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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뺨을 스치는 깃털의 촉감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눈을 떴다. 어둠이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몸이 차갑게 굳어가고 있음을 깨닫고선 등짝이 흠칫 떨렸다. 칠이 벗겨진 그네 기둥 하나에 등을 기대어 졸음운전을 하듯 졸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비비고 주위를 둘러보자 무수한 낙하산처럼 가늘게 휘날리는 눈발과 함께 바스락거리는 추위 사이로 공원 밖으로 몇몇 행인들이 추상화처럼 흘러가는 게 보였다. 바람 한 자락이, 세게 움켜쥔 내 손에서 얼음조각처럼 부서져 발치로 후드득 쏟아졌다. 차디찬 공기를 가슴 가득 담았고, 알싸한 기운이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왔다. 휴대전화의 진동음이 다시 허벅지에서 울기 시작했다. 부재중 전화였다. 나는 확인하지 않았고, 대신 단물이 빠져 딱딱해진 껌을 뱉어냈다.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나간 것 같았다. 공원 입구의 쓰레기통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조끼를 벗은 다음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 벤치로 되돌아와 벤치 등받이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받치고 앉았다. 주머니에서 빳빳한 껌을 하나 꺼내 씹었다. 위태로운 촛불처럼 나는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세계를 돌리는 발전기인 양 턱을 움직였다. 건물 가득 차오른 빛과 대조적으로, 내가 앉은 공간은 어둠에 완전히 묶여 있었다. 공원 밖을, 각진 건물들을, 통유리 안의 환한 불빛을 나는 날카로이 노려보고 있었다. 간판들의 불을, 이 세계의 빛을 깡그리 꺼뜨리고픈 욕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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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헝가리 구두를 6월에 구입한 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구입하는 거야 여름에도 봄에도 얼마든지 가능하니 말입니다. 또 반드시 ‘줄줄이 비엔나’ 때문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게, 크악, 크악, 오랫동안 구두를 동경해오다 몇 해 전부터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가죽 구두를 그것도 한 여름에 신을 계획을 세워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줄줄이 비엔나'는 방아쇠 역할을 한 셈이겠군요. 크악, 크악.
수업을 마치고 동료들과 카페에서 잠시 토론을 한 후 집으로 오다 중학교 동창을 만난 게 시작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지지리도 못생긴데다 새까만 피부 탓에 촌닭처럼 보인다고 늘 놀림을 받던 녀석이었는데, 그 친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번에는 제가 긴장하여 휘청거리고 말았습니다. <야, 반갑다, 진짜, 정말로, 반갑다, 넘넘, 반갑다, 정말, 진짜, 아, 반갑네, 하하, 너무, 너무 반갑네. 하하. 반갑다, 미치도록, 하하> 저도 모르게 내뱉은 장황한 인사가 저를 더욱 당혹스런 기분으로 몰아가는 바람에 결국 눈을 내리깔고 말았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패배를 시인하는 동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넌 아직 여자 없냐? 하는 득의만만한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크악, 크악. 인사를 나눈 후 곧장 헤어지면서 흘끗 바라본 여자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몸매는 늘씬했고, 하늘거리는 푸른 색 원피스를 입은 채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물고 있었습니다. 크악, 크악. 저는 땅을 보며 다시 중얼중얼 침을 뱉기 시작했습니다. <저 따위 상판 때기로 여자를 사귈 수 있다니, 빌어먹을. 이건 치욕이다> 그러다 적개심이 돌연 선글라스에게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따위 상판 때기에 끌려 다니는 골빈 년. 저 년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야?> 환한 미소를 띤 미미를 중심으로 친구들이 빙 둘러싼 풍경을 본 직 후 엉뚱하게도 화가 솟구친 것과 비슷한 기분이더군요.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크악, 크악. 그들에게 저주를 퍼붓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전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고,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진 저는 비도 피할 겸 서둘러 지하철의 화장실로 달려 내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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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스키니 진에 롱부츠를 신고 등교하는 게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몸의 일부처럼 편안해졌습니다. 집을 나서기 전 아침마다 느끼는, 부츠의 깊은 구멍 속에 발을 쏙 집어넣을 때의 짜릿한 쾌감에 이어 무언가에 푹 빠져든 듯한 아늑한 기분을 오후 수업이 끝나는 내내 느끼고 있으면 다른 누군가가 되는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혀 양 팔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아아, 부츠에 올라탄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이런 게 행복이란 거구나. 부츠를 신은 채 집안 여기저기를 활보하기 시작합니다. 근사한 일이지 않습니까? 상상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한 후 거실의 전신 거울 앞에 서서는 빙그르르 돕니다. 또 다시 돕니다. 돌고, 돌고 선풍기처럼 회전합니다. 어느 새 그는 한 마리 우아한 백조가 되어 푸른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크악, 크악. 곧 거리의 사람들은 지상을 활보하는 한 사내에 경악하겠지요. 찌는 듯 무더운 여름날에 부츠를 착용하다니! 아아, 그에게로 향할 군중들의 시선을 상상해보십시오. 크악, 크악. 바깥은 일주일후로 다가온 장마의 전조인지 바람 한 점 불지 않은 채 끈끈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매미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는 전형적인 여름의 흐름 속에서 무릎까지 올라온 부츠는 계절파괴라는 또 다른 폭발적 효과를 가져다주겠지요. 크악, 크악. 왜, 왜 부츠를 겨울에만 신어야 합니까? 크악, 크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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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떠오릅니까! 크악, 크악. 기껏해야 농구화처럼 발목까지 올라오는 앵글 부츠가? 특수 용도로 사용되는 장화가?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 겁니까!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텐데! 짜잔! 그렇습니다! 양 볼에 한 가득 공기를 머금고 금괴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듯 츠, 하고 불어보십시오. 부-우-츠, 하고 말입니다. 츠, 에서는 무시하는 듯한 표정을 앞세우고 흥, 하고 튕기듯 소리내야 합니다. 다시, 따라해 보십시오. 부-우-츠, 흥, 하고 말입니다. <부-우-츠, 흥.> 이제 아시겠지요.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장 40센티미터의 헝가리 산 물소가죽 롱부츠. 그날 저는 이 헝가리 산 롱부츠를 신은 채 교정을 배회했던 것입니다. 크악, 크악. 오리와 해파리와 보쌈을 먹었던 그날도 저는 롱부츠에 올라타고 있었습니다. 그들 뿐 아니라 누구도 통바지 밑으로 살짝 드러난 구두코가 무릎까지 올라온 무지막지한 부츠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크악, 크악. 걸을 때마다 양 다리를 콱 조여 주는 팽팽한 긴장감과 묘하게 어우러진 쾌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크악, 크악. 보이는 게 전부라고 믿는 그들을 향해 저는 속으로 빙긋 웃어주었습니다. 크악, 크악. 호일 펌을 한 이튿날도 물소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는데, 미미와 만났더라면 저는 입고 있던 통바지를 훌훌 벗어던져버리고 안에 껴입은 그레이 스키니 진과 롱부츠를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통바지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하고 있었는지 아시겠지요. 왜 그렇게 많은 땀을 흘리느냐고? 날씨가 더워서라니, 아니지요. 날씨가 더워서라니, 아아, 아니지요. 그 두꺼운 통바지 안에다 꼬깃꼬깃 그레이 스키니 진을 껴입고 있었으니, 게다가 물소가죽 롱부츠를 신고 있었으니! 크악, 크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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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운명적인 일이 마침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운명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크악, 크악. 그녀가 제 뒤에 앉은 게 단지 자리가 없어서였을까요? 여지저기 빠진 이처럼 빈자리가 많았는데도 그녀는 왜 제 뒤에 앉은 것일까요? 이것이야말로 운명적 이끌림이 아니었을까요? 그 날 수업도 저는 여전히 무관심 속에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제 신경은 이미 미미의 재잘거림에 온통 집중되어 있었으니까요. 전날 명동에 옷을 사러 간 모양이었습니다. 연설을 하거나 발표할 때와는 또 다른 감미로운 속삭임이 제 뒤통수를 간질이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저는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어 재채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부츠 신은 남자가 멋있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망치 모양이 공기로 화하여 제 뒤통수를 사정없이 강타한 까닭이었습니다. <맞아. 맞아. 부츠 신은 일본 남자들 정말 멋있더라> 아아. 멋있더라. 멋있더라. 나를 향한 구원의 속삭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크악, 크악. 그렇습니다.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집에 오는 내내 부츠라는 단어가 제 머릿속을 어찌나 콕콕 쪼아대는지 도로의 지나가는 차들의 경적소리마저도 부츠! 부츠! 하고 짖어대고 있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책상 맨 밑의 서랍을 조심스레 열었습니다. 오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라면서 저는 어둠 속에 웅크린 물소의 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속삭였습니다. 얼마나 답답했니. 한 번도 밖에 나간 본 적이 없던 물소. 이제 그도 타인과 연결될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드디어 나의 사랑스런 물소를 소개합니다! 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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