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에 맞서다 - 누구나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위해
유아사 마코토 지음, 이성재 옮김 / 검둥소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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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을 때, 기쁨으로 가슴이 떨리고 두근거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빈곤’에 대해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하는 이 책은 그런 지적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좋은 책이다.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쉽고 명료한 언어로 빈곤의 문제를 해설하는 저자의 능력이 탁월하다. 저자의 뛰어난 필력은 오랜 반-빈곤 활동 경험과 학문적 소양이 상승 작용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빈곤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이 갖는 진정성과 치열하고 깊은 사유의 결과로 보인다.

경제적 부국인 일본에서 다수의 인구가 넷카페, 게스트하우스 등을 전전하며 머무를 곳이 없는 난민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저자는 이러한 일본의 현실을 한번 미끄러지면 바닥까지 추락하게 되는 ‘미끄럼틀 사회’로 진단한다. 아동학대, 부모 유기 혹은 살해 등의 범죄를 ‘마음’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로 접근하자는 것이 저자의 제안이다.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빈곤의 문제, 따라서 사회적 책임의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빈곤에 대해 ‘가난=경제적 결핍’이라는 통념을 깨고 사회적 지위의 부재 혹은 박탈의 문제로 접근한다.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에 따르면 빈곤은 단순히 물질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잠재 능력을 박탈당한 상태”로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부자유”이다. 저자는 ‘다메’라는 개념을 통해 아마티아 센의 통찰력을 확장시킨다. ‘다메’란 일본어로 ‘고여있는 물(저수지)’에서 ‘고여있는 무엇’으로서, 일종의 유무형의 공공재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의지할 수 있는 가족, 친족,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인간관계의 ‘다메’”라고 본다.(p94) 빈곤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다메’가 모두 사라지고 박탈당한 상태라는 것이다. 즉 수중에 돈이 없더라도 인간관계, 복지 시스템 등 안전망이 존재한다면 인간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배제시키는 ‘빈곤’ 상태에 놓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 2004)”에서 가졌던 몇 가지 의문들이 해소되었다. 영화는 각각 아버지가 다른 아이 넷을 둔 싱글 맘이 아이들을 놓아두고 사라지면서, 보호자를 잃은 아이들끼리 살아가다가 결국 비극적 상황에 이르는 모습을 담았다. 내가 가졌던 의문은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점, 아이들은 마치 섬에 조난당한 사람들처럼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영화는 아이들을 떠난 그 엄마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유보했다. 불안정한 직업을 가진 싱글맘이 혼자서 아이 넷을 키우기란 버거웠을 것이다. 다만 내가 가졌던 의문은 왜 이 엄마의 버거움을 그 어느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었을까 하는 점, 왜 이 엄마는 아이들을 떠나기에 앞서 누군가에게, 어딘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이 영화의 엄마와 아이들이 놓인 상황이 바로 ‘빈곤’의 핵심이며, 문제는 단지 그들이 가난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사회적 연결망의 부재가 가난한 사람들의 비가시성과 고립을 초래하고, 사회적 지위를 박탈하여 난민 상태로 만든 것이다.

일본 사회가 ‘미끄럼틀 사회’의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단지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 주장이다. 저자는 빈곤을 개인의 게으름 탓으로 돌리는 ‘자기책임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을 응석(어리광)으로 치부하는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자기책임론’이 빈곤 문제의 근원이라면, 상호부조와 사회적 연대를 되살려 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회복시켜주는 것이 그 대안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풍랑이 일 때 작은 어선들을 서로 매어 전복되지 않게 연결하는 것을 의미하는 ‘모야이’의 전통을 되살리는 것.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 그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난민들에게 안식처와 안전망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빈곤 문제 해결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빈곤 문제를 좀 더 확장된 틀에서 인식할 수 있게 됐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특히 빈곤 문제 전문가인 역자의 해설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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