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6
정이현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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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정말 안녕한가, 돌이킬 수 없는 큰 병을 앓고 있진 않은가, 진정 소중한 것을 상실하고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작품해설 중

그 날은 세영의 생일이었다. 늘 아침에 일어나면서 하루를 시작할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죽는 것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는 자신이 죽는 순간의 구체적인 약과 제조법까지도 생각해 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특히 남의 인생에 끼어들거나 영향을 미치는 일은 '손톱의 때'만큼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세영의 생인인 그 날엔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가 열리는 날이었고, 그녀는 그 곳에 가고 싶지 않고 피할 방법을 모색한다.

그녀의 남편 무원은 현재 영동의 작은 호텔의 사장이자 전무이사로 가 있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무원은 선친이 물려준 이 지방의 작은 호텔을 매각하지 않고 자신이 운영하겠다며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온라인 커뮤니티 '파사(파는 사람)'에 가입해서 활동하다가 자신을 오해한 한 남자(닉네임 '발새')로부터 집착에 가까운 관심과 연락을 받고 있다.

- p. 69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은 복잡하고 성가신 일이었다. 무원은 설명이나 해명을 하는 대신 침묵했다. 사람들이 그 침묵을 수긍과 순응의 의미로 해석한다는 걸 성인이 되고서 알았다.

세영이 사는 동네는 1989년 개발 계획이 발표된 1기 신도시 시범 단지이고 재건축 이슈가 있는 곳이다. 동네 분위기를 보니 아이들의 학업에 많이 치중하는 곳으로 보이고, 세영 역시 딸인 도우가 공부를 잘해 도우를 중심으로 자신의 일과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역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보니, 쓸데없는 말들이 돈다. 남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쓸데없는 말들 말이다.

세영의 약국은 마치 동네의 사랑방인 듯 이 사람 저 사람이 와서 말들을 끄집어 내거나 말들을 흘리고 간다. 그렇지만 남에게 조그마한 영향도 주고 싶지 않은 세영은 노련하게 그런 말들을 흘려보낸다.

- p. 49

어떤 말들은 그 위에 티끌 하나 날아와 앉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다.

그리고... 학폭위의 결과로 인한 파장으로 동네는 다시 술렁인다. 하지만 그 술렁임에는 그 파장에 대한 애도나 위로, 애틋함은 전혀 없었다. 그저 언론에 보도되면 큰일이라는 정도의 곤란함이 그들에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정도의 곤란함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도우만을 걱정하는 세영과 대비되는 도우와 아이들의 모습은 그래서 더 온전한 슬픔이 느껴지는 듯 하다.

- p. 161, 작품해설 중

세속 도시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은 자신들의 죄를 덧입고 덧칠해 이제 죄책감조차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변형되어버렸지만 새로이 태어나 아직 죄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은 다르다.

-

정이현의 소설은 우리에게 마지막 경고를 내리는 듯하다. 어른들이 저지르는 은밀한 폭력이 소중한 아이들을 떠나보낼 것이며, 투명한 거짓으로 지은 세속 도시는 머지않아 신이 지배하는 거룩한 불모의 세상이 되리라는 두려운 진실 말이다.

세영의 모습 속에 내 모습이 보여 조금 움찔했다.

빈 말이나 헛 말,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과 행동을 피하는 모습은 그것이 큰 잘못이라고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난 그들을 욕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피해를 준 것도 없어, 라고 항변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내 인생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주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이지만, 실상은 앞으로 나서는 게, 그들 안으로 들어가 적극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게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내 스스로가 죄를 덧입고 덧칠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 사이에 둘러싸여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희미해지고, 굳이 그들과 다른 지점에 서 있고 싶지도 않고 말이다.

그래서 시간이 없다며 온전히 슬퍼하고 온전히 애도하려는 도우와 아이들의 모습이 더 아름답고, 이 세속적인 어른은 가슴 한 곳을 아프게 찔린 것 같다.

- p. 147

그 애는 진심이다. 뜻을 알 수 없는 뜨끈한 감정이 솟구친다.

세영은 주저앉고 싶다. 도우가 바라는 대로 되돌아 나가주고 싶다. 강이의 빈소에 엎드려 오래오래 울고 싶다.

세영은 움직이지 못한다. 간신히 지금은 힘을 아껴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간구하는 밤이 언젠가 올 것이다. 짐작보다 더 빨리.

등 뒤에서 적막한 저녁의 구름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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