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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 함정임의 유럽 묘지 기행
함정임 지음 / 현암사 / 2024년 5월
평점 :
🌊한줄평) 영면(永眠) 작가를 만나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을 가면 그 도시의 묘지를 간다고 한다. 생(生)과 사(死)가 공존하기에.
작가는 생(生)과 사(死)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데, 그 묘지가 모두를 아우르기 때문에 꼭 들린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묘지는 공원같다고 했다. (영상에서도 공원처럼 보였다. )
이 책은 유명 작가들의 묘지를 여행한 묘지여행기다.
장담컨대, 여타의 여행기보다 무척 독특하지만,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작가가 있나 하고 책을 볼 것 같다.
죄와 벌에서 그렇게 말을 많이 했던 톨스토이
담배 꽁초가 많을 것 같은 알베르 카뮈
도대체 뭘 말하는지 아직도 알 수 없는 ‘냉무, 병맛’ 체호프
아직도 거론되는 사랑의 형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등등 묘지를 통해 작가의 삶을 되짚어 본다.
오늘 보부아르와 사르트르가 특별 출현을 많이 하는데, 이 둘이 합장을 한지는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뭔 합장까지...
.15~16
그들은 이제 ‘꼼짝없이’ 하나의 묘석 아래 묶여 있게 된 셈이다. 살아생전 경어를 사용했고, 한집에 함께 살지 않았던 사람들인데 말이다. 여행을 가거나 호텔에 방을 얻을 때면 나란히 각자의 방을 얻고, 같은 구역의 각자의 아파트에서 생활하며, 수시로 각자의 연인들을 거느리며 51년간의 독특한 동거 관계를 유지했던 그들이 아닌가. 그런 마당에 사후 그들을 하나의 묘석 아래 묶어놓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가 보부아르를 거기에 묻었는가. 사르트르를 보내며 썼던 보부아르의 『작별의 의식』은 결국 ‘합일의 의식’을 예고한 것인가.
.25
보부아르는 사르트르가 죽으면 곧바로 따라 죽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남은 사람은 떠난 사람의 생애 마지막을 돌보고, 떠난 뒤의 일을 수습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가지 체력, 정신력, 오랜 세월 존경과 애정으로 다져진 연대감이 필요하다.
.407
도스토옙스키가 비둘기들의 친구가 되어 앉아 있는 국립도서관 앞에 이르러 작가의 동상에 등을 기대고 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여행기인데, 분명 사진도 많고 좋은데, 글이 너무 좋다. 어느 한 부분에서 끊을 수가 없다.
.410
체호프의 소설을 읽은 일은 그가 불러낸 그들과 함께 저마다의 사정(운명)에 대한 답(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답은 구하려고 할수록 찾아지지 않는다. 본질의 속성처럼. 다만, 끌어안고 함께 탄식하고 아파하고, 다독일 뿐이다. 다독임 끝에 누군가는 체념처럼, 또 누군가는 다짐처럼 되뇌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아름답다. 삶이 계속되듯이”
체호프가 이렇게 글을 썼으면 내가 ‘냉무’라고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감히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체호프 보다 글이 훨씬 잘 읽히고, 이해가 쉽다. 뭘 말하려고 하는지도 알겠다.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
내가 체호프에 대해 너무 박하게 이야기한 게 아닌가 싶다.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든다. 마음의 문을 열고~
여행에세이들이 참 많다. 그 책들은 수명이 짧다는 게 참 아쉽다. 분명 그 책이 느낌을 가지고 여행을 가면 그 느낌이 안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에 나온 장소는 책의 좋은 느낌과 이미지가 있어서 그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좋다, 좋겠다’라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가고, 내일 가도 그 자리 그 느낌 그대로 있을 것 같다.
작가의 생애 이야기도, 작가의 묘지를 찾기 위한 작가 일행의 에피소드도 마치 내 일같이 혹은 나의 미래 에피소드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책이 크지만,종종 작은 사진이 있어서, 검색해본다는 것이다.
사진은 인터넷에 더 많기도 하겠지라고 생각할순 있지만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사진 크기가 더욱 아쉽다.
이참에 나도 묘지를 한 번 가고 싶다.
야스나리와 헤르만 그리고 보부아르 묘지!!
죽기전에 한번 가볼수 있을깡?
.407 도스토옙스키가 비둘기들의 친구가 되어 앉아 있는 국립도서관 앞에 이르러 작가의 동상에 등을 기대고 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410 체호프의 소설을 읽은 일은 그가 불러낸 그들과 함께 저마다의 사정(운명)에 대한 답(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답은 구하려고 할수록 찾아지지 않는다. 본질의 속성처럼. 다만, 끌어안고 함께 탄식하고 아파하고, 다독일 뿐이다. 다독임 끝에 누군가는 체념처럼, 또 누군가는 다짐처럼 되뇌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아름답다. 삶이 계속되듯이"
.15~16 그들은 이제 ‘꼼짝없이’ 하나의 묘석 아래 묶여 있게 된 셈이다. 살아생전 경어를 사용했고, 한집에 함께 살지 않았던 사람들인데 말이다. 여행을 가거나 호텔에 방을 얻을 때면 나란히 각자의 방을 얻고, 같은 구역의 각자의 아파트에서 생활하며, 수시로 각자의 연인들을 거느리며 51년간의 독특한 동거 관계를 유지했던 그들이 아닌가. 그런 마당에 사후 그들을 하나의 묘석 아래 묶어놓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가 보부아르를 거기에 묻었는가. 사르트르를 보내며 썼던 보부아르의 『작별의 의식』은 결국 ‘합일의 의식’을 예고한 것인가.
.25 보부아르는 사르트르가 죽으면 곧바로 따라 죽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남은 사람은 떠난 사람의 생애 마지막을 돌보고, 떠난 뒤의 일을 수습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가지 체력, 정신력, 오랜 세월 존경과 애정으로 다져진 연대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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