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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리의 뼈 ㅣ 로컬은 재미있다
조영주 지음 / 빚은책들 / 2025년 5월
평점 :
세 작품은 각각 과거로의 회귀, 죽음 직전의 응시, 망각된 시간의 복원을 다루지만, 결국 하나의 질문에 다다른다.
“우리는 지금, 현실을 살고 있는가?”
『크로노토피아』의 인물은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후회는 반복되고, 삶은 루프처럼 감긴다.
『은달의 뜨는 밤, 죽기로 했다』의 인물은 찰나의 순간에 멈춰서 삶과 죽음의 저울을 들여다본다.
『쌈리의 뼈』의 인물들은 살아 있으되 기억을 잃거나, 기억을 품은 채 과거를 걷는다.
이들은 모두 시간 속에 존재하지만, 정작 ‘지금 여기에 있음’을 살지 않는다.
시간을 지나가지만, 현실에는 머물지 않는다.
치매에 걸린 윤명자는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머릿속은 과거에 닿아 있다.
딸 윤혜환은 엄마의 오토픽션을 이어 쓰며 문학 속 가상의 세계에 빠져든다.
가상, 망각, 기억, 허구, 반복. 이들은 ‘현재’라는 자리를 점유하지 못한다.
우리의 삶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현대인’이라고 불리지만 결고 현재를 살지 못한다. 현실을 살면서도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이라는 과거형의 후회에 머물거나,
‘언젠가는 좋아질 거야’라는 미래형의 낙관으로 지금을 유예한다.
결국 오늘이라는 시간은 무심히 흘러가고, 우리는 그 자리를 비워둔 채
과거나 미래의 망상 속에 자신을 분실한 채 살아간다.
생각해보면, 현재는 정말 존재하는가?
1분 전의 나와 1분 후의 나는 확실히 다른 존재지만, ‘지금’이라는 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를 기준 삼아 과거와 미래를 나누지만, 정작 현재는 그 경계 위에 있는 찰나적 착각에 불과한 것 아닐까?
조영주 작가는 이 3부작을 통해 시간의 구조에 균열을 내고, 그 틈 사이로 존재를 들여다 보게한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며, 시계 바늘처럼 정확하게 나아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시간은 반복되기도 하고, 잊히기도 하며, 때로는 완전히 멈춰버리기도 한다.
『크로노토피아』에서는 되감기고, 『은달』에서는 정지하며, 『쌈리의 뼈』에서는 붕괴된다.
흔히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이미 이렇게 말한다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우리가 ‘그 순간’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시간을 일방적인 흐름으로 오해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흘러간 과거는 후회의 목록으로 남고, 다가올 미래는 불안과 기대의 혼합물로 덮인다.
우리는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쫓기며 살아진다.
매 순간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불안,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참고 견디는 현재.
그래서 조영주 작가는 말한다.
“시간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언제나 곁에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저 지나간 숫자이고 망각된 기억이며, 채우지 못한 공란일 뿐이다.
『쌈리의 뼈』를 읽고 리뷰를 쓰지말까 했다.
치매, 망각, 가족, 사랑, 연대 그리고 회복... 이런 키워들은 내 입장에선 흥미롭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을 연결짓는 소재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다. 요즘 폭력적 성향이 많이 올라와서 종종 검, 총, 불 같은 단어에 끌리기도 한다. 그래서 잠시 뜸을 들였다. 과연 조영주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진짜 그거일까?
내가 외면한 기억들, 내가 놓친 말들, 내가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순간들.
그것들을 조영주 작가는 시간 3부작을 통해 부드럽고도 단단한 문장으로 하나하나 꿰매어준다.
삶이란 그렇게 꿰매는 일일지도 모른다. 시간 속에서, 관계 속에서, 기억 속에서 삶의 자락을 다시 꿰어 잇는 일. 꿰매진 자국이 남을 지라도 그 또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작품들은 같은 현실에 살고 있지만, 누군가는 과거에, 누군가는 망상에, 누군가는 욕망과 현실의 어디쯤에 걸쳐있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볼수 있다.
삶은 언제나 ‘지금’에 있다고. 그러나 그 ‘지금’을 살아낸 사람은 드물다고.
과거를 반복하거나, 죽음을 응시하거나, 망각 속을 헤매며 우리는 현실을 통과하고, 현실을 부재한 채 시간에만 거주한다.
조영주 작가의 시간 3부작은
시간을 말하지만 시간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자리엔 우리가 놓친 현실, 지금, 나 자신이 있다고 일깨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