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턱의 동작을 멈추고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빛은 여전히 그곳에 떠 있었다. 세계는 나와 상관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울타리를 가운데 두고 세계는 저쪽에, 나는 이쪽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누나의 망막과도 같은 짙은 어둠 속에서, 뜨거움과 차가움의 경계에서 눈물이 뺨을 지나 턱 아래로 떨어지고 있음을 문득 알아차렸다. ‘황제구이’의 화제 후 뉴스와 시사 잡지를 통해 얼마간 대중으로부터 관심을 받아 환한 대낮으로 떠오른 누나는 죽음으로 그렇게 삶을 보상받았다. 그러나 모든 게 의문이었다. 서울행을 결심할 때부터 ‘우리’를 의식에서 지우려 한 게 아니었을까, 내가 할머니를 버림으로써 다시 누나와 나, ‘우리’가 되었지만 누나는 여전히 나를 짐으로 여기지 않았던가. 그러한 확신 속에서 밤을 뒤척이다가도 생각을 고쳐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누나가 떠나면서 내 서랍에 남겨놓은 연락처 때문이었다. 어머니처럼 새벽에 그냥 달아나려고 했다면 굳이 연락처를 남겨놓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날 저녁 허겁지겁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막 현관문을 나서는 누나를 몰래 뒤따라가자는 엉뚱한 생각이 찾아온 것도 이 모든 혼란과 무관치 않으리라. 그러나 밤참을 챙겨온 ‘동생’ 대신 뜻하지 않게 나는 그날 어쩔 수 없이 ‘남자’가 되어야만 했다. ‘패밀리 레스토랑’은 없었다. ‘에덴동산’으로 휘청휘청 걸어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으로 어둠이 황폐해져가고 있었다. 문득 묘한 느낌이 엄습했다. 나는 손에 힘을 넣었다. 전해오는 감각은 뚜렷했다. 주먹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가죽 장갑이 새까만 어둠과 몸을 섞어 만들어낸 착시였던 것이다. 장갑 낀 손을 가만히 응시하자, 다시 손을 감싼 까만 장갑이 밤의 어둠과 섞이어 까마귀의 광활한 날개처럼 팽창하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찾아온 웃음처럼 휴대전화가 울었다. 허벅지가 가냘프게 자맥질했다. 정우인지도 몰랐으나 나는 받지 않았다. 곧이어 다시 떨리기 시작했을 때 배터리를 몸체에서 완전히 분리시켰다. 팽팽한 정적이 보름달처럼 찾아오면서 바람이 차차 잦아들고 있었다. 구겨진 부동산 명함이 길게 포물선 그리다 툭 떨어져 흰 눈에 섞여들었다. 둥글게 몸을 말아 어둠의 손바닥에 웅크려 앉은 나의 머리 위로 하얀 눈이 끝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밤새도록 내릴 모양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