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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알 ㅣ 환상하는 여자들 1
테스 건티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3월
평점 :

굉장히 현실적인 캐릭터 묘사로 소설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현시대가 감추고 싶어 하는 부분의 민낯을 과감하게 보여준다. 냉소적인 묘사 군데군데 희망을 묻혀놨기에 작가의 관찰력과 과감한 시도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우주의 알』의 원제목은 The Rabbit Hutch(토끼장)다. 소설 속 가상의 도시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지어진 아파트를 지칭하는 말이다. 대부분의 집이 햇빛도 들어오지 않게 빽빽하게 들어찬 토끼장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평범해 보이는 이들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해결점과 평행선을 달리는 이들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이 소설의 작가 테스 건티는 첫 작품인 『우주의 알』로 전미도서상에서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과감하고 독창적이며 재치가 넘치는 작품을 드디어 한국에서도 만나볼 수 있게 됐다.

소설은 블랜딘이 육체를 이탈하며 시작한다. 명확히 알 수 없는 말로 시작되는 소설은 의문과 궁금증을 자아낸다. 『우주의 알』은 시간과 시점을 뒤바꾸며 전개된다. 토끼장에 사는 여러 주민과 가상의 도시 바카베일에 사는 이들까지 혼란스러울 정도의 복잡함은 낯선 도시 한가운데에서 느끼는 당혹감 또는 낯섦과도 닮아 있다.
힐데가르트를 비롯한 가톨릭 여성 신비주의에 빠져있는 블랜딘은 꿈에서 깨어나길 원한다. 누군가의 허망한 꿈일 수도 있고 환상 같은 멋진 꿈일 수도 있다. 각자의 세계 속에 갇혀 마주하지 못하는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소설이 전개되면서 각자의 꿈이자 우주의 알이 깨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지독히도 현실적인 면들을 마주하면서.
우리 모두는 그냥 몽유병 환자처럼 꿈꾸며 걷고 있을 뿐이에요. 난 깨어나고 싶어요. 그게 내 꿈이에요. 깨어나는거. P.44

어딘가 이상하고 부족한 인물들을 보면서 주위에 있을 법한 이들을 떠올릴 수 있다. 굉장히 똑똑하지만 사회성이 없는 블랜딘, 부모님을 사랑하고 성실하지만 일머리가 부족한 조앤, 유명하고 사랑받는 배우지만 자녀 양육엔 실패한 엘시, 어머니의 부유함 덕분에 희망 없는 백수로 지내는 엘시의 아들 모지스 등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이들은 소설이 전개됨에 따라 하나 둘 엉키기 시작한다.
명확한 선과 악은 없지만 경계선에 걸쳐 있는 이들은 주요 산업이 떠나간 쇠락한 도시에 살고 있고, 부유한 기부자 덕분에 토끼장 같은 곳이라도 거처를 마련할 수 있고, 인터넷을 뒤져 얼굴도 모르는 이의 이름과 주소를 캘 수도 있다. 지구 건너편에 있는 우리도 크게 다를 바 없이 살아가고 있다. 비슷하게 생긴 도시에서 비슷한 주거환경에서 비슷한 직업을 갖고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멀리서 보면 평범하나 가까이서 보면 각자만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 명확한 해답 없는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지극히 평범한 이들. 작가는 이들의 삶을 굉장히 차갑고 냉담하게 묘사한다. 주인공 격인 블랜딘의 인생이 걸린 큰 문제조차도 거리감 있게 묘사하는 것이 독특했다.
군데군데 묻은 희망에 따스함과 친절이 있어 『우주의 알』에 깊이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블랜딘과 같이 사는 말리크와 잭이 블랜딘에게 잘 보이려 엉뚱하게 애쓰는 부분은 십 대의 귀여움이 묻어났다. 모지스가 신부님을 만나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 장면에서는 외로운 이의 모습이 보였다. C6에 사는 아이다 레지 부부의 젊었을 적 꿈꾸던 여행지에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할 때는 집이란 공간이 주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조앤이 친절하게 대하는 노숙자와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따스한 정이 느껴졌다. 희망이 없을 것 같은 곳에서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각각의 희미한 빛을 내며 도시를 밝히고 있다.

인터넷 기사 댓글 창을 나타낸 부분이며 사망 기사나 등장인물의 작품인 일러스트를 넣는 것는 것도 여타 소설과 다르게 느껴졌다. 영화처럼 장면 장면이 바뀌는 듯한 전개를 나타내는 부분은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소설이라는 형태의 글을 읽는 것이지만 인터넷과 영상의 특징을 모두 담아 지금 이 시대란 특징을 고스란히 담은 상자처럼 느껴졌다. 천선란 작가님과 김지원 번역가님의 온라인 북토크에서 다양한 느낌과 감상이 나왔다. 읽는 이들마다 다채로운 감상을 나눌 수 있는 소설이라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다른 독자의 후기가 궁금해진다. 프리즘처럼 다양한 빛을 내뿜은 『우주의 알』은 참 매력 있다.

은행나무에서 책을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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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그냥 몽유병 환자처럼 꿈꾸며 걷고 있을 뿐이에요. 난 깨어나고 싶어요. 그게 내 꿈이에요. 깨어나는거. P.44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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