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영화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잘 안됐다. 잘 안되기만 해도 힘들 텐데 문신형님 돈을 갚아야 하는 처지다. 돈을 갚기 위해 영어강사 알바를 하기 시작했고 수능 영어 지문에 철학 지문이 많은 것을 알고 단순히 문제 풀이만 알려주는 게 아니라 철학에 대해서도 잘 알려주고 싶어 하는 강사가 된다. 현재도 영어 강사이며, 딸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딱 이만큼의(?) 이야기인데 뭐랄까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저자의 인생을 다 흝어본 기분이 드는 동시에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내가 픽한 멤버를 응원할 때 느꼈던 절박한 응원의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인생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더라도 / 황영(글) / 김태균(그림) / 마음연결]
들어가는 말에서 출판 계약한 걸 후회할 만큼 부담감이 몰려와서 글쓰기가 힘들 자 글쓰기에 대해서 말하는 책을 찾아 읽어보니 모두가 일관되게 '계속 써'라고 했단다. 그래서 속는 셈 치고 아무 말이나 계속 썼는데 결과도 아무 말이라 실망했다고. ㅋㅋ 나는 그 고백에서부터 황용 저자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이어지는 졸작을 쓸 권리에 대한 이야기도 마음을 훔쳤다.
40대 후반의 가난한 영어 강사의 글을 누가 관심을 가지고 읽어 줄까 싶다.라는 문장에 나 역시 현실적으로 이 책이 안 팔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머리말 읽었는데 말이다. 책 읽던 가락으로 느낌 아니까? 책을 읽지 않는 사회에서 이 책이 눈에 띄긴 쉽지 않아 보인다. 이후 그럼에도 한 명이라도 이 책을 읽고 위로를 받는다면 좋겠고 사실 이 책은 못난 아빠 못난 남편으로서 아내와 자녀에게 하는 변명이라는 말로 끝맺음 한다.
머리말 이야기를 길게 쓰는 건 머리말이 책의 모든 걸 말해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 어떤 책보다도 단연코. ㅋㅋ
책의 오분의 일은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이야기, 이어지는 오분의 일은 고군분투하다가 문신형님 빚 얻어서 똥씹은 표정 아니 껌 질겅질겅 씹으면서 영어강사 알바 한 이야기, 오분의 이는 마음을 다시 고쳐먹고 잘나가는 영어강사가 되어 문신형님 빚도 갚고 자기 사업(학원)까지 일궜다가 코로나로 망(?) 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다. 마지막 오분의 일은 (사실 오분의 일까지는 아니나 여하튼) 교습소를 하며 근근이 살고 있는 이야기다.
이 내용들 사이에 영어가 있고 철학이 있다.
"소크라테스와 점심을 먹을 수 있다면 애플의 모든 기술을 포기할 수 있다"
스티브 잡스가 예전에 이렇게 말했다지? 이 책을 읽고 비로소 이 문장이 내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알겠다. 왜 소크라테스와 점심을 먹고 싶었고 그 시절 소크라테스는 그토록 인기가 있었는지 이제는 좀 알겠는 거.
그래서 내가 이 책에 가장 감사한 건 그동안 등한시했던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해준 것을 꼽겠다.
★ 질문에 대한 사유와 답을 찾아가는 기쁨, 꼬리에 꼬리를 물며 생각나는 질문, 무지를 넘어서는 깨달음의 상쾌함, 태도의 변화, 또다시 일어나는 앎에 대한 충동을 경험했으면 좋겠다. (p.24)
★ AI가 모든 업무를 대신해 주더라도, 자신과 삶에 대한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p.26)
★ 의미가 다양한 행복이라는 용어를 함부로 단일한 의미로 정의해 설명할 수 있을까? (p.29)
★ 사실 당신의 행복은 심리학자들이 '긍정적인 감정'이라고 말하는 긍정적인 기분의 강렬함보다는 그것의 횟수에 훨씬 더 의존한다. 달리 말해서, 좋은 소식은 일단 좋은 소식이다. 얼마나 좋은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즐거운 삶을 살기 위해서 당신은 이러한 작은 감정들이 시간에 걸쳐 가능하면 고르게 퍼지도록 해야 한다. [2012년 11월 고2 전국연합 모의고사 31번] (p.33)
★ 덥다고 예배를 빠지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이 깊은 종교인이 아니다. 여름이야말로 어묵에 대한 내 신앙을 보여줄 좋은 기회다. (p.34)
★ 어묵과 이를 둘러싼 행위가 나에게 행복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상의 고통이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p.35)
★ 20년 동안 제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한 가지가 있다. 수능이 끝나고 고사장을 나설 때,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행복이 몰려왔다고 했다. 시험을 잘 봐서가 아니라 했다.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기에 그 자체로 큰 행복을 느꼈다. 네가 그런 행복을 맛보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p.39)
★ 뭔가에 몰입한 사람은 예술품처럼 아름다울 때가 있다. (p.40)
★ 나는 스타보다 배우가 좋다. (p.55)
★ 만약 당신이 자신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 어느 분야(또는 회사)에서 일한다면, 모든 사소한 것들이 눈덩이처럼 커져 매일매일의 재앙이라는 거대한 공이 된다. [2013년 9월 고3 수능 모의평가 27번] (p.66)
★ 고슴도치는 서로 거리를 두면서 적당한 온기를 찾는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고슴도치와 같다고 했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함께 있으면 불편하니 그 중간에서 적당한 거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박찬국,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21세기북스, 2021) (p.84)
★ 해결책에 관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새벽이 밝아 와도 꼬리는 잘리지 않았다. (p.125)
★ 티 안 나게 그녀를 관찰하느라, 옆으로 쏠렸던 안구가 아플 지경이었다. (p.129)
★
아무리 오랜 시간 기다린다 해도
또한 평생을 바쳐 노력한다 해도
내겐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 사람이란 있는 거다.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이해한다 해도,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 된다 해도
나로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사랑이 있는 거다.
언제나 아름다운 주인공을 꿈꾸는 우리
그러나 때로는 누군가의 삶에
이토록 서글픈 조연일 수 있음에.
[나카에 이사무, 냉정과 열정사이](p.140)
★ 문신 형님은 그녀를 놓아주라 했다. 운명에 저항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 했다. 사는 건 힘든 일이라 일갈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문신 형님의 입에서 나왔다. 문신 형님은 쇼펜하우어를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와 같은 통찰을 삶의 경험을 통해 얻었다. ( p.151)
★
그대들은 나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야 한다. "그대들이 의욕 하는 바를 언제든 행하라.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의욕 할 수 있는 자가 돼라!"
"그대들의 이웃을 언제나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지만 우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돼라! 커다란 사랑으로 사랑하며, 커다란 경멸로 사랑하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장희창 역, 믿음사, 2004]
★ 가난하지만 가난을 앓지 않았다. (p.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