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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온 더 브레인
알리 헤이즐우드 지음, 허형은 옮김 / 황금시간 / 2024년 1월
평점 :
우주, 과학, LGBTQ, 채식, 트위터, 고양이, 너드, 타투 등 미국에서 핫한 주제다. 여기에 혐관, 스릴러, 삼각관계, 환승, 추리를 더하면? 바로 『러브 온 더 브레인』 되시겠다.
『러브 온 더 브레인』의 주인공은 보라색 머리에 코 피어싱을 하고 타투를 사랑하는 비 쾨닉스바사(Bee Koenigswasser)다. 이름부터 외모까지 평범한 구석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주인공의 직업은 무려 신경과학자! 박사 과정 밟으러 들어갔더니 비를 극혐하는 선배 박사가 철저하게 대놓고 무시한다. 모두 그 선배에게 호감이 있을 정도로 평이 좋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유독 주인공 비에게만 차갑고 무례하게 대하는 리바이 워드(Levi Ward) 덕분에 비의 박사과정은 악몽이 됐다. 게다가 비의 행복한 약혼은 파혼으로 끝나고, 나사의 신규 프로젝트 블링크에 팀장이 되어 인생이 피려나 했더니 다시는 안 볼 줄 알았던 그놈이 공동 팀장이라니. 192cm 장신에 얼음보다 차가운 녹색 눈으로 비를 내려다볼 생각을 하니 끔찍하기만 하다. 연구는 시작부터 삐거덕대고,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리바이에게 새로운 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웃고, 설레고, 궁금증이 폭발해서 도파민이 솟구치는 소설이다. 중간엔 예상과 너무 다르게 흘러가서 나도 모르게 '으아아아!' 소리를 지를 뻔했다. 결말은 뻔한데 과정이 정말 흥미진진하다. 최근에 로맨스 소설이래봤자 18세기 고전소설을 읽었다 보니 『러브 온 더 브레인』의 전개가 매우 빠르고 대사가 직설적이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전문적이지만 전문적이지 않게 그러나 전문적인
주인공이 신경 과학자이기에 온갖 신경과학이 난무하고 나사의 우주 프로젝트 등장한다. 챕터마다 뇌의 해부학 용어를 제목으로 제시한다. 소설가가 이렇게 조사를 많이 했단 말이야 하면서 보니 저자 알리 헤이즐우드가 신경과학자이다. 본업을 소설에 녹였다니! 그래서 소설 초반에는 '레슨 인 캐미스트리'의 주인공 엘리자베트 조트와 같은 너드 캐릭터를 예상했다. 나의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고 독자의 수준을 고려해 작가가 적절하게 풀어 주어 한숨 돌렸다. 우주비행사가 비행하는 환경에 대한 설명이 나온 대목이 있는데 이 부분은 굉장히 신기하면서도 우주에 나가고 싶었던 막연한 꿈을 고이 접게 해주었다. 계란 썩은 냄새가 가득 찬 우주라니 나중에 코가 마비되면 모를 수도 있겠지만 비싼 돈을 내고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나가고 싶은 곳은 아닐 거 같은데...
어떤 걸 좋아할지 몰라 다 넣어봤어 근데 잘 버무려진
요즘 핫한 키워드는 모두 『러브 온 더 브레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주, 과학, LGBTQ, 고양이, 채식, 트위터, 페미니즘 등 시대를 반영하는 소설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다. 거의 500여 쪽에 달하는 꽤 진 장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쇼츠나 틱톡처럼 도파민 터지는 짧은 웹 소설 같다. 독자들이 좋아하는 클리셰도 많이 들어가 있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게 잘 엮은 방법 중 하나는 마리 퀴리의 일대기를 빌려온 설명이 아닐까 한다. 주인공 비가 가장 좋아하는 과학자로 최초의 방사성 원소를 발견한 마리 퀴리가 겪은 여성 과학자의 애환과 연애를 비가 겪는 상황에 맞추어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남성의 영역이라고 치부되는 스템(STEM 과학, 기술, 공학, 수학) 계열에 속한 여성의 어려움을 신랄하고 재치 넘치게 표현해 주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게다가 혐관, 삼각관계, 질투, 스릴러까지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장르는 다 들어가 있으니 츄라이 츄라이!
1903년 6월 영국 왕립과학연구소가 퀴리 박사를 특별 교수로 초빙했다가 열등한 여성의 뇌로 어찌 강의할 수 있겠냐며 강단에 서지 못하게 했던 것 기억하나? 그래서 퀴리 박사는 청중석에 앉아 있고 피에르가 대신 강연해야 했지. P. 313
이것이 미국의 맛인가
표지는 YA(영 어덜트 Young Adult)인데 내용은 짜릿한 어른의 맛이다. 공공장소에서 읽고 있다가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혼자 부끄러워진 건 비밀로. 저자의 말에 보면 나중에 추가한 장면이라는데 미국 독자들은 이런 부분을 굉장히 좋아하나 보다. 난 유교걸이라 전체 연령 독서 가능한 책에 이렇게 적나라하게 그것도 여러 번 묘사가 되는 게 참 놀랍다. 그리고 진도가 매우 빠른 이들의 감정 선의 파도를 따라가다 보면 어질어질 할리우드가 따로 없다. 이와는 또 반대로 자신의 분야에서는 제일가는 신경과학자가 사랑에 빠진 자기 맘을 알아채는덴 굉장히 힘들다. 이런 거 보면 이탈리아인인 작가의 로맨스가 한 스푼 들어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따스한 바람이 불고 꽃이 만개하는 봄에 공원에 나가 간질간질한 로맨스 소설 『러브 온 더 브레인』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소설 같은 사랑에 빠지는 봄이 될 수도 있다.
#문장수집
그럼 대신 믿을 수 있는 건 뭐냐고? 평생토록 절대로 퀴리 박사를 저버리지 않은 게 뭘까? 그건 바로 박사의 '호기심'이다. 박사의 '발견'과 '업적'이다. P. 9
나는 일곱 살 때부터 고기를 안 먹기 시작했다. 나의 시칠리아인 할머니가 매일 식탁에 올리는 맛난 뽈로(닭고기) 너겟과 농장에서 풀 뜯는 귀여운 갈리네(암탉)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까운 관계인 걸 알고부터다. P. 45
뭐래, 우리 퀴리 박사님은 당대 유일한 여성 과학자가 아니었다. 리제 마이트너 박사, 에미 뇌터 박사, 앨리스 볼, 네티 스티븐스 박사, 헨리에타 리빗 등 셀 수 없이 많은 여성 과학자가 당대에 활동하면서 그들의 섬세한 손가락으로, 팀의 애석한 궁둥이가 평생 해낼 수 있는 것보다 몇 배 대단한 업적을 일구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팀은 몰랐다. 왜냐하면 (나도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팀은 멍청하니까. P. 63
남자들이 똑똑한 여자보다 더 싫어하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똑똑한 여자다. P. 146
리바이가 와 있으니 그의 팀원들도 내 제안에 더 순순히 동의한다. 이게 바로 '고추 무게 얹기'현상이다. 애니와 나는 그렇게 불렀다. 고추 대잔치나 남탕 연대에서 여자인 나를 남자 한 명이 지지하면, 나머지 사람들도 내 의견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현상을 뜻한다. 그 남자가 무리에서 존중받을수록 '고추 무게 얹기'는 더 큰 힘을 발휘한다. P. 151
애니가 줄곳 주장하던 재밌는 이론이 있다. 누구나 인생이 획기적으로 변하는 원년이 있다는 이론이다. 살다 보면 어느 시점에 특별한 사람을 만난다고 한다. 그 사람이 인생을 뒤바꿀 만큼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후 10년, 20년 아니 65년이 지나서 돌아보면 자신의 인생이 두 시기로 나눠지는 순간이 그때였음을 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등장하기 전(기원전)과 등장한 후인 나만의 서력기원(기원후)으로 나뉜다는 말이다. 개인별 그레고리력이라고 할까. P. 351
외로운 뇌는 쪼그라들지는 않지만 약간 시든다. 외로움은 추상적이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은유가 아니다. (중략) 외로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우리의 신체까지 조형한다. P. 437
이 소설은 표준화된 시험을 향한 증오의 편지다. 동시에 신경과학과 스타워즈, 스템 계열 여성들, 심하게 흔들렸던 우정을 어떻게든 바로잡으려 애쓰는 사람들, 연구 조교들, 학제 간 협력 연구, 엘 우즈, '연구자들이 내뱉는 황당한 말들' 계정, 인어들, 벌새 모이통, 운동을 유독 힘겨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고양이들에게 바치는 사랑 고백 편지이기도 하다. P. 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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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대신 믿을 수 있는 건 뭐냐고? 평생토록 절대로 퀴리 박사를 저버리지 않은 게 뭘까? 그건 바로 박사의 ‘호기심‘이다. 박사의 ‘발견‘과 ‘업적‘이다. P. 9 - P9
뭐래, 우리 퀴리 박사님은 당대 유일한 여성 과학자가 아니었다. 리제 마이트너 박사, 에미 뇌터 박사, 앨리스 볼, 네티 스티븐스 박사, 헨리에타 리빗 등 셀 수 없이 많은 여성 과학자가 당대에 활동하면서 그들의 섬세한 손가락으로, 팀의 애석한 궁둥이가 평생 해낼 수 있는 것보다 몇 배 대단한 업적을 일구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팀은 몰랐다. 왜냐하면 (나도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팀은 멍청하니까. P. 63 - P63
남자들이 똑똑한 여자보다 더 싫어하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똑똑한 여자다. P. 146 - P146
1903년 6월 영국 왕립과학연구소가 퀴리 박사를 특별 교수로 초빙했다가 열등한 여성의 뇌로 어찌 강의할 수 있겠냐며 강단에 서지 못하게 했던 것 기억하나? 그래서 퀴리 박사는 청중석에 앉아 있고 피에르가 대신 강연해야 했지. P. 313 - P313
외로운 뇌는 쪼그라들지는 않지만 약간 시든다. 외로움은 추상적이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은유가 아니다. (중략) 외로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우리의 신체까지 조형한다. P. 437 - P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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