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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을 까는 여자들 - 환멸나는 세상을 뒤집을 ‘이대녀’들의 목소리
신민주.노서영.로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평점 :

최악과 차악만을 던져주는 사회에서 20대 여자들은 어디로 향하는가
'판을 까는 여자들' 중~
이대녀? 이대남? 이대 나온 여자와 이대 나온 남자? 작년에 '이대남'이라는 말을 뉴스를 통해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이대 나온 남자를 말함인가? 했었는데, 알고 보니 20대 남자를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후 '이대녀'도 등장했고, 그들은 제더 갈등으로 이슈화되어 다양한 매체에 오르내렸습니다. 코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도 이대녀와 이대남은 여지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이슈화되면서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세대 갈등 뿐 아니라 젠더 갈등 또한 극과 극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20대들이 스스로 자신은 이대녀, 이대남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20대는 그냥 20대로 지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대가 다르기도 하지만, 가까이 지내는 20대들 중 뉴스에서 나오는 것처럼 극과 극에서 젠더 갈등을 겪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판을 까는 여자들'은 90년대생 이대녀인 신민주, 노서영, 로라가 들려주는 이대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1부 '이대녀로 산다는 것', 2부 '백래시에 맞서다', 3부 '우리가 가진 이름으로' 까지 모두의 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회 보좌관은 왜 다 중년 남성일까, 이대녀는 정말 정치에 관심이 없을까, 이대녀가 트위터로 향한 이유, 남초 사이트에서 '공정한 여론' 찾기, 코로나 시대의 자발적 실업자, N번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총여학생회를 폐지시킨 권력, 원피스와 탈코르셋 등등 이대녀가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현안과 그에 대한 분석 그리고 그녀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주 접하기는 했어도 이대녀와 이대남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가질 일은 없었습니다. 또한 굳이 이대녀와 이대남으로 호명하며 성별 갈라치기를 하는 것 또한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에서 20대로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구절판 행사들을 견디기 싫어졌을 때, 세 명의 '이대녀'는 이 책을 쓰기로 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구절판은 음식 아닌가? '구절판을 걷어찰 때 이야기는 시작된다'고 하는데, 도대체 구절판 행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구절판 행사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특정한 이슈에 대한 토론회에 온통 남성 패널을 부르고, 여성을 구색 맞추기로 딱 한 명만 섭외하는 행사. 구절판은 팔각으로 된 나무 그릇 가운데에 밀전병을 두고 주변에 오색찬란한 반찬을 까는 음식이다. 구절판 행사라는 말은 어느 날 한 여성 친구가 줌(zoom)으로 진행하는 토론회에 발제자로 섭외됐을 때의 상황이 기원이 되었다. 그날 행사에도 여성 발제자는 친구 외에 단 한 명도 없었다. 토론회가 시작되자 줌 화면은 친구 주위에 남성 발제자 8명이 배치된 모습이 되었다. 마치 구절판처럼. p.5
이렇게 구절판 행사들에 오르내리던 그녀들에게 새로운 이름이 생겼습니다. 바로 '이대녀'입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이대남의 표를 잡기 위한 정책들을 제시하면서 이대녀는 또 잊혀져 가기 시작"합니다. 저자들은 "모든 이대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닌, 이대녀들이 정치와 사회 영역에서 더 많은 결정권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또한 "나이와 성별보다는 역사와 목표, 노력과 결실이 이대녀를 설명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담겼지만, 모두 다 담아낼 순 없기에, 공감 가는 이야기와 인상적인 이야기들 중 몇 가지만 공유할까 합니다. 글에 대한 코멘트는 생략합니다.
"민지한테 연락이 왔어."
(중략)
그러니까, 이 영상에서 '민지'는 민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MZ세대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었던 것이다.
(중략)
내 동년배들은 아무도 자신을 MZ세대라고 명명하지 않는다. 래퍼 이영지가 <라디오스타>에 나와 말했던 것처럼 청년 세대는 MZ세대라는 말을 "알파벳 계보를 이어가고 싶은 어른들의 욕심"정도로 파악한다. 끊임없이 알파벳으로 청년 세대를 분석하기 위해 애쓰는 것으로 모자라 정치인들은 우스꽝스러운 청년 세대 캐릭터까지 시도하기 시작했다. P.43~44
분명한 것은 언제나 내 삶을 바꿨던 것은 최악과 차악 중에 선택을 강요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젊은 여성으로서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을 거부했던 순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중략)
그러니까 나는, 당신은, 그리고 이대녀는 앞으로의 선거에서 표가 아니라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숫자로만 표현되는 인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정치를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대변되기를 기다리기보다 우리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나아가기를 바란다. 기회는 누군가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연단에 설 준비가 되어 있다. p.50~51
어머니라는 말은 여성의 이름을 지웠다.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딸로 불리는 동안 여성은 자신을 위한 시간과 자원을 잃었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포용적인 이미지를 표시하기 위해 손쉽게 사용되기 십상이었고, 그럴수록 여성에게 요구되는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포장되었다. 희생이 아름다운 것이 되는 순간, 희생하는 주체의 행복은 멀어진다. p.83
정치인들은 수많은 이대녀들이 쏟아낸 말을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N번방 사건이 국회 국민동의청원 10만 명의 서명을 받은 후에도 국회의원들은 망언을 쏟아냈다. (중략)
딥페이크(deepfake)를 이용한 범죄와 N번방 사건을 구분하지 못하는 의원들 덕분에 법 개정은 형편없이 이루어졌고 이는 더 큰 분노의 도화선이 되었다. p.96~97
2020년 제21대 국회 최연소 국회위원인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원피스를 입고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간 순간, 그는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논란이 된 이유는 표면적으로 설명하자면 그전까지 아무도 화려한 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국회에 등원한 적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단지 그 이유라고 하기엔 그에게 쏟아진 말들의 수위가 지나치게 높았다. "국회의 권위를 무너뜨린다.", "체통을 지켜라.", "술집 여자 같다."라는 말들과 함께 온갖 성희롱적 언사와 '관종'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나는 그 모든 언행이 여성 정치인에 대한 폭력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중략)
국회에서 허용하지 않는 것이 바지인가 원피스인가는 다르지만 분명 그 두 시대는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여성 의원은 한 사람의 정치인이기 전에 한 사람의 여성으로 먼저 간주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겪는 일들은 이 세상에서 수많은 여성이 겪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p.171~173
기성세대 정치인들은 여전히 정치를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으로 바라본다. (중략) 그 정치가 포기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 정치를 신뢰할 수 있을까? (중략) 정치가 가장 고통받고 있는 가장 약한 개인을 외면한다면 진보고 보수고 무슨 소용일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 50대 정치인들은 혀를 찰 것이다. 현실을 모르고 이상주의에 물들어 있다고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낸 현실에서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나의 현실이 있다. 그리고 나의 현실에서 성평등은 이상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 가장 가까운 정치다. P. 201~202
에필로그에는 저자들이 왜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 가장 쓰고 싶었거나 어려웠던 글은 무엇이었는지, 책이 출간되고 나면 무얼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데요. 저자들은 책이 출간되고 나면 '악플'이 달린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닌 글에 대한 것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직도 할 말이 많음을 이야기 합니다. 사회가 변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이대녀들의 이야기가 나오겠지요?
어떤 분이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누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썼기 때문에,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면 공감을 하면서 읽어주셨으면 좋겠고, 모르는 내용이었다면 이런 세계가 있구나 하고 생각해주시면 좋겠네요. 세상에 우리 같은 사람도 있고, 우리 같은 정치가 있다는 게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
'에필로그 인터뷰' 중~
이 말은 로라 작가의 말입니다. 이 말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굳이 이대녀, 이대남이라 호명하면서 성별 갈라치기를 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20대로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떨까 합니다. 젠더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이대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기를, 지금까지 미처 몰랐던 "이런 세계가 있구나"하고 생각해 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꿈오리 한줄평 : 편견과 선입견을 걷어내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20대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