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긴 잠이여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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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밤이라고 하면 대개 화려한 네온사인 같은 빛을 떠오르지만, 이 소설에서의 밤은 빛을 집어삼킨 쪽에 가깝게 느껴졌다. 겉으로는 오래된 사건을 파헤치는 탐정물로 분명 범죄와 증언과 증거가 보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도 사건보다 사람이 더 눈에 밟혔다. 누구의 잘못인가보다, 누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찾기 위해 책장을 넘겼다. 진실보다 무거운 건 말해지지 않은 말, 피식 웃고 넘긴 장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내리던 커튼 같은 것들. 줄거리보다 감정과 죄책감이 잠잠해졌다가 다시 올라오고, 사라졌다가 다시 스며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서사보다 정서의 잔향을 따라 읽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특히 집요한 건, 사람은 사건을 말할 때보다 말하지 않을 때 훨씬 많은 걸 드러낸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이다. 모르는 척 넘어갈 때, 알면서 외면할 때, 미안하다고 하지도 용서하지도 않은 채 다음 날을 맞이하는 순간들. 그 공백을 느끼게 된다.

 

작가는 인간이 버티는 방식을 너무 잘 아는 작가인 듯 하다. 붙잡고 사는 것도 버티는 거고, 잊어버리는 척 사는 것도 버티는 거고,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버티는 방식일 때가 있다. 그래서 말이 적어서 담백한 게 아니라, 말이 적어서 더욱 묵직하게 와닿았다.

 

사와자키 탐정은 그런 인간의 어둠을 기어이 보고 마는 사람이다. 대단한 정의감도 없고 영웅적인 사명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외면하지 못했다. 진실을 밝혀도 아무도 구원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이미 알고 있는 비극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 그래서 이 작품에서 해결은 종지부가 아니라 또 다른 침묵이 길게 늘어뜨려진다.

 

그렇게도 아팠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까지.

 

그리고 이 소설의 바깥 표면에는 범죄가 있지만, 속에는 시간이 들어 있다. 과거는 끝났는데, 이상하게 현재는 그 과거를 계속 살게 되었다. 오래 전에 끝난 사건이 지금도 누군가의 삶을 바꾸고, 어떤 사람은 파멸하고, 어떤 사람은 해방되고,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진실이 문제를 끝내지 않았고, 진실을 안 이후의 삶이 더욱 문제였다. 그리고 소설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 질문을 독자에게 내던진다. 진짜 내던지는 느낌이다. 받던지 말던지. 무심하게.

 

그래서 이 책을 덮고 나면 마음이 이상하게 정리되지 않은 슬픔과 감동이 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묘한....

체념이라고 해야하나....

상처위에 삶은 계속되고, 잊지도 못하고 사람들은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게 삶의 잔인성같다. 따뜻하지 않은 작품이지만, 그것이 훨씬 더 인간적이었다.

처음에는 한국어 제목 안녕, 긴 잠이여를 그냥 예쁘게 다듬은 문학적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다 읽고 나니 제목이 원제보다 더 잘 맞는다. 소설 속 어떤 사람들은 너무 긴 꿈속에 갇혀 있고, 어떤 사람들은 차라리 깨어나지 않으려 하고, 어떤 사람들은 깰 용기가 없어서 잠든 척 살아간다.

 

그래서 이 제목의 인사는 단순히 깨어난다가 아니라, “깨어나야만 한다는 걸 안 순간에 보내는, 씁쓸한 작별 인사에 가깝다. 각성을 하고 싶지 않은게 각성하는...

깨어났다고 해서 행복이 오지 않으니깐.

그런데도 사람은 깨어난다. 살아야 하니까.

 

결국 이 소설은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사람을 남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각자의 상처를 견디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많은 추리소설이 누가 그랬는가를 묻는다면, 이 소설은 끝까지 그렇게 살아가는 게 어떤 기분인가를 묻는 듯하다.

 

뾰족하게 남는건 없는데 뭉근하게 마음을 뻐근하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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