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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은 들키지 않는다 - FBI 인질 협상가와 경영컨설턴트의 섬세한 설득
아델 감바델라.칩 매시 지음, 박세연 옮김 / 제이포럼 / 2025년 10월
평점 :
협상이라는 단어는 왠지 거창하고 멀리 있는 일처럼 들리지만, 사실 우리는 매일 협상 속에 산다. 급여 협상, 업무 분장 협상, 학회와의 일정 조율, 팀 내부의 갈등 중재, 누군가 내 기획을 채택하도록 설득하는 일까지. 외형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상대를 움직이게 해야 한다.”
그래서 흥미로웠다.
인질 협상가의 전술을 일상의 비즈니스 상황에 적용한다는 이 책은 제목부터 크게 질러 놓는 책들이 종종 허무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기대감은 어쩔수 없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전직 FBI 인질 협상가와 PR 전문가다. 조합이 묘하게 재밌다.
목숨이 오가는 현장에서 감정이 폭발한 상대를 설득해야 했던 사람과, 이해관계가 뒤엉킨 비즈니스 세계에서 정보를 다루고 여론을 움직이는 일을 했던 사람.
둘이 만난 결과가 “단순 설득”이 아니라 “상대의 심리를 움직이는 고위험(high-stakes) 설계”라는 형태로 정리된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이들이 강조하는 협상은 논리 싸움이나 말빨 경쟁이 아니라, 상대의 감정, 동기, 공포, 바람, 숨겨진 의도까지 읽어내는 과정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느끼게 된다.
가장 인상적인 개념은 Forensic Listening다.
“잘 들으세요”가 아니라 “상대가 하고 있는 말보다, 하지 않고 있는 말을 들어라”는 기술이다.
이는 말투의 흔들림, 단어 선택의 미묘한 변화, 잠깐의 침묵, 회피하는 소재, 방어적으로 던지는 농담 속에 감춰진 진심을 감각적으로 포착하는 기법이다. 그리고 실제 협상은 그 숨겨진 감정에 반응했을 때 열린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를 기반으로 이어지는 개념이 ‘언급되지 않은 내러티브(un-stated narratives)’다.
표면적 요구가 아니라 실제 욕구를 파악하는 전략이다. “나는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 돈 때문에 나오는 말인지, 안전과 존중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나온 말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내 역할을 존중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건 단순한 느낌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정말로 원하는 교환가치의 정체를 드러내는 신호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지점은 협상을 감정의 충돌로 보는 관점이다. 인질 협상은 당연히 논리로 설득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저자들은 비즈니스 협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사람은 논리적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적으로 결정한다. 그래서 핵심 기술은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이다. 감정을 다루지 못하면 협상은 항상 전면전으로 치닫고, 이기는 사람도 지는 사람도 생기고, 결국 관계는 깨진다. 저자들이 말하는 ‘좋은 협상’은 서로의 체면과 감정을 손상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타협점을 찾는 일이다. 놀랍게도 이것은 비즈니스 책이라기보다 심리학에 가깝다.
그다음으로 흥미로운 부분이 분위기 만들기와 감정 프레이밍이다. 사실 이 챕터는 약간 불편하면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설득하려면 논리보다 이야기와 감정을 써라”라는 조언이다. 단호함보다 설득, 지시보다 공감, 압박보다 동맹이라는 방식이다. 학계나 조직에서는 감정 얘기를 하면 비전문가로 취급받기 쉬운데, 정작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감정이라는 사실이 씁쓸하게 공감된다.
그러나 가장 현실적인 기술은 마지막에 나온다. 상대의 조작을 감지하고 방어하는 법. 협상 테이블에 앉는 모든 사람이 선의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 의도적으로 정보를 흐리는 사람, 프레임을 조작하는 사람, 감정적으로 몰아붙여 상대를 무너뜨리는 사람도 있다. 저자들은 이런 방식을 트릭이 아니라 패턴으로 바라본다. 즉, “사람은 위협을 느끼면 교묘하게 흔들고 방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협상가는 감정을 조절하고, 정직함과 단호함 사이 균형을 유지하며, 의제를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면, 이 책은 “무엇을 말하라”보다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듣고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집중한다. 협상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제대로 읽는 사람이 이긴다는 철학이 일관되게 이어진다.
물론 결점도 있다. 인질 협상 현장에서 통했던 전략이 모든 직장 갈등, 회의, 연봉 협상, 평가 면담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감정 기반 전략이 지나치면, 사실과 데이터가 중요한 학술 심사나 정책 협의에서는 어설픈 감상론처럼 보일 수도 있다. 게다가 책을 읽다 보면 인간의 감정과 내러티브를 이용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다소 위험하게 들릴 수 있다. 결국 설득의 기술이 윤리를 잃는 순간, 협상은 관계적 파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감나는 현실 조언 하나는 분명히 남는다.
협상은 상대를 이기기 위한 게임이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사람은 이성적 수학공식이 아니라, 이야기와 감정으로 설득된다.
그래서 이 책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식으로 설득하려고 하면 반박이 나오고, 감정으로 설득하려고 하면 경계가 생기지만,
상대가 스스로 말하도록 만드는 순간 협상은 이미 절반 끝난 것이다.
현대 조직과 비즈니스 세계가 냉정하고 복잡해지고 있는 지금, 협상은 더 이상 극단의 상황에만 필요한 기술이 아니다.
어쩌면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
말로 생존하는 인질 협상가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