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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낼 수 없는 대화 - 오늘에 건네는 예술의 말들
장동훈 지음 / 파람북 / 2021년 12월
평점 :

역사적 증언으로서, 천 개의 언어를 뛰어넘는 한 점 그림의 힘!
사제복을 입은 은둔의 인문학자가 '지금 여기'에 던지는 지적 파문
'끝낼 수 없는 대화' 중~
지치고 힘든 일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듯한 표지 그림, 마치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이 작품은 고된 노동의 현장을 담아낸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대패질하는 사람들>로 적나라하고 현실적인 인간의 삶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끝낼 수 없는 대화'의 저자는 성직자이자 학생들을 가르치는 역사학자인 신부님인데요. 그럼에도 이 책은 기독교의 상징성을 담은 '종교화'가 아닌 교회 울타리를 벗어난 '세속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교회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대화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해줄 말과 건네야 할 메시지가 있으며, 세상과 나눠야 할 대화가 있습니다.
(중략)
진리가 변하지 않는 무엇이라면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다. 오래된 우물이라고 물마저 오래된 것일 순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일 역시 흠 없이 진리를 지켜내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그것이 실로 '살아있는 말'이 되도록 생동하게 하는 것일 테다.
(중략)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실로 거룩한 것이라면, 예술작품이 무릇 인간에 대한 저마다의 깊이대로의 고뇌와 질문이라면, 성속의 경계를 걷어내고 그렇게 한참 내려가다 보면 결국 인간이라는 궁극의 질문에서 함께 맞닿아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끝낼 수 없는 대화' p. 7~9
저자는 누구나 다 알 것 같은 유명한 작품부터 표지에 나오는 작품처럼 숨겨진 명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들에 담긴 그 시대의 사회상과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 담긴 미술작품에는 '신'이 아닌 '인간'이 존재합니다. 황제로 즉위하는 나폴레옹,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소작농들, 복잡한 기계들 사이를 오가며 작업에 매달려있는 노동자들, 고된 노동과 빈곤에 찌든 세탁부 엄마, 성공하거나 실패한 혁명가들, 우리 곁에 있는 이웃들..., 모두 교회의 울타리 밖에서 만날 수 있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보다는 '삶을 위한 예술'의 시선, 이 책은 현대문명과 오늘의 사회에 관한 질문을 담은 1부 '나와 당신의 세상', 지금, 여기를 살아내야 하는 실존으로서의 인간을 조명한 2부 '어둡고도 빛나는', 상품처럼 소비되고 있는 종교와 교회의 내일은 묻는 3부 '종교 너머의 예수', 시대와 이념, 신념과 체제, 이상과 현실의 사이에서 힘겹게 피워낸 예술가의 성취를 담은 4부 '혼미한 빛' 까지 네 가지의 주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모든 것을 어떤 물리적인 현상으로 설명하고 환원할 때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단지 신화나 낭만만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존재할 이유, 삶의 가치와 같은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더 근본적인 것들의 상실일 테다. 기계 문명의 도래는 자신만만히 '인간의 시대'를 열어젖혔지만, 인간은 실상 호퍼의 군상처럼 더 고독하고 허무해졌다. '끝낼 수 없는 대화' p.36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지 않고 체험을 그린다"라고 한 미국 사실주의 대표작가 에드워드 호퍼, 그의 그림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인공적이고, 익숙하지만 낯설고, 무심하지만 정교합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 중 보자마자 '앗, 이건?' 하고 소리를 질렀던 작품이 있습니다. 이 책에 담긴 그림들 중 익숙한 그림이나 조각 작품들이 많지만, 유독 이 그림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왜일까요?

그건 바로 그림책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에서 비슷한 구도의 장면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권정민 작가님이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오마주한 것일까요?
인간은 풍요로워졌지만 헛헛해졌고, 안전한 도시는 꾸렸어도 안락한 '집'을 얻진 못한 것이다.
(중략)
오히려 그것은 '길들지 못함'이라는 인간 존재의 비참함이다. 자연으로부터 단절되고 문명이라는 공간에 유폐된 인간은 과르디니의 표현대로 뿌리내릴 곳 없이 쉼 없이 부유할 뿐이다. 카페, 술집, 극장, 휴양지, 호텔 객실, 주유소처럼 모두 언젠가는 떠나야만 하는, 결코 주인일 수 없는 공간에 계류할 뿐인 호퍼의 그림속 주인공들처럼. '끝낼 수 없는 대화' p.34~35
종교개혁과 프랑스혁명은 길드에 속해 의뢰받은 작품을 작업하기만 하면 되었던, 그래서 안정적인 지위를 보장받던 화가의 좋은 시절을 빼앗음과 동시에 소재 선택의 폭이 넓어짐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작품의 소재는 신화나 종교적인 모티브에 국한되지 않고 풍경이나 평범한 일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주문자가 따로 없는 작품, 그것도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이니 관례화된 양식을 따를 이유도 없었겠지만, 성의 없는 옷매무새나 주머니에 무심히 찔러 넣은 손과 같은, 관객을 깔보는 듯한 도발적 느낌이 굳이 필요했을까, 하지만 19세기는 그런 시대였다. '끝낼 수 없는 대화' p.54
혹시 '울트라마린 블루'라는 색을 알고 있나요? 저자의 부모님은 미술 시간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다양한 색이 있는 물감을 선물해 주었는데요. 이름만으로도 색을 짐작할 수 있는 색이 있었지만, '울트라마린 블루'라는 색은 이름만으로는 어떤 색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 색은 우리가 '군청'이라고 부르는 색이라고 하는데요. '울트라마린'이 '바다 너머'란 뜻이며, 그건 그 색의 빛을 내는 데 필요한 광물인 청금석을 이탈리아 바다 건너 중동 지역에서 들여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탈리아 유학 시절에 그 의미를 알고 더 이상 생소하지 않은 색이 되었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어떠한가요?
미술사적으로 보면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스크로베니 경당의 블루는 화가 자신이기도 하다. 투시도적 비율과 그림에 배경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해 인물들의 몸짓과 행동, 표정을 일상에서 마주할법한 정제되지 않은 현실의 사람들로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은 천 년간 고수된 정형의 틀을 부수는 혁명적인 일이었다.
(중략)
계절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쇠락이 시작되듯 조토는 중세미술의 절정인 동시에 몰락의 서막이고,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인 셈이다. 그의 세기는 또한 아직 중세라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고 그렇다고 충분한 빛을 머금은 여명도 아니었다. 저 모호한 블루, 푸른 밤은 이로써 화가 자신이기도 한 것이다. '끝낼 수 없는 대화' p.223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자주 다니던 시절에도 작품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건 아니었으며, 설사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분명한 의도가 있더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했었는데요. '끝낼 수 없는 대화'를 읽고 나니, 미술작품에 담긴 그 시대의 사회상과 역사를 알아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무엇보다 그 작품들 속에 담긴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왜 그렇게 표현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 같습니다. 끝으로 현재의 우리들에게 전하고픈 말을 책속 마지막 글로 대신합니다.
세상도 교회도 또 한 번의 '거대한 전환' 앞에 서 있다.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혼미한 내일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있는 것일까. 팬데믹 선언 직후 곳곳에서 피어나던 인문학적 성찰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전염병의 '종식'과 '박멸'만이 모든 담론을 집어삼킨 듯하다. '어떻게'라는 방법이 '어떤 세상'이라는 철학을 압도한 모양새다, 이대로 '보건'이 '보안'으로, 과학이 종교로, 인간이 순수한 생물학적 존재로, 목숨이 무심한 통계수치로 쪼그라들어도 그만인 것일까. 낯선 사막의 땅에서 마주친 떠나지도 머물지도 못하던 그들처럼 가늠할 수 없는 내일 앞에 꼼짝없이 갇힌 지금의 모두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모든 형태와 이름의 초안을 포기할 용기, 그리고 늘 새롭고도 가장 오래된 궁극의 질문, 인간은 무엇인가를 되묻는 것은 아닐까. '끝낼 수 없는 대화' p.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