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표현대로라면 그 실패의 운명은 어느 날 헌병들에게 를 까이고 나서였다고 했다. 그가 옷을 올려 보여준 곳에는 20년 전에 까인 자리에 흉터가 아직도 약간 거무튀튀하게 변색된 피부로 남아 있었는데, 나에게도 그런 상처가 있었다. 그의 말대로 사업의 결과는 항상 부도였고, 현재는 도피 중이었다. 만수 형을 통해 창고를 임대한 후 채권자들의 눈을 피해 인터넷으로 아기 옷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가 나온 문이 바로 사업장이었다. 말이 사업이었지 내가 휴식을 취할 때마다 본 모습은, 인생을 달관한 듯 큰 대자로 누워 잠을 자거나, 만화책을 보며 시시덕거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도망자라고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은 사내의 초연한 태도 때문이었을까. 나의 내부에서 점점 자라나던 못마땅함이 엉뚱한 상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파란만장’이 나의 돈을 갖고 달아난 중학교 동창과 공범이라는.
버거킹에서의 우연한 만남 후 가진 첫 술자리에서 대화는 예상외로 길어지고 있었다.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세련된 말투를 구사하는 그 친구의 눈빛이 사뭇 진지한 때문이었을까. 반듯한 정장에 넥타이를 맨 믿음직한 회사원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5년간 모아온 돈이 사라지는 건 눈 깜짝할 사이였다. 적금 모두가 펀드 광풍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게 보편적 흐름이고 유행이었다. 뒤처진 인간이라고 은근히 그들의 시선에서 나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 어차피 사기가 아니었더라도 돈을 날렸을 것이다, 그러니 사기이든 인터넷 사이트는 폐쇄되어 있었고, 종적을 감춘 동창을 찾으려 사방을 뒤지는 몇 개월 사이 나의 얼굴은 거뭇해졌고, 울긋불긋 여드름이 솟았으며, 황량한 겨울처럼 차가워져갔다. 잠결에서조차 걷잡을 수 없는 바람이 나의 의식으로 비집고 들어와 몸을 뒤척였다. 동창과의 불편한 조우를 기대하며 모르는 번호에 올라타는 게 어느 새 습관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정우와 함께 옷가게를 내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으니까.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한 방법들 중 하나가 되었고, 총구의 방향이 파란만장을 향한 것도 비슷한 이유일 터였다. 도피중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파란만장을 애타게 찾고 있을까. 이런 자를 방관한다는 게 옳은 것일까. 아니, 신고한다면 포상금으로 3천만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다가도 즉결 재판해야 한다는 강렬한 적개심이 나를 할퀴고 지나갈 때면 찍찍거리는 쥐새끼를 돌멩이로 내리찍다가 온 몸에다 피를 흠뻑 뒤집어쓰는 꿈에서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눈을 뜨면 햇살이 바늘같이 뾰족한 대낮이었다. 야간 PC방으로 인해 밤낮이 바뀐 하루하루가, 일주일 단위로 시간이 팝콘처럼 튀어 올랐다. 어느 덧 손에 들고 쥐어진 상상의 돌덩이는 미안한 감정에 융화되어 차차 작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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