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제가 잔디밭을 느릿느릿 훑었던 그 시간에 그녀는 서관건물 3층의 한 강의실에서 페미니즘의 적용에 관한 발제토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제가 ‘속옷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고 했는데, 크악, 크악, 강의실에 울려 퍼졌을 당당하고도 섬세한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짜릿해져오는군요. 역시 속옷은 감옥입니다. 아아, 그날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크악, 크악. 수첩에다 날짜까지 기록한 제가 어떻게 그날을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크악, 크악. 하늘하늘 내 사랑 악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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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구름이 코끼리 모양으로 떠 있는 오전이었습니다. 코끼리 모양의 회색 구름을 보았는데 자세히 보니 매머드인 것 같기도 함, 이라고 제 수첩에는 기록되어 있으니까 맞겠지요. 3교시 수업시간이었고, 세 번째 발표 시간이었습니다. 어수선했던 강당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던 게 떠오르는군요. 그 침묵 위를 사뿐사뿐 검은 색 뿔테 안경을 쓴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크악, 크악. 모두들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고, 저는 멍하니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또렷하면서도 미끈한 목소리가 그녀의 앙증맞은 입술에서 술술 나오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오오. 그토록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능을 가진 사람을, 여태껏 본 적 없었던 저로서는 그저 놀라울 다름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저는 어느 덧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은 첫 눈에 반했다, 라는 표현을 쓰는 거겠지요. 크악, 크악. 그때부터 그녀를 보는 것이 저의 유일한 낙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두터운 입술과 탄력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 잘록한 허리선. 온통 곡선으로 빚어진 성숙한 육체와 연약하고 순수한 얼굴, 그리고 당당한 목소리의 아이러니한 조화를 상상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크악, 크악. 그녀를 향한 제 열정은 갓 입학한 파릇파릇한 새내기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꿈도 꾸지 마. 쟤 20살이야. 네, 주제를 알아야지.> <알아, 미미야, 발표할 주제는, 말이야, 내가> 그들의 웃음소리와 제 목소리가 엉켜들어 잠결에 등을 토닥이더군요. 크악, 크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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