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숙여 발끝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의 사내가 읽고 있던 스포츠 신문을 내려놓은 후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유리 재떨이에 비벼 껐다. 치지직, 소리를 내며 불 꺼진 담배꽁초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 나의 감정도 식어갔다. 중개인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입가에 주름을 만들며 팔걸이의자에 팔을 올려놓았을 때에는 모든 게 정리된 기분이었다. 소파에 앉은 채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 방을 좀 구하려고 하는데요.”
내 말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지금 나온 집이, 보자······.”
이곳에 집을 구해도 상관없을 것이었다. 혼자지낼 만한 조그만 방을 구한다는 내 말에 잠시 서류를 뒤적이던 중개인이 이내 10평의 자그마한 원룸을 추천해 주었다. 지대가 높아서 좀 불편한 게 사실이긴 하지만, 하고 중개인이 설명했다. 전세가 싼 대신에 월세는 56만원이었다. 또 다른 집은 지하단칸방이었다. 나는 두 군대 다 기억해 내려 애써 보았다. 어렴풋이 스쳐가던 당시의 뿌연 영상이 중개인의 말에 흩어졌다. 지금 약속도 잡혀있고, 시간도 저녁 무렵이니 집은 내일 보여주겠다는 중개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이튿날 2시로 잡혔다. 명암을 받아들며 적힌 번호로 연락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는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고, 중개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사무적으로 짧게 대답했다.
“음, 전에는 금은방이었어요.”
금은방 전에는 무엇이었는지 주인도 더 이상 알 수 없으리라. 6년 동안 온갖 자영업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을 것이다. 뒤돌아서려는데 월간 지를 뒤적이던 소파의 사내가 기억났다는 듯 불쑥 내뱉었다.
“아, 그 전에 화장품 가게였지. 화장품 가게.”
“그랬었나?” 중개인이 코를 문질렀다.
“그럼, 혹시, 화장품 가게 전에는 뭐였는지 아세요?”
나는 좀 더 자세히 물으려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근데 왜요? 무슨 사정이 있어요?” 중개인이 끼어들었다.
더 이상 나는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고맙다고 꾸벅 인사하고는 문을 열었다. 그 전에 명함을 하나 받아 쥐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몸이 물 먹은 해먹처럼 급작스레 무거워졌다. 거대한 자석에 이끌려가듯 나의 두 발은, 그 당시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은 적 없었던 공원으로 내딛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양 손의 허전함을 알아차렸다. 비닐우산이 사라지고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 달 전 즈음이었다. 그날도 만장이 형을 포함해 우리 셋은 너구리를 후후 불어가며 먹고 있었다. 거의 다 먹어갈 즈음 별안간 문이 벌컥 열렸다. 팔짱을 낀 털보 과장이 문턱에 서서는 깜짝 놀라 동작을 멈춘 우리에게 인상을 구겼다.

“자네들! 일은 안 하고 여기서 뭐하나!”

그러더니 갑자기 하하하하하,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장군처럼 내뱉는 것이었다. 허파를 들썩이게 하는 특유의 너털웃음. 그것은 바로 BBQ아저씨의 전매특허가 아니었던가. ‘척 하면 딱’인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확신이 스무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급속히 빛을 잃어감에 따라 ‘딱 하면 척’이라는 생각이 벌써부터 나의 등짝을 때리고 있었다. 그건 자기암시고 기만일 뿐이야. 명백히 그 둘은 전혀 별개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혹시나 싶었다. 시장 끝에서부터 목적지까지 단숨에 당도했으나 눈앞에 나타난 간판은 ‘현대부동산’이었다. 그러므로 주인아저씨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뛰쳐나와 나의 손목을 꽉 잡아끌기를 원했으므로 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 맞은편 건물 벽에 기대어 서 통유리에 덕지덕지 나붙은 매물전단지 덩어리를 응시하는 사이 낡은 트럭과 자전거가 한 대씩 지나갔다. 10분이 영원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한 차례 터져 나온 기침으로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중개인은 느긋한 표정으로 누군가와 통화중이었다.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태연히 주름 잡힌 갈색 소파에 앉아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스포츠 신문을 펼친 맞은 편 사내가 나를 쓱 일갈하더니 다시 신문을 치켜 올렸다. 나는 주위를 찬찬히 뜯어보며 카운터와 냉장고, 테이블, 그리고 각종 집기가 놓였던 자리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내부는 확장공사로 훨씬 커진 것 같았고, 양 끝이 거무스름한 형광등 때문인지 실내는, 살이 오른 볼에 기름으로 머리를 뒤로 바싹 넘긴 중개인처럼 권태가 묻어나 보였다. 중개인의 눈썹은 아주 옅었고, 뺨에도 수염이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그 실패의 운명은 어느 날 헌병들에게 를 까이고 나서였다고 했다. 그가 옷을 올려 보여준 곳에는 20년 전에 까인 자리에 흉터가 아직도 약간 거무튀튀하게 변색된 피부로 남아 있었는데, 나에게도 그런 상처가 있었다. 그의 말대로 사업의 결과는 항상 부도였고, 현재는 도피 중이었다. 만수 형을 통해 창고를 임대한 후 채권자들의 눈을 피해 인터넷으로 아기 옷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가 나온 문이 바로 사업장이었다. 말이 사업이었지 내가 휴식을 취할 때마다 본 모습은, 인생을 달관한 듯 큰 대자로 누워 잠을 자거나, 만화책을 보며 시시덕거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도망자라고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은 사내의 초연한 태도 때문이었을까. 나의 내부에서 점점 자라나던 못마땅함이 엉뚱한 상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파란만장’이 나의 돈을 갖고 달아난 중학교 동창과 공범이라는.
버거킹에서의 우연한 만남 후 가진 첫 술자리에서 대화는 예상외로 길어지고 있었다.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세련된 말투를 구사하는 그 친구의 눈빛이 사뭇 진지한 때문이었을까. 반듯한 정장에 넥타이를 맨 믿음직한 회사원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5년간 모아온 돈이 사라지는 건 눈 깜짝할 사이였다. 적금 모두가 펀드 광풍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게 보편적 흐름이고 유행이었다. 뒤처진 인간이라고 은근히 그들의 시선에서 나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 어차피 사기가 아니었더라도 돈을 날렸을 것이다, 그러니 사기이든 인터넷 사이트는 폐쇄되어 있었고, 종적을 감춘 동창을 찾으려 사방을 뒤지는 몇 개월 사이 나의 얼굴은 거뭇해졌고, 울긋불긋 여드름이 솟았으며, 황량한 겨울처럼 차가워져갔다. 잠결에서조차 걷잡을 수 없는 바람이 나의 의식으로 비집고 들어와 몸을 뒤척였다. 동창과의 불편한 조우를 기대하며 모르는 번호에 올라타는 게 어느 새 습관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정우와 함께 옷가게를 내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으니까.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한 방법들 중 하나가 되었고, 총구의 방향이 파란만장을 향한 것도 비슷한 이유일 터였다. 도피중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파란만장을 애타게 찾고 있을까. 이런 자를 방관한다는 게 옳은 것일까. 아니, 신고한다면 포상금으로 3천만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다가도 즉결 재판해야 한다는 강렬한 적개심이 나를 할퀴고 지나갈 때면 찍찍거리는 쥐새끼를 돌멩이로 내리찍다가 온 몸에다 피를 흠뻑 뒤집어쓰는 꿈에서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눈을 뜨면 햇살이 바늘같이 뾰족한 대낮이었다. 야간 PC방으로 인해 밤낮이 바뀐 하루하루가, 일주일 단위로 시간이 팝콘처럼 튀어 올랐다. 어느 덧 손에 들고 쥐어진 상상의 돌덩이는 미안한 감정에 융화되어 차차 작아지고 있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러니까 2층에서 ‘관계자 외 출입금지’ 너머에 기식하는 사내를 알게 된 건 2주가 지날 무렵이었다. 스티커를 붙이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만수 형이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입에 대는 시늉을 하면서 나를 불렀다. 형을 따라 맞은편 문짝을 열고 들어서자 예상과는 달리, 공간은 휑했다. 희멀건 냉장고 하나랑 컴퓨터 한 대, 텅 빈 책장 한 개가 전부였고, 그 옆에는 또 하나의 문이 무심히 놓여 있었다.

“자자, 설렁탕 먹고 설렁설렁 하자아. 히힛..”

깨어진 양주병 옆에 놓인 버너 불을 조절하던 만수 형이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만장이 형! 어서 나와! 다 됐어! 큼큼.”

그러자 녹슬어 삐걱거리는 문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염을 5일 정도 깎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문턱에 서서는 기지개로 하품하고,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에 앉은 후,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담배를 입에 무는 일련을 동작을 취하는 동안, 자신에게 온통 집중한 때문인지, 그는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보이지 않았거나. 만수 형이 나에게 턱짓으로 사내를 가리키며 웃었다.

“이 형, 인생의 낙오자야. 낙오자. 큼큼.”

“낙지라 그래라 이 새끼, 손님에게 할 말이 따로 있지.”

“손님이 아니라 우리 식구지. 또 하나의 가족, 삼성전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젓가락질을 하는 줄곧 그 사내는 말이 없었다. 입 안으로 후루룩 말려가는 설렁탕면의 면발 소리만이 요란했다. 나에겐 점심이었고 그들에겐 안주였다. 유리조각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연거푸 양주를 들이켜던 사내의 얼굴이 이내 불콰해졌다. 깨진 양주병의 주둥이를 흘깃거리는 나의 불안한 시선을 읽었는지 만수 형이 트림을 꺼억 내뱉었다.

“야, 먹어도 안 죽어. 큼큼. 먹고 안 죽으면 보약이야. 큼큼.”

“암, 양주가 보약이지.”

사내가 다르게 맞장구쳤다. 만수형의 설명이 이어졌다.

“한번 씩 택배 물건이 깨지는 수가 있어. 유리처럼 부서지기 쉬운 물건들 말이야. 큼큼. 그날은 봉 잡는 거지. 봉. 큼큼. 형, 그만 마셔. 한 번에 다 먹을 거요? 좀 애껴 먹어야지. 큼큼.”

“어, 시원하다.”

국물을 꿀꺽꿀꺽 넘기는 그의 목젖이 출렁거렸다. 담배를 바닥에다 비벼 끈 만수 형이 다시 턱짓으로 사내를 가리켰다.

“이 형 이름이 뭔지 알아? 파란만장이야. 파란만장. 큼큼.”

라면과 양주를 위 속에 가득 채우자마자 사내는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이내 문 너머로 사라졌다. 만수형의 설명에 의하면, ‘만장’이라 불리는 사내는 대학을 졸업한 25살 이후로 전자대리점부터 술집까지 온갖 장사와 사업을 시도했으나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알고 보니 제가 잔디밭을 느릿느릿 훑었던 그 시간에 그녀는 서관건물 3층의 한 강의실에서 페미니즘의 적용에 관한 발제토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제가 ‘속옷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고 했는데, 크악, 크악, 강의실에 울려 퍼졌을 당당하고도 섬세한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짜릿해져오는군요. 역시 속옷은 감옥입니다. 아아, 그날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크악, 크악. 수첩에다 날짜까지 기록한 제가 어떻게 그날을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크악, 크악. 하늘하늘 내 사랑 악어여······.

                                                             3
하얀 구름이 코끼리 모양으로 떠 있는 오전이었습니다. 코끼리 모양의 회색 구름을 보았는데 자세히 보니 매머드인 것 같기도 함, 이라고 제 수첩에는 기록되어 있으니까 맞겠지요. 3교시 수업시간이었고, 세 번째 발표 시간이었습니다. 어수선했던 강당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던 게 떠오르는군요. 그 침묵 위를 사뿐사뿐 검은 색 뿔테 안경을 쓴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크악, 크악. 모두들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고, 저는 멍하니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또렷하면서도 미끈한 목소리가 그녀의 앙증맞은 입술에서 술술 나오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오오. 그토록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능을 가진 사람을, 여태껏 본 적 없었던 저로서는 그저 놀라울 다름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저는 어느 덧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은 첫 눈에 반했다, 라는 표현을 쓰는 거겠지요. 크악, 크악. 그때부터 그녀를 보는 것이 저의 유일한 낙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두터운 입술과 탄력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 잘록한 허리선. 온통 곡선으로 빚어진 성숙한 육체와 연약하고 순수한 얼굴, 그리고 당당한 목소리의 아이러니한 조화를 상상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크악, 크악. 그녀를 향한 제 열정은 갓 입학한 파릇파릇한 새내기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꿈도 꾸지 마. 쟤 20살이야. 네, 주제를 알아야지.> <알아, 미미야, 발표할 주제는, 말이야, 내가> 그들의 웃음소리와 제 목소리가 엉켜들어 잠결에 등을 토닥이더군요. 크악, 크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