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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그것과 그리고 전부
스미노 요루 지음, 이소담 옮김 / ㈜소미미디어 / 2025년 4월
평점 :
지금의 일본 청춘소설은 대부분 너무 친절하다. 다정한 서술, 아름답게 포장된 상실, 감정선의 예측 가능한 흐름. 죽음조차 하나의 성장 장치로 기능하며, 주인공들은 눈물 한 바가지 흘린 뒤 훌쩍 커버린다. 왜 그렇게 다들 성장시키려하는지. ‘아름다운 이별’은 하나의 장르가 되었고, 그것은 소비되기에 알맞다. 문학은 때로 감정의 안전지대를 제공해야 하기도 하지만, 생과 사의 경계를 다루는 작품이라면 그것이 갖춰야 할 윤리적 긴장감이 있다.
이번 작품은 그 흐름에서 살짝 비껴나 있다. 흔한 드라마틱함이나 플롯 중심의 반전 없이, 조용히 정적을 견디며 서사를 끌고 간다. 이야기의 배경은 그저 여름방학, 그 속의 짧은 여행. 중심 인물은 10대의 남녀, 겉보기엔 수많은 일본 청춘소설의 전형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이야기의 핵심이 관계의 진전이 아니라 소멸의 방식에 있다는 점이다.
작품은 죽음을 정면에서 마주하지 않는다. 병명은 언급되지 않고, 죽음의 예고도 감춰져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 점은 때로 답답하다. 명확히 알고 싶은 욕구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 침묵은 외면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주제를 감정적으로 낭비, 소비하지 않기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 주인공 사브레는 삶의 끝자락에 서 있지만, 그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녀의 말투, 눈빛, 기묘한 여정의 목적을 통해 삶의 피로와 소멸의 기미를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생사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매우 윤리적이다. 죽음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창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를 성찰하는 내면의 거울이다. 문학은 그 거울을 조심스럽게 비춰야 하며, 독자로 하여금 한 인간의 삶을 재단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작품은 그 지점을 정확히 지킨다. 감정은 절제되어 있고, 설명은 최소화된다. 그로 인해 오히려 더 강한 여운을 남긴다. 이것이 좀 답답하게 읽힐 수도 있다. 이건 뿌우연 안경을 끼고 있는 듯한 느낌, 혹은 실루엣만 보이는 그림자 영화를 보는 듯도 하다.
주인공 메메는 사랑을 품고 있지만 끝내 말하지 않는다. 사브레는 죽음을 준비하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지 못한 채 마무리된다. 그러나 바로 그 ‘말하지 않음’ 속에서, 사랑의 본질과 죽음의 품위는 오히려 또렷이 떠오른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이렇게 썼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침묵의 미덕이 아니다. 언어가 닿을 수 없는 지점에서, 침묵이야말로 유일한 표현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 작품 속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선택이다. 말하지 않는 대신, 곁에 머무르고, 눈빛을 건네고, 함께 걷는다. 그 모든 것이 언어보다 정직한 방식으로 감정을 전한다.
그래서 이 소설이 전하는 가장 깊은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말해지지 않은 것들 속에 존재한다. 말하지 않음이 곧 외면이 아니라, 사랑의 가장 조심스러운 형식이자, 죽음을 품위 있게 감당하는 마지막 태도인 것이다.
같은 작가의 전작, ‘췌장을 먹고 싶다’는 작품은 정반대의 전략을 취한다. 죽음을 전면에 내세우고, 감정을 적극적으로 연출하며, 사건을 통해 서사를 밀어붙인다. 물론 그 역시 의미 있는 시도였다. 그러나 눈물을 유도하는 구성은 독자로 하여금 죽음을 단지 ‘감동의 재료’로 소비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이번 작품은 그러한 위험을 피한다. 슬픔을 강요하지 않고, 교훈을 들이밀지 않는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작품이 죽음을 통과한 후 남겨진 자의 변화보다, 죽음을 준비하는 자의 존엄에 더 무게를 둔다는 사실이다. 흔히 청춘소설은 살아남은 자의 성장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오히려 "떠나려는 사람"의 선택을 조명한다. 그것은 매우 드문 시선이고, 현실적이며 동시에 문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