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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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세계적인 영화감독이자 에세이스트로, 『어느 가족』, 『그리고 아버지가 된다』 등 가족과 기억, 사회적 경계를 다루는 작품들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자로도 잘 알려진 그는 감독이자 작가로서, 항상 '삶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해 사유해온 인물이다.

『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映画の生まれる場所で)』는 그가 프랑스에서 촬영한 영화 『진실(La Vérité)』의 제작 과정을 중심으로 쓰인 에세이이다. 단순한 제작 비화에 머무르지 않고, 언어의 장벽, 문화적 충돌, 창작을 둘러싼 협업의 모순까지 정직하게 고백한다. 일본과 프랑스라는 서로 다른 제작 환경 속에서, 그는 감독이자 인간으로서 흔들리고, 고민하고, 결정하는 순간들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중략)

아쉽게도 나는 그의 영화를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유독 눈길이 가는 건 고레에다 감독이 남긴 ‘메모’들이었다. 그것은 회의록도, 시나리오도, 일기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머릿속에서 막 태어난 이미지들—촬영을 앞두고 반복해 그려낸 장면 구성, 배우의 움직임, 프레임의 감정값까지—영화가 되기 전의 영화들이 그 속에 살아 있었다. 나는 그의 놀라운 꼼꼼함에 감탄했고, 단정한 손글씨에서 전해지는 진지함에 또 한 번 놀랐다.

“목소리는 그 사람의 또 다른 지문”이라는 말이 있다면, 글씨는 아마 그 사람의 정신세계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쓴다고 했지만, 그 정리된 생각은 하나의 독립된 예술 언어처럼 느껴졌다. 악필이지만 끊임없이 메모하는 나로서는, 그의 필체가, 그의 생각이, 그의 그림과 그것을 구성해내는 작은 상자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생각을 하나의 단어와 이미지로 정리하고, 그것을 순서대로 배열해 타인과 공유한다는 것은 내게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내가 아무리 사회화가 많이 되어도, 그건 참 버거운 과정이다. 그런데 그는 그 일을 무심한 듯 툭툭 해낸다. 솔직히 그의 다이어리를 훔치고 싶었다.
그런데… 나 일본어 모름. ^^;;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영화 『진실(La Vérité)』은 2019년 제76회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개막작(오프닝 상영작)으로 초청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일본에서는 『真実(しんじつ)』이라는 제목으로 정식 개봉되었다. (중략)특히 일본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제작 환경에서 만들어진 첫 외국어 영화라는 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게도 중요한 전환점이 된 작업이다.

이 책은 창작이라는 일이 어떻게 타인과의 충돌 속에서 다듬어지고, 작가 자신의 내면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어쩌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쓴 가장 조용하면서도 치열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종이 위에서 태어난 프레임들, 그것을 구성한 문장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놓인 메모들—우리는 그 메모의 자리에서, 영화가 태어나는 정확한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
세상에 없다고 믿어지는 것을, 내 머릿속에서 꺼내어 종이 위에 옮기고, 그것을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다시 그려지게 만든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닐까?

그의 글에는 욕지기가 나올 법한 순간들도 많다. 요즘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총’이고, 폭력성은 극대화된 시기다. 그런 나는 분명히 격하게 반응했을 상황들을, 그는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느긋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별거아닌 듯 담담하게 헤쳐 나간다. 뭔가 해탈한 느낌이랄까. 글이라 그런가?
그래서일까. 요동치던 내 마음이 그를 따라 잠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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