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1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는 내내 지금은 잃어버린 사진들에 대한 기억으로 빠져 들어갔다.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은 이젠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대부분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수업에 사용되면서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정서발달을 위한 한 번의 수업을 위해 사용된 사진들은 그 뒤로 역사 속에서 사라져야 했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처럼 영 감을 못 잡는 토니 같은 인물들이 내 삶에 등장한다면, 그 역사는 앞으로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완전히 다르게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그 수업을 지도한 교사들은 자신의 수업이 많은 역사들을 지워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내겐 다행히 남아있는 몇 개의 사진이 있다. 그중 어떤 것은 작은 꼬마 아이 둘이 알록달록한 원피스를 입고 있는 사진이다. 아마도 6살쯤으로 기록되어 있는 그 사진 속에서 아이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밝게 웃고 있다. 어딘가 캠핑을 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진만으로는 기억을 복구하는 일이 버겁다.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 일기장 혹은 큼직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신문 기사 같은 것. 그게 아니에르노가 '세월'을 설명하기 위해 이 책에서 접근한 방식이다. 



글의 마지막에서 옮긴이는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라는 예언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특히 책의 중반부에 접어들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모든 것은 분명 사라질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웠다. 아니 에르노에 의하면 페미니즘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나 어느 순간 새로운 것이 되었고, 과학기술의 발달은 두려운 것에서 익숙한 것으로, 다시 두려운 것으로 회귀한다. 정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러니 사라짐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 자신이 그 사라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영화 <코코>에서 영혼을 기억하고 있는 생존자가 없을 때 그 영혼이 사라지는 것도, 우리의 역사 속 산증인의 임종을 두려워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책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책에 5점의 별점을 주는 건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이후 처음이다. 더군다나 <부분과 전체>의 60%쯤을 이해하고 추천했었다면,  이 책은 40% 정도밖에 이해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추천한다. 이 책은 검증되지 않은,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가치있는 역사서이기도 하며, 나이듦의 과정을 고백한 에세이이자 어느 가족의 사진첩이자 한 여자의 일기장이다. 모든 장르에 속하면서 어느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은 독특한 책이다. 



그렇게나 좋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40%밖에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지루함과 무지 때문이다. 지루한 첫 번째 이유는 같은 패턴으로 인한 지루함인데, 그건 그녀가 택한 주제가 '세월'이기 때문에 오는 어쩔 수 없는 결과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 이유는 이 글이 에세이도 소설도 아닌 형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에세이였다면 글에서 느껴지는 진솔함이 글의 매력을 살려줬을 것이고, 소설이었다면 갈등이 발생하고 해소되는 지점에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소설이 아니며, 옮긴이에 의하면 '다수의 역사'에 대해 쓰고 있기 때문에 일인청 시점으로 작성하지 않았다는 말이 적혀있다. 약간의 의아함이 든다. 다수의 역사에 대해 썼다고 해도 그 또한 일인칭의 시점으로 바라본 세상이 아닐지. 일인칭 시점을 택하지 않음으로써 독자가 그 역사에 함께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또한 견뎌야하는 지루함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글은 두 형식을 모두 택하지 않음으로써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세 번째 이유는 복잡한 문장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문장 자체의 복잡성 때문이다. 문장의 밀도가 높아 천천히 읽는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지만, 문장의 복잡성 때문에 읽는 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아주 지루한 일이다. 

가장 아쉬운 점은 독자인 내가 프랑스의 역사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이다. 읽는 동안, '왜 난 이 책을 읽기 시작해서, 무지로 인한 답답함의 형벌을 견디고 있는걸까' 라는 생각을 수도없이 했다. 이 책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 프랑스의 역사를 공부할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있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 앞의 역사까지도 이해한다고 한들 그 전의 역사, 그리고 또 그 전의 역사는 연기처럼 내 앞을 어슬렁거리다 사라질 것이다. 혹은 내가 먼저 사라질 지도 모를 일이다. 차라리 역사가 되고 있는 현재에 충실하다면, 아니 에르노처럼 적어도 내가 살아낸 삶의 역사에 대해서는 쓸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언젠가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아니에르노같은 작가가 한국에서 등장하길 바라고 있다. 누군가의 삶과 한 나라의 역사가 혼합된 일기장 같은 글을 읽고 싶다. 그때는 '역사에 무지해서 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다 읽고 난 후 가장 아이러니했던 문장.

p.31 우리가 미래를 대표한다는 연설이 있었다.


현 시대를 살며 답답한 우리들을 위로하는 문장

p.95 연설과 제도는 우리들의 욕망보다 뒤쳐졌고, 사회가 말로 표현하는 것과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격차는 당연했으며, 그것은 메울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책의 변곡점 같았던 문장

p.123 요컨대 과거와 미래가 뒤바뀐 것이다. 이제 욕망의 대상은 미래가 아닌 과거다.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 우리를 긴장시키는 문장

p.131 5월은 개인을 분류하는 방식이 됐다.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그 시국에 어느 쪽에 있었는지를 물었다. 양쪽 모두 똑같이 폭력적이었으며 서로 그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았다.


엄마를 이해하게 하는 문장

p.137 남자 없는 여자는 자전거 없는 물고기다라고 적힌 포스터를 깔고 앉았으며, 우리들의 인생을 다시 돌아봤고, 남편과 아이들을 떠날 수 있음을,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그리고 잔인한 것들을 쓸 수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면 결의는 식어버렸고 죄책감이 올라왔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지 못했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것에 대한 문장

p.171 그녀들은 자신들의 삶과 미혼, 이혼녀들의 삶을 비교했고, 기차역 앞에서 배낭을 메고 땅바닥에 앉아 천천히 우유를 마시는 젊은 여자 여행자들을 우울하게 바라봤다. 


무용하다고 느끼면서도 놓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문장

p.253 그를 단념한다는 것은 매일의 행위들과 무의미한 사건들을 누군가와 대화하고 일상을 언어로 표출하는 일을 그만둬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더 이상 기다림이 없어지는 것이고, 서랍 속의 레이스 티팬티와 스타킹을 보면서 이제 아무 쓸모 없어졌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며, Sea Sex and Sun을 들으며 몸짓과 욕망과 피로의 세상에서 배제된, 미래를 빼앗긴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상을 하면, 그 순간 이 박탈감이 그녀를 <마지막 사랑>인 것처럼 그에게 맹렬히 집착하게 만든다. 


모든 순간을 붙잡을 수 없다는 깨달음

p.280 실질적인 추억은 얼마 없는 또 다른 형태의 과거가 매끄럽게 나타났다. 하나씩 자세히 들여다보며 촬영했던 상황을 되짚어 보기에는 사진들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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