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영원히 돌아가는 수레바퀴

 

모든 인간은 제 마다의 삶을 산다. 제 마다 일 인칭의 시점에서 삶을 산다. 수 없이 쌓아지는 우연의 순간들은 한 사람의 고유한 인생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우리는 제 마다 삶이 고귀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비슷한 삶을 산다. 인간이기에 엇비슷한 박자속에서 삶을 살아낸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어른에서 노인으로. 탄생과 죽음의 길목은 누구나 거쳐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영원히 돌아가는 수레바퀴에 몸을 싣는다. 제 마다 자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 자의식을 가진 수많은 인간들. 우리는 그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은 한 수도승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으로 돌아오는 명확한 구조로 영화가 진행되고 있다. 호수 한 가운데 있는 절에 동자승과 노 스님이 살고 있다. 그들은 그 조그만 절에서 참선을 드리고 있고 작은 나룻배를 통해 바깥 세상과 소통한다. 그곳은 하나의 세계이다. 

 

어린 동자승은 재미삼아 물고기, 개구리, 뱀의 등에 돌멩이를 묶는 장난을 친다. 그 광경을 본 노스님은 동자승을 꾸짖고 돌멩이를 풀어주기 위해 길을 나서지만 개구리를 제외하고 죽어있는 물고기와 뱀의 모습을 보고 큰 아픔을 가지게 된다. 노스님은 동자승을 꾸짖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만약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 중에 어느 하나라도 죽었다면 너는 그 돌을 마음에 평생동안 지니고 살것이다"

 

소년이 된 승은 몸을 요양하기 위해 절에 머무른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관계를 나누다 노 스님에게 걸린 탓에 소녀는 절에서 쫓겨나게 되고, 청년 승은 사랑을 찾아 노 스님 몰래 절에서 빠져 나온다. 세월이 흘러 어느 해 가을, 사랑을 찾아 떠난 소년 승이 돌아온다. 살해를 하고 절로 도망친 것이었는데 노 스님은 속세에 쩌든 청년 승에게 바닥에 세긴 반야심경을 조각하라고 시킨다. 경찰은 청년 승을 체포해가고 노 스님은 분신 자살을 한다. 

 

겨울이 되어 감옥에서 출소한 듯한 장년 승은 홀로 절에 들어온다. 그리고 홀로 수련한다. 몸을 닦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한 여인으로부터 아이를 받게 되는 장년 승은 아이를 키우게 된다. 다시 봄이 되어 물고기, 개구리, 뱀의 몸 속에 돌멩이를 집어넣는 아이의 모습을 끝으로 영화는 끝이난다.

 

삶의 무게

 

영화는 처음과 끝이 반복되는 수미 상관의 구조를 하고 있다. 단순히 대칭 되어 있다기 보다는 뫼비우스 띠와 같이 출발점과 도착점이 이어져 있는 상태라고 보는 게 맞을 성 싶다. 물고기, 개구리, 뱀의 몸에 돌멩이를 묶어 장난 쳤던 동자승은 영화의 끝자락엔 장년 승이 되어 노스님과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누구나 제 삶이 독특하다고 믿지만 엇비슷한 인생을 살 수 밖에는 없다. 죄를 짓고, 사랑을 하고, 참회를 한다. 인간의 근원적 조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새로운 동자승 또한 사랑을 할 것이며, 죄를 짓게 될 것이다.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생기는 차이는 발생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밖에는 없는 조건은 일치한다.

 

자의식을 견뎌내라

 

자의식은 병이다. 스스로를 너무 의식하는 자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자의식은 근원적으로 나르시시즘을 장착하고 있다. 때문에 과잉 자의식은 세상의 중심을 지나치게 자신에게 두는 나르시시즘의 극단이라고 할 수 있다. 노스님, 장년승, 새로운 동자승. 이 모두는 영원히 돌아가는 수레바퀴를 구성하고 있는 삼각형이다. 

 

신들을 기만했다는 이유로 영원히 바위를 산 꼭대기로 올려야만 했던 시지프. 그것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다. 모든 인간이 산 꼭대기로 바위를 올려야만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자의식을 극복하고 견뎌내자. 모두가 제 삶에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생을 살아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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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존경하는 학자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이다. 그가 살고 있는 고양이 빌딩엔 약 15만권의 장서가 쌓여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건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였다. 우연찮은 기회로 접한 그 책은 나의 가치관을 송구리째 바꾸어 놓았는데, 그 책을 통해 내가 얼마나 교양이 없는지 절실하게 깨달았고 내가 걸어야 할 길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스물 다섯살 이후로 읽고 쓰는 일이 전부인 삶을 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떠서부터 저녁에 잠들때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나는 책을 읽지 않았다. 언제 책을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정도로 말이다. 내가 인문학에 관심이 생긴건 스물 세살 무렵. 그 때 이후론 간간히 책을 읽긴했지만 한달에 두 세권이 전부였다. 가볍게 하루에 두 세권을 읽어대는 다치바나 다카시는 현 시점 내 인생의 멘토이다. 나 또한 그 처럼 박식해질 수 있다면. 나 또한 그와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는 사진가 와이다 준이치가 서재를 촬영하면서 다치바나 다카시가 자신의 독서 편력에 대해 서술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실로 지의 거장이다.

 

죽음/성/분자생물학/컴퓨터/인공지능/아인슈타인/신경심리학/불교/종교/악마/요괴/신지학/국방/911테러/전쟁/고대사/잉카문명/탈무드/고대어/라틴어/리처드파인만/역사/현대사/이슬람/성서/한문/청춘/신비주의/비트겐슈타인/아랍어/코란/그리스로마/프리먼다이슨/초끈이론/우주를 뒤흔들까/가이아이론/군론/단백질/석유/공산당/비행기/메이지유신/호르몬/지적망국론/석유/미신/과학사/스파이/하수도/스탈린/체게바라/푸틴/사회주의/히틀러/유배/담배/팔루스/소쉬르/기호학/정치학/베버/토니블레어/호모루덴스/프랑스/트로이/암호학/실패학/화이트헤드/프레게/괴델/동남아시아/외교/영화/미학/수학/콜린윌슨/음악학/옴진리교/히로시마/로봇/미디어/그리스도/세계사

 

키워드만 서술한 것이다. 큰 주제서 부터 작게는 인물까지 두서없이 적었는데 보통 사람은 거의 알지 못하는 영역이 많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하나의 영역에 매몰되어 있지 않다. 그는 왼쪽에서 오른쪽 모두를 아우르고 있으며 문학적 지식에서부터 과학적 지식 모두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철학의 종말

 

오늘 날 철학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유용한 학문이 대학을 점유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은 더 이상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더 이상 형이상학에 인생을 거는 사람은 없다. 이제 사람들은 형이상학이라고 하면 알 수 없는 철학적 개념들이 난무하는 해괴망측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형이상학이 무엇을 다루는 학문인지 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제 철학의 자리는 더 이상 없다. 철학의 종말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과학이 대신한지 오래 되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대략 스무 권 정도 책을 집필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길 죽기 전 자신의 원대한 계획은 <형이상학>을 집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거의 모든 학문을 넘나들며 세계 지식의 원리를 탐구한 그가 최종적으로 서술하고 싶어하는 것은 이 세계의 작동 방식이다.

 

그로서도 철학은 더 이상 사람들을 매혹시키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최종적인 지식은 반드시 철학이 풀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 철학은 현대 과학을 따라가지 못한 채 고담준론이 되어버린지 오래되었지만, 과학의 영역을 온전히 이해한 자가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며 그 역할은 본인의 것이라는 말이다.

 

교양

 

이 모든 건 교양으로 귀결된다. 아인슈타인은 철학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고 과학 없는 철학은 맹목이라고 말한 바 있다. 스페셜리스트만이 요구받는 오늘날에 교양의 미덕은 부가 상품이 되어버린지 오래되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교양의 힘을 강조하는데 어느 한 가지에만 골몰되어 세상을 자유롭게 바라보지 못하는 것. 그것은 교양의 상실을 의미하고 또 그런 지적으로 편협한 사고가 일본을 지배하고 있기에 앞으로의 일본을 걱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양이란 어느 한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자유의 눈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 시대를 포착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는 것. 그것이 교양을 얼추 나타내는 서술이며 독일어로 교양이란 buildung이다. '쌓는 것'이란 의미다.

 

저자가 말하길 현대의 교양은 까뮈,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가 아니라 뇌과학이며 물리학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렇다고 과학적 지식이 전부라는 것이 아니라 교양 또한 시대에 따라 움직일 필요가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책은 무한대의 힘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말했다. 책은 무한대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나 또한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제 아무리 즐거운 것이라도 지식을 탐구하는 것보다 즐거운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고 글을 읽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위선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 마음이 편안했던 순간은 방 안에서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나 홀로 지적으로 탐구할 때 뿐이었다. 

 

책은 무한대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다치바나 다카시는 내 인생의 멘토이다. 나 또한 그와 비슷한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항상 불운했던 내 인생은 책을 통해서 조금은 괜찮아 졌다.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할 때 나를 보다듬어 준 건 책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책의 힘과 교양의 힘을 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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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머시니스트> 



일 년째 잠에 들지 못하고 있는 남자가 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탓에 엄청난 마른 체격을 한 그의 이름은 '레즈닉', 아무리 약을 먹어도 잠에 들 수 없는 그의 운명은 안타깝기만 하다. 멍한 정신 상태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레즈닉은 그럼에도 매일 같이 공장에 일을 하러 나간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반'이라는 남성이 레즈닉 앞에 등장한다. 공장 사람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아이반이라는 남성은 레즈닉에게 무언의 신호를 자꾸만 보낸다. 작업 중 갑자기 등장한 그의 모습에 시선이 빼앗긴 레즈닉은 사고를 내게 된다. 동료 '밀러'의 손이 잘려나가게 된 것. 그 일로 인해 레즈닉은 공장에서 쫓겨 나게 된다.


한편, 불면증에 괴로워하던 레즈닉이 매일 밤마다 가던 카페가 있었다. 그 곳에 있던 '마리'라는 직원을 보기 위해서 였다. 미혼모였던 마리는 아들 '니콜라스'를 데리고 레즈닉과 놀이공원에 가게 된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는 니콜라스. 깜짝 놀라 달려오는 마리의 모습은 레즈닉의 눈에  이상하게만 비춰진다. 


공장에서 쫓겨 난 레즈닉의 주변을 맴도는 아이반. 레즈닉은 그를 추적하다 실패하자 그의 자동차를 조회하게 된다. 이내 드러나는 현실. 아이반이 타던 자동차는 레즈반의 자동차였다. 아이반은 레즈닉에게 다가가 진실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과거의 자동차 사고가 레즈닉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마리의 아들이었던 니콜라스를 뺑소니 사고로 죽이고 도망쳤던 기억을.. 


영화는 레즈닉이 경찰서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감옥에 들어가는 장면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그리고 레즈닉은 일 년동안의 불면증에서 벗어나 서서히 잠에 들기 시작한다.


영화의 분위기는 꽤 무겁다. 엄청나게 마른 레즈닉(크리스찬 베일)의 몸체와 일년 넘게 잠에 들지 못했다는 설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아이반이 레즈닉의 환상이었다는 설정은 꽤 식상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마지막 레즈닉이 감옥에서 잠을 드는 장면을 통해 영화는 죄책감, 양심의 가책이라는 주제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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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제69회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다. 영화 감독 켄 로치는 영국 사람이며 노동계를 대변하는 작품을 주로 만든다고 한다. 이 영화는 주인공 '다니엘'(영화 포스터 인물)이 영국의 복지 제도가 형식적, 관료적인 나머지 위험한 심장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로부터 돈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는 다니엘이 심장병이 심해져 일을 그만두고 관공서에서 질병 수당의 대상인지를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형식적인 물음만 반복하는 직원. 결국 다니엘은 질병 수당 대상에서 탈락된다. 일을 할 수 없는 처지인 다니엘은 항소를 하지만 시간이 걸리기에 어쩔 수 없이 실업수당을 받으려 구직 활동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모두 인터넷을 통해 신청을 해야 하는데, 나이가 들어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다니엘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저 방법만을 알려주고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 직원들. 그 때문에 분노가 점점 더 쌓여가는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관공서에서 우연히 어려움에 처한 케이티를 도와 주게 된다. 홀로 아이 두명을 기르다 영국으로 이사하게 된 케이티는 지독한 생활고를 겪는다. 힘든 사정에 있는 다니엘은 케이티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그녀를 힘껏


일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다니엘이 스스로 사람들을 속이고 이력서를 넣었다가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제대로 된 구직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제재를 가하겠다는 직원의 말에 다니엘은 무언가 다짐을 하게 된다. 관공서의 벽면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전에 항고 배정을 요구한다.'라고 적는 다니엘. 영화는 항고 심판일 당일, 항고에서 승리할 거라는 변호사의 조언을 들으며 화장실에 가던 다니엘이 쓰러져 사망하는 것을 끝나게 된다.


영화는 시종일관 내내 불편함을 그려내고 있다. 복지 수당을 신청하러 온 사람들은 비인격적으로, 사물로 대하는 직원들의 모습. 관료제 안에서 기계처럼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 그들에겐 절차만이 있을 뿐이며 휴머니즘은 사라진지 오래다. 앞에선 설명을 안했지만 홀로 아이 두명을 키우는 여성 '케이티'는 가난을 이겨내지 못한 나머지 매춘부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매춘을 택한 사람들에 대한 문제의식도 영화는 그려내고 있다. 또한, 디지털로 모든 시스템이 이동하지만 소외 계층에 대한 배려는 제공하지 않는 허점 또한 존재한다.


영화에 대한 반론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관료제의 폐해는 그려내고 있지만 복지 국가를 '선'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재원은 어디서 오는가? 영화는 보수당을 엘리트주의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경제 성장은 어디서 오는가? 급진적 정책은 결국 혼란과 부패만을 가져오지 않는가?


현재 세계적으로 복지국가로 가는 패러다임은 사라지지 않을 듯 하다. 포퓰리즘이라는 비판도 계속 제기되고 있지만 생산수준이 계속 증가하면서 의식주, 병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등을 감당할 재원은 충분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엔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 관료제를 A.I 시스템으로 전환. 등 다양한 시도들이 이어지면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나오는 억울한 사례는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맥없이 죽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 주장은 동물의 세계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다. 이런 기본권의 보장과 재원과 세금 부담 사이의 갈등은 사라지니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시사하는 점은 우리는 인간이며, 휴머니즘을 잊어선 안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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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동양 고전 중 가장 뿌리가 되고, 널리 읽히는 책은 당연 <논어>다. 공자님의 말씀은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흔히 4서 5경이라고 해서 조선 시대 선비들이 달달 외웠던 책들이 있다. 사서 : <논어>, <맹자>, <대학>, <중용>, 5경: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이 바로 그것이다. <논어>에는 어떤 말이 적혀있길래 4경으로 꼽혔으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의해 계속해서 읽혀져 왔던 걸까?


<논어>는 한 사람의 작품은 아니다. 몇 대에 걸쳐 계속해서 적혀진 책이라고 해야 할까. 성경과 비슷하다. 한 명의 저자가 아닌 지성이 계속 내리고 내려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을 때 <논어>가 출간하게 된 것이다. 공자가 한 언명들을 기록한것이긴 한데 예수가 죽고 난 후 집필 된 성경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 (정확한 정보는 아니다..  참고만 하시길) 


총 20편으로 구성된 <논어>에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깨달음이 자주 나온다. 


"배우고 때에 맞춰 이를 실천하니 이 아니 즐거운가!(1.1)"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적해야 한다(1.16)"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혹되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2.15)"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4.8)"


"군자는 말이 어눌하지만, 실행에는 성실하게 노력한다(4.24)"


"이제 겨우 한 삼태기의 흙만 쌓았다고 해도, 실행하게 되면 나는 전진하는 것이다.(9.19)"


"군자는 화합하지만 동일하지 않으며, 소인은 동일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13.23)"


"사람이 원대한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15.11)"


"군자는 자신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15.20)"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강제하지 말라(15.23)"


<논어>를 읽다보면 자신의 생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에 대해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가령, "군자는 자신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15.20)"와 같은 단순한 진리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왜 그토록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며 살아왔는지 헛웃음이 자꾸만 나오게 된다. 


'인간은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진정으로 감명깊게 읽은 책. 자신의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책이라면 한 인간의 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논어>는 그 자격이 충분한 책이다. 인류 4대 성인으로 예수, 소크라테스, 싯다르타, 공자가 꼽힌다. 그런 공자의 깨달음을 기록한 <논어>는 그 어떤 책에 견주해보더라도 깊은 내공을 가지고 있다. 


<논어> 맨 처음에 나오는 학이시습지는 너무 유명한 구절인데 "배우고 때에 맞춰 이를 실천하니 이 아니 즐거운가!(1.1)" 라고 공자는 말하고 있다.  공부하는 것을 즐거워 하는 상태. 앎에의 욕구. 이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시작과 일치한다. 배우는 것 자체가 즐거워지는 경지. 놀랍기만 하다. 나중에 공자는 자신의 마을에 충실함이 자기와 동등한 사람은 몇 될테지만 학문에 대한 포부가 자신보다 큰 자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학문에 대한 자부심 만큼은 누구보다도 대단했던 공자였다. 인간에게 있어 '배움'을 상당히 강조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부분에서 계몽주의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교육과 배움이야말로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이자 바람직한 즐거움이라고 생각한 공자의 가치관은 쾌락과 소비의 유혹으로 점철되어버린 21세기에 아직도 시사해주는 점이 많다. 


말보다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자의 말 또한 새겨들을만 하다"군자는 말이 어눌하지만, 실행에는 성실하게 노력한다(4.24)" "이제 겨우 한 삼태기의 흙만 쌓았다고 해도, 실행하게 되면 나는 전진하는 것이다.(9.19)" 사람들 앞에서 성인군자처럼 말하기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성인의 모습이다. 비록 말재주가 서툴더라도 미혹되지 않고 충실하게 나갈 수 있는 행동력이 있다면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사람들 또한 그를 따를 것이다.


성인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일 것이다. 공자 또한 마흔이 되어야 불혹의 경지에 들어섰고 일흔이 되어서야 말과 행동을 세상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연스러운 상태에 들어섰다고 말했다. 우리가 <논어>를 통해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점이 있다면 이 위대한 인물도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점일 것이다. 


공자는 "사람이 원대한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15.11)" 라고 했다. 우리가 만약 충분히 고민하고 숙고한 끝에 원대한 생각(비전)을 가지게 된다면 근심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고 정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 <논어>라는 지침서가 있다. 인격의 완성에 이르는 길에 있어서, 삶의 참 된 의미를 찾는 길에 있어서, 자신에게 이르는 길에 있어서 지혜의 보고인 <논어>는 하나의 빛으로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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