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여성생활사 자료집 1 이화한국문학연구총서 2
정형지 외 옮김 / 보고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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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을 열어보기 전에『17세기 여성생활사 자료집』이라는 제목에서 언뜻 17세기를 살았던 여성들의 일상을 직접 접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17세기로 돌아가 직접 살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탐방하듯이 말이다. 책의 목차에서 이 책이 사대부 남성들이 여성들‘에 관해’ 쓴 글의 묶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살짝 실망했던 건 아마도 그러한 나의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개념어로 가득한 사회 과학 책만을 편독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였던지라, 문학 작품을 접하는 것 자체가 신선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이 독특했던 건 다차원적 독해 경험을 안겨주었다는 점이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사대부 남성들의 눈을 통해 17세기 여성들의 ‘실제’ 모습을 읽어내야 한다는 (무)의식적 언명이 작동하는 것을 감지했다. 사실 ‘17세기 여성생활사 자료집’이라는 책의 제목에 충실한 독서를 하기 위해서 텍스트와의 거리두기, 다차원적 독해라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유교 가부장제 사회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사대부 남성의 목소리를 통해 표현된 여성들의 삶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그 글들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또 다른 삶의 모습들을 상상해 보고, 다시 여성들의 삶을 바라보고 언어화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인 글쓴이들의 시각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다층적 차원의 읽기가 요구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송시열, 이세백, 조성기, 김수항 등이 써놓은 행장, 묘표, 제문 앞에 역자들이 제시한 간략한 소개말은 그러한 의식적 노력을 자극하여 다차원적 글읽기의 재미와 사유의 깊이를 더해 주었다.


먼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단상들을 간략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17세기 사대부 남성들이 제문, 묘표, 행장, 제문 등의 형식으로 고인이 된 여성을 추모하는 글들이다. 타자의 죽음을 의미화하는 방식은 망자의 총체적 삶에 대한 압축적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을 바라보는 사대부 남성의 의식 세계를 응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당대 양반 여성들의 삶에서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의미화될 수 있는 측면들의 압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행장, 묘표, 제문 등에서 읽어낸 바, 당시 양반 여성들의 삶에 대해 내가 느낀 점은 이렇다. 먼저 이 글에서 여성들은 ‘홍씨, 박씨’ 등 성씨로 불릴 뿐 구체적 이름이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름도 성도 없는 비천한 신분보다야 낫겠지만, 당시 지배적 담론 체계에서 여성들은 망자가 되어서도 개인으로 기억되기보다는 며느리, 딸, 아내라는 가문과 가족에서 그 여성이 놓였던 ‘자리’로서 명명되고 기억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대부의 목소리를 통해 표현된 양반 여성들은 (여성 일반이 있어야 할 ‘자리’ 혹은 ‘위치’로서 명명되는) ‘집단으로서의 여성’과 ‘개인으로서의 여성’의 경계를 오고간다. 망자의 공적과 덕행에 대한 찬양과 글쓴이가 그 여성에 느꼈던 감정의 표현을 보면, 당시 여성들이 딸, 아내, 며느리라는 ‘위치 혹은 자리로서의 여성’과 독특한 개성과 욕망을 소유한 ‘개인으로서의 여성’의 모호한 경계에서 살았다는 점을 짐작하게 된다. 아니 오히려 당시 여성들의 삶은 여성에게 요구되는 역할이 개별 여성의 삶을 총체적으로 구성하고 압도했던 삶이었던 것 같다. 며느리의 묘 앞에서 손자들이 건강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시아버지를 배려했던 며느리의 마음을 찬양한 송시열의 글은 양반 여성의 존재가 죽는 순간까지도 철저하게 가문과 가족을 위한 의무에 복속되어야 하는 존재로 상상되고 강제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며느리의 죽음에서 느꼈던 슬픔과 미안함, 자신을 봉양해줄 자식도 며느리도 없이 홀로 병든 노구를 이끌고 남은 생을 살아가야할 자신의 처지로 인한 두려움과 외로움이 전해지는 조성기의 글 역시 며느리에 대한 다양한 인간적 감정이 기실 가족 구성원들의 복지를 책임져야 했던 여성들의 역할과 그러한 역할 속에서 형성된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감정의 유형들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딸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애정이 표현된 김수항의 글에는 다른 한편으로는 교묘하게 김수항의 가문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집요하게 맞물려 표현되어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17세기 사대부 남성들이 ‘여성’을 어떻게 욕망하고 상상했는가를 말해 주는 글인 동시에 지배적인 유교 가부장제 담론을 통해 여성들에게 허용된 자리는 어디였는가를 가늠하게 해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담론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사대부 남성들, 그 중에서도 특히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던 남성들이 쓴 제문 형식의 글이라는 점에서, 당시 공식적 담론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느끼는 감정들이 어떻게 여성에게 주어진 ‘자리’나 ‘역할’을 통해서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반면 이 글들에는 ‘위치로서의 여성’과 ‘개인으로서 여성, 즉 여성 자기 자신’ 사이를 오고 가면서 양반 여성들이 느꼈을 혼란과 긴장, 다양한 감정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물론 공식적 제문 형식의 글에서 허용된 감정의 경계와 표현될 수 있는 내용의 한계가 분명한 탓도 있다. 하지만 아마도 이 남성들에게는 자신이 말을 걸고 있는 여성 망자들 개개인의 의식 세계에 대한 섬세한 상상력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성들이 직접 써내려간 글에 대한 자료를 읽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아마도 당시 여성들의 삶은 단순히 유교가부장제의 희생자로만 해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전략을 구사했으며, 어떻게 스스로 유교적 가치를 내면화했고, 그 안에서 허락된 권력을 어떤 방식으로 향유했는지,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는지, 그 욕망을 어떻게 개개인이 경험했는지 다양한 목소리가 드러나는 글을 읽고 싶다. 또한 이 책에서 역자들이 각 글 앞에 짧게 제시한 소개글처럼, 당시 여성들의 글과 현재의 역자와 독자들의 다양한 대화를 경험할 수 있는 입체적 독서를 가능케 하는 책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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