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der Trouble :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 (Paperback) - 『젠더 트러블』원서 Routledge Classics 49
주디스 버틀러 지음 / Routledge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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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트러블 번역본이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지가 어언 반년이 지났는데, 아직 출판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주디스 버틀러에 대한 해제나 인용을 접할 때의 단상은 한국 내에서 이 텍스트가 그다지 여성주의 정치학의 전통에 깊이 천착하면서 읽히고 소비되는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텍스트를 읽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지만, 이 텍스트가 애초에 쓰여진 맥락에 대한 파악은 중요하다고 본다. 이 책은 1980년대부터 서구 페미니즘 아카데미아 내부에서 치열하게 제기된 '여성' 범주, 'sex/gender'의 이원적 범주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그 출발점을 갖고 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지식의 지평을 뒤흔들어놓은 '혁명적' 텍스트로 평가하고 있고, 나 역시 이 책이 주는 통찰력과 학문적 상상력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물론 버틀러의 화법에서 다소 '남근적' 어조가 거슬리기는 하지만, 이 책이 다나 해러웨이, 조안 스콧의 논의와 함께 당대 페미니즘 인식틀을 흔들어 놓고 성숙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제대로 된 번역본이 나온다면 이 책을 읽는데 크게 도움이 되겠지만, 여성주의 인식론과 정치학에 관심이 있다면 원서와 함께 읽을 것을 권한다.

1. '여성' 범주, 페미니즘의 주체에 관한 소고

주디스 버틀러는 처음부터 “페미니즘 이론 및 정치학에서 전제되고 있는 ‘여성’이라는 범주가 과연 여성주의에 필수불가결한 것인가?”라는 페미니즘 이론 및 실천의 근간을 흔드는 도전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젠더 트러블」이라는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처럼, 그는 ‘젠더’ 범주들에 대한 비판적 계보학적 지도를 제시함으로써 범주로서의 ‘여성’이라는 주체 없이도 새로운 페미니즘의 지평이 가능하다는 점을 제시한다. 1장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에서 버틀러의 논의는 페미니즘 이론에서 전제되고 있는 ‘여성’이라는 범주, 그리고 ‘섹스/젠더’간의 구분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분석적으로 담론적 ‘순환의 폐허’라는 실패를 가져왔음을 피력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우선 페미니즘에는 하나의 보편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 전제하에 사용되고 있는 ‘여성’이라는 범주를 둘러싼 문제점들은 단지 그 범주가 보편적 가부장제나 공통의 억압 등 또 다른 전제들을 불러온다는 점을 넘어선다. 버틀러는 사법적 권력의 기능이 제한, 금지, 규제, 통제 등의 작용을 통해 그것이 재현하고자 하는 주체를 만들어낸다는 푸코의 논의를 빌어, 페미니즘의 주체로서 ‘여성’이라는 범주를 ‘담론 혹은 법 이전의 주체’로 사용하는 문제, 바로 그 사법적 권력의 효과라는 점을 놓치게 되는(혹은 은폐하게 되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비판의 출발점은 여성주의 이론들이 섹스나 젠더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질문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섹스의 이원성을 담론 이전의 영역으로 설정함으로써 섹스의 내적 안정성과 이원적 틀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문화적 ‘구성’의 의미를 둘러싼 쟁점들 외에도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구성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비물질적 의지가 활성화시켜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수동적 매개체’나 도구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버틀러는 정치적 전략으로 ‘여성’이라는 범주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여성’이라는 공통의 범주가 있다고 미리 가정하는 정치학은 대화의 가능성을 방해하는 정치학, 즉 실패하는 정치학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결국 ‘여성’이라는 범주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바로 그러한 불완전성으로 인해 그것 자체가 규범적 이상으로 작동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여성주의가 토대주의적 정치학이 되지 않으려면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하나의 전제로 설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자신의 논거를 펼치기 위해 구체적으로 보봐르, 이리가레, 위티그 등의 이론가들이 ‘여성’ 범주와 ‘섹스/젠더’ 구분을 사용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추적한다. 버틀러에 의하면 이 이론가들이 얼핏 매우 다른 이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원론을 효과적으로 해체하지 못한다는 점, 젠더 비대칭성을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다는 점, 그리하여 결국 젠더 비대칭성과 이원론 안에서 끊임없이 맴돌 수밖에 없는 이론적 폐허를 만들어낸다. 먼저 보봐르의 경우,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칠 때 ‘정신/몸의 이원론’을 의지하고 있으며, ‘행위(deed)’ 이전의 ‘행위자(doer)’로서 주체의 존재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한편 이리가레는 ‘하나가 아닌 섹스’라는 테제를 통해 주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실체의 형이상학과 서구의 헤게모니적 재현에 대한 비판하고 있다. 이리가레는 남근이성중심적 의미화 경제에서 여성은 재현될 수 없는 것, 언어적 불투명성과 부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리가레 역시 남성중심적 의미화 경제를 전체화하고 적을 하나로 동일화함으로써 ‘억압자의 전략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하는’ 역담론에 불과하다. 즉 버틀러는 이점에서 이리가레가 남근중심주의의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반복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버틀러는 유물론적 페미니스트인 위티그에 대해 가장 신랄한 비판을 하는 듯하다. 버틀러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위티그는 여성이 보편적 주체의 지위에 설수 있도록 ‘섹스’의 해체를 요구한다. 그 해체의 과정에서 ‘여성’은 특수하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관점을 모두 취해야만 한다. 자유를 통해서 구체적인 보편성을 깨달을 수 있는 주체로서 위티그의 레즈비언은 실체의 형이상학에 전제된 인본주의적 이상의 규범적 약속을 쟁점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확증한다.” 위티그의 이론에서 버틀러가 지적하는 실패의 지점은 ‘자기 동일성을 지닌 실체로서의 섹스’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자유’라는 특성을 지닌 ‘사람’ 인식적 주체를 전제함으로써 ‘섹스’라는 범주를 생산하고 자연화하는데 책임이 있는 실체의 형이상학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에서 버틀러는 보봐르, 이라가레, 위티그 등의 이론가들의 젠더 범주 계보학의 지도를 통해 이러한 이론들이 결국은 ‘젠더’라는 환영적 구성물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고 일갈하는 듯하다. 사회적으로 구축되고 유지되고 있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인식가능성(intelligibility)가 균열되는 순간은 ‘허큘라인 바뱅’과 같은 ‘비일관적’, ‘비연속적’ 존재들의 문화적 출현이다. 그러나 이해가능성(intelligibility)이 매트릭스에 균열을 가져오지 않는 이론은 남근이성중심주의의 모방적인 복사 혹은 패러디에 불과하며, 그러한 이론에 기반한 정치는 절망의 정치라는 것이다.

버틀러는 젠더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며, being이 아니라 doing이라고 본다. 즉 사법적 규제의 실천들이 만들어내는 효과인 동시에, 남근이성중심주의와 강압적 이성애가 만들어낸 완벽한 허구이다. 버틀러는 여성주의는 이러한 수행적 과정으로서의 젠더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교활한 정치적 작용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패러디에서 정치로’라는 제목의 결론에서 버틀러는 페미니즘의 정치를 구성하는 젠더 존재론은 없다고 못을 박는다. 섹스의 이분법을 자연화하는 의미화관습을 해체하는 효과적 전략으로 그는 ‘Undoing Gender'를 제안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2. 페미니즘의 intelligibility 확장하기

Gender Trouble의 1999년 개정판 서문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장장 20페이지에 걸쳐 1990년 초판 발생 이후 10년간 이 책이 일으킨 반향에 대한 소회, 이 책이 소비되고 해석되는 방식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애초에 Gender Trouble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바가 어떤 의도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상술하면서, 버틀러가 여기서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은 1989년 원고 작성 당시 자신의 의도는 당시 여성주의에 만연해 있었던 이성애적 가정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러한 논의의 핵심은 여성주의 학문의 내재적 비판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지 여성주의라는 학문을 송두리째 폐기처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여기서 버틀러는 자신의 논의를 젠더의 ‘사회적 구성성’을 둘러싼 여성주의 이론의 논쟁, 즉 정확히 여성주의 계보학에 위치시키고 있다. 또한 이원적 젠더, 혹은 젠더의 이원성이라는 인식론적 틀을 깨지 못하는 페미니즘의 한계가 대륙 철학인 후기 구조주의, 특히 후기 구조주의 프랑스 페미니즘의 미국식 전유 방식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기획은 ‘후기 구조주의를 여성주의적으로 재정식화하는 것’임을 밝힌다.

젠더 트러블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 혹은 오해 중 하나는 페미니즘의 토대로서의 ‘여성’ 범주의 지위를 해체하는 것이 곧바로 페미니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일 것이다. 버틀러의 젠더 관련 논의를 비판적 학문으로서 지속적인 페미니즘의 논쟁의 역사 속에서 읽어나가는 것, 그리고 동시대의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접점 혹은 긴장 국면 속에서 젠더를 둘러싼 앎의 가능성의 영역(intelligibility)를 어떻게 변화시켜나갔는지에 주목하면서 읽어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 젠더 이원성을 와해시키는 방식, 페미니즘의 토대 범주로 작동해 왔던 여성 범주에 대한 비판적 해체 등 버틀러의 핵심 논의들을 이러한 지형 속에서 읽어나감으로써, 정치적 영역으로서의 학문적 영토 내에서 이론을 생산하고 읽어내고 인용하고 확장하는 학문적 생산자의 포지션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어빙 고프만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버틀러의 수행성에 관한 논의와 무척 닮아있으면서도 뭔가 몹시 다르다는 막연한 느낌을 가졌었다. 고프만과 버틀러의 논의가 아카데미아에서 매우 다른 이론적, 정치적 함의를 갖는 이유는 다름 아닌 저자의 포지션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결국 “이론의 외양은 그것의 문화적 전유를 통해서 변화되어 왔다”는 버틀러의 지적처럼, 어떤 개념이나 범주는 어떤 다른 범주 혹은 지적 전통과 논쟁하고자 하는가하는 점, 즉 학문적 접점이나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다른 지적 전통과의 비판적인 대화 관계(dialogic relation) 속에서 그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다.

젠더 트러블이 난해한 텍스트로 받아들여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버틀러의 독특한 화법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견해를 먼저 제시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해 가는 버틀러의 화법은 “이론의 역할은 인식론과 정치학의 정전이나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능력의 지속적인 확장을 통한 사회 변화를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인 듯하다. 젠더 트러블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버틀러의 이론적 지향점은 이론의 규범적 지위 싸움이 아니라 에피스테메 매트릭스 재구축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알 수 있음의 범위와 한계를 밝히고’, 그리하여 그 규범적 인식의 틀 밖에서 질문할 수 있게 하여, ‘알 수 있음(intelligibility)’의 경계를 끊임없이 문제 삼는 것이 바로 버틀러가 추구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버틀러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사회를 변화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서구 페미니즘 이론 내에서 페미니즘이 토대로 삼고 있던 ‘여성’이라는 개념,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정합성’의 문제를 계보학적으로 해체하고 그 인식론적 한계를 폭로함으로써 ‘frameworks of intelligibility’의 판을 새롭게 짜고자 하는 버틀러의 시도는 ‘인간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정치학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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