려 사방을 뒤지는 몇 개월 사이 나의 얼굴은 거뭇해졌고, 울긋불긋 여드름이 솟았으며, 황량한 겨울처럼 차가워져갔다. 잠결에서조차 걷잡을 수 없는 바람이 나의 의식으로 비집고 들어와 몸을 뒤척였다. 동창과의 불편한 조우를 기대하며 모르는 번호에 올라타는 게 어느 새 습관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정우와 함께 옷가게를 내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으니까.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한 방법들 중 하나가 되었고, 총구의 방향이 파란만장을 향한 것도 비슷한 이유일 터였다. 도피중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파란만장을 애타게 찾고 있을까. 이런 자를 방관한다는 게 옳은 것일까. 아니, 신고한다면 포상금으로 3천만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다가도 즉결 재판해야 한다는 강렬한 적개심이 나를 할퀴고 지나갈 때면 찍찍거리는 쥐새끼를 돌멩이로 내리찍다가 온 몸에다 피를 흠뻑 뒤집어쓰는 꿈에서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눈을 뜨면 햇살이 바늘같이 뾰족한 대낮이었다. 야간 PC방으로 인해 밤낮이 바뀐 하루하루가, 일주일 단위로 시간이 팝콘처럼 튀어 올랐다. 어느 덧 손에 들고 쥐어진 상상의 돌덩이는 미안한 감정에 융화되어 차차 작아지고 있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